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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7-27 23:36:37

타릭(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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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초대받지 못한 손님3. 별자리 속의 얼굴4. 구 배경

1. 장문 배경

데마시아의 신성한 수호자라면 국왕과 국가를 위해 늘 이타적인 헌신을 기울여야 한다. 타릭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병역의 이행을 유지하고자 단 한 번도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소홀히 한 적은 없었지만, 누구를, 무엇을 지켜야 할지 정의하거나 제한을 두지 않았다.

젊은 전사 타릭은 고된 훈련 끝에 출중한 무예 실력을 갖췄고, 얼마 주어지지 않은 여가 시간마저 할애하여 전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고국에 헌신했다. 타릭은 환자들을 간호하거나 홍수로 피해를 입은 집을 복구하는 데에 힘쓰는 빛의 사자 수도회에 자원했다. 고귀한 신념을 갖고 날개 수호자라는 건축물을 지은 석공들과 기술공들에게, 변변치는 않지만 자신만의 창의적 재능을 기부했다.

예술 작품들과 낯선 이들의 삶, 바로 이러한 것들이 타릭이 데마시아를 위해 싸우는 이유였다. 타릭은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연약하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다행히 타릭은 상냥한 태도와 따뜻한 성격 덕에 동료 병사와 지휘관의 쓴소리도 가볍게 털어낼 수 있었다. 후에 타릭은 겸손한 마음으로 진급해 나갔고, 젊은 가렌 크라운가드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타릭은 꾸준히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훗날 데마시아 내에서 최종적인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불굴의 선봉대원으로 진급한 타릭은 갑작스레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행동 수칙을 강요받게 됐다. 더 이상 숲을 배회하며 희귀한 동물을 찾아볼 수도 없었고, 선술집에 앉아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으며 전투 훈련을 빼먹거나 부대 점검을 빠지는 일도, 은빛으로 빛나는 밤하늘을 지켜보는 일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타릭은 자신과 이 생활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윽고 병영 수칙을 따르지 않는 인물로 주목받게 됐다.

타릭이 발로란의 위대한 전사가 될 자질을 가졌다고 생각한 가렌은 타릭에게 병사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충고했다. 그럼에도 타릭은 자신의 국가뿐만 아니라 운명까지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강등을 막기 위해 타릭은 선봉대의 검대장을 돕도록 파견됐다. 그 어느 쪽도 만족스럽지 않은 처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장에서 검대장과 그의 부하들은 모두 전사하게 됐다. 당시 타릭이 오래전 폐허가 된 근처 사원을 감상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결국 전시에 직무를 유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십의 병사가 전사했고, 타릭은 단두대에 올라섰다.

그때 그의 전우이자 검대장의 후계자인 가렌이 자비를 구했다. 가렌은 직접 타릭에게 '바위산의 왕관'이라고 불리는 데마시아의 전통적인 형벌을 선고했다. 이는 타곤 산을 등반해야 하는 형벌로,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는 형벌이었다.

사실 바위산의 왕관은 불명예스러운 자를 데마시아에서 추방하여 유배자로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타릭은 실수에 대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몇 번이나 목숨을 잃거나 정신이 나갈 뻔한 적이 있었지만, 타릭은 모든 고통을 견뎌냈고, 전사한 전우들의 망령도 이겨냈으며, 이 거대한 산이 내린 다른 시련들도 극복해냈다. 정상에 다다르자, 타릭에게 죽음과 파괴의 환영이 펼쳐졌다.

알라바스터 대도서관이 연기와 불길에 휩싸인 광경을 보고 지옥 같은 화염 속으로 뛰어 들어가 퉁의 시집을 꺼내왔지만, 어느 서리방패 부족민들이 마지막 한 마리 남은 꿈사슴을 칼바람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모습에 비통함이 가득한 고함을 지르며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사슴을 구하려 하기도 했다. 급기야 불멸의 요새 입구의 교수대에 매달려있는 가렌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무너져 버린 타릭은 방패를 치켜들고 녹서스군을 향해 돌진했다.

환영이 사라지자 타릭은 산 정상에 서 있었으며,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 인간 형체를 빌린 무언가가 도드라져 있었다. 별빛으로 이글거리는 수정과 같은 형태였으나, 그 목소리는 몇천 명이 속삭이는 듯했으며, 칼날처럼 타릭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그 존재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사실 타릭은 평생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이고, 살면서 내린 모든 결정이 이곳 타곤 산까지 그를 인도한 것이라고 말이다.

훗날 대전쟁에 참전하게 될 발로란의 방패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필멸의 존재가 상상할 수 없는 천부적인 힘과 함께, 수호자의 성위로 다시 태어난 타릭은 온 세계의 굳건한 수호자로 살아갈 운명의 부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2. 초대받지 못한 손님

들판을 바라다본다. 한때 푸르렀던 이 땅은 우악스런 전투로 너덜너덜하게 황폐해졌다.

생명의 손실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을 내가 구해줄 도리는 없다. 누군가의 아들, 또는 누군가의 아버지일 저 모든 이들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이다. 데마시아인들과 녹서스인들은 언제나 자기 본성보다 저열한 무언가에 떠밀려 서로에게 달려들어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두 나라의 원대한 이상을 지키려는 자들이 꽤나 많다. 그들은 모두 내 일을 방해하며, 땅 한 뼘을 차지하기 위해 거의 환희에 가까운 감정으로 서로를 살육해간다. 이 대지의 진실된 의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양국의 군대는 이제 서로 어지럽게 얽혀 파멸의 군무에 열중해 있다.

저들을 설득하려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싸우라고 부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옛 동포들은 나를 역적 아니면 악한 신으로 생각하고, 녹서스인들은... 언제나 그랬듯 인내심이 모자라다.

필사의 정념이 도가니처럼 끓어오르는 싸움터에서 평소의 내 무기인 재치, 매력, 상냥함은 쓸모가 없다. 그래서 나는 붙잡으려는 자들을 흩어내고 막아서려는 자들을 밀쳐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끔찍한 행위가 펼쳐지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마침내 달아오른 전장의 한가운데, 나를 부르는 색채의 불꽃이 보인다. 군홧발에 밟히기 직전의 가냘픈 생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그 자리에 피어, 야만적인 싸움꾼들의 무신경함에 지지 않고 수정으로 만든 방울처럼 고고하게 아름다움을 퍼뜨리고 있다. 이 꽃의 마지막 남은 한 송이다. 이 한 포기가 스러진다면 이 꽃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다가오는 나를 발견한 양 진영 사령관들이 멈칫한다. 아무래도 나는 전투의 절정에 뛰어든 불청객인 것이다. 갑작스레 끼어든 나에 대한 분노 때문에 두 적대자가 갑작스런 동맹이라도 된 것 같다.

나는 정확히 두 군대의 충돌 지점 중앙에 서 있다. 양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차가운 죽음의 손길들을 마치 환영하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쥐고 나를 향해 두려운 발걸음을 떼어오는 저 병사들과는 달리, 나는 내가 싸우는 이유를 안다.

3. 별자리 속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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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열기 속에서, 나와 상대는 서로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그러다 뒤축에 힘을 주고 육중한 방패를 들어 올렸다. 휘황찬란한 태양이 그려진 방패는 눈을 제외한 내 몸 전체를 방어했다. 몸을 낮게 웅크린 채 중갑으로 무장한 발을 질질 끌며, 마치 굶주린 볼로처럼 서서히 전진했다.

상대의 황금빛 갑옷에 반사된 빛이 흙먼지를 뚫고 나왔다. 투구가 드리운 그림자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번득이는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난 기다렸다. 망설였기 때문이 아니라,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인내심에 보답이라도 하듯, 상대의 시선이 물러설 곳을 찾기 위해 흔들렸다. 난 마치 육체를 초월해 그 광경을 바라보는 느낌을 받았다. 수없이 훈련한 덕에 생각도 하기 전에 몸이 움직였다.

난 함성을 내지르며 쇼린에게 달려들었다. 방패를 들어 올리며 막으려 했지만, 나 역시 방패를 들어 상대의 체중을 이용해 넘어트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방패 위로 뻗어 목을 노렸다. 상대는 패배를 인정한다는 듯이 검을 옆으로 들었다.

방패는 들고 있었지만...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더군. 난 뒤로 물러서며 방어 자세를 취한 뒤 말했다. 그리고 땀이 흘러 불편한 눈을 깜빡이며 덧붙였다. 다시 해 봐.

그 말에 쇼린은 검을 집어넣고 방패를 풀며 괴로운 듯이 말했다. 잠깐만 쉬면 안 될까, 티아리? 열심히 했잖아.

난 몸을 세우며 고개를 끄덕인 뒤, 투구를 벗었다. 상대를 이겼으니 기뻐야 했지만, 오히려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겠지. 땀으로 젖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힘겹게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쇼린은 활짝 웃으며 투구를 벗고, 어두운색 땋은 머리를 한쪽 어깨 너머로 넘겼다. 갑옷 내피를 벗자 솔라리 보병대 수련생의 옷이 드러났다. 쇼린은 땀을 말리려는 듯, 옷을 잡아 흔들었다.

멋졌어. 빈틈을 보여 준 다음, 측면을 노리려고 했는데 안 통했네.

내가 키가 더 크잖아. 사실이었다. 난 평균 체형이었던 쇼린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체중도 더 나갔다.

그렇긴 하지만, 네겐 뛰어난 전사가 될 자질이 있어. 게다가 열심히 노력하잖아. 대체 누가 쉬는 날까지 훈련해? 쇼린이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똑같이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감사 인사는 됐어. 넌 앞으로 있을 시험에 대비해야 하잖아. 얼마든지 도와줄게.

쇼린은 장난스럽게 웃더니, 손을 허리에 올리며 내 앞에 와서 섰다. 넌 좋은 친구이자 뛰어난 전사야. 곧 너만의 방패진을 이끌 수 있을 거야. 대견해, 티아리.

난 씁쓸한 심정을 숨기려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쇼린과 난 라코어로서 태양과 선택받은 자를 위해 싸우는 솔라리 병사, 믿음의 솔라리가 되기 위해 애썼다. 어린 시절, 보호 마법이 발현된 이후로 나는 황금빛 갑옷을 입고 친구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영광을 꿈꿨다.

그리고 오랫동안 훈련한 끝에, 난 성장했지만... 마음은 멀어졌다. 다른 수련생들처럼 전투가 기다려지지 않았다. 기도를 올려도, 용맹스러운 전사들을 봐도 무덤덤했다. 그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어 눈 덮인 타곤 산의 비탈을 바라봤다. 요즘 들어 한결같이 장엄한 그 풍경에 더 자주 눈이 갔다. 그 비탈을 오르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 봤다. 신념과 투지를 품고 결행하는 위험천만한 등반... 가슴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하자, 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아직 완연한 겨울은 아니었다. 햇볕이 기분 좋게 내리쬐었다. 곧 냉기가 산을 타고 내려오면, 약간이나마 우리의 몸을 녹여줄 것이다. 난 갑옷을 마저 벗고, 고원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아래로 보이는 봉우리에는 사원에서 오후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이 보였다.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은 멀리서도 선명했다. 염소와 타무를 끌고 계곡을 지나는 목부들도 보였다.

다시 난 가까이 보이는 타곤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에 잠긴 지 얼마나 지났을까, 쇼린의 웃음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누가 누구보고 정신이 팔려 있대, 티아리?

이런. 당황하는 날 보며 쇼린이 미소 지었다.

여명의 전투에서 군대를 이끈다는 생각을 하면 설레지 않아? 설레는 듯이 팔을 벌리며 얘기하는 쇼린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미안해, 쇼린. 요즘 머리가 복잡해서 그래.

그렇겠지, 친구. 쇼린이 다 안다는 듯이 미소 짓자, 난 얼어붙었다. 우린 그토록 절친한 사이였다. 시험이 한 달밖에 안 남았잖아. 게다가 넌 가장 주목받는 수련생이고. 머리가 복잡한 게 당연하지.

실망감을 숨기려 고개를 돌렸다. 쇼린의 눈에 나는 그저 충성스러운 수련생일 뿐이었다.

더는 시험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기분과 불만을 전부 털어놓고 싶었지만, 너무 복잡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쇼린이라면 그 부담감을 이해할 터였다. 내 가장 친한 친구라면 내 심정을 알아주리라.

얘기해.

나도 설레지. 차마 얘기할 수 없었다.

표정은 전혀 아닌데.

쇼린은 옆에 서서 내가 올려다보던 타곤 산을 바라봤다. 태초부터 있었을 구름이 산 정상을 가리고 있었지만, 왠지는 몰라도 쇼린 역시 그 너머를 보는 듯했다.

티아리. 쇼린은 내 이름을 부르더나, 잠시 멈칫했다.

쇼린의 표정에 난 다시 얼어붙었다. 어딘가 익숙한, 나 역시 느껴 왔던 감정이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갈망이었다.

무엇을 향한 갈망?

입회 의식을 치르지 않을 생각이야. 쇼린이 구름을 응시하며 말했다.

뭐?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넌... 어릴 때부터 전쟁놀이를 했잖아! 너희 아버지는 네가 걸음마도 떼기 전에 검을 쥐었다고 자랑하셨어. 게다가 평생 의식을 위해 훈련해 놓고... 다 포기하겠다고? 대체 이유가 뭐야?

저거. 쇼린이 타곤 산 정상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산은 끝도 없이 하늘로 뻗어 올랐다. 정상까지 얼마나 멀지 아무도 몰랐지만, 쇼린의 표정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입이 떡 벌어졌다. 농담이지?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는 길을 걸을 생각이냐고? 당연하지. 난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고. 쇼린은 개운한 듯이 웃었다. 마치 애초부터 타곤 산이 유일한 목표였던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나는 그 신념이 부러웠다.

왜?

쇼린은 답답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도 그게 궁금했어. 처음 산의 부름을 들었던 그 순간부터 말이야.

너도 모른다는 거야? 솔라리 전사의 명예는 어쩌고? 성위의 축복이나 힘을 원해서 그런 거면 다른 방법으로 능력을 증명하면 돼. 훈련도 계속해야지. 조금만 더 하면—

관심 없어. 힘도, 명예도 내겐 중요하지 않아. 그저 답을 알고 싶을 뿐이야.

하지만... 가족을 생각해. 곧 보병대에 들어올 쇼린의 여동생 하데사와 은퇴한 전투 지휘관이자 쇼린의 아버지 윤덜린이 떠올랐다. 얼마나 실망하겠어?

쇼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게다가 무척 위험해. 가족이 걱정하겠지. 그래서 얻는 게 뭔데? 만약에 실패해서 영영 못 돌아오면?

한참 뒤에 쇼린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결정할 시간이 남았으니까. 목소리와 몸짓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어쩌면 보병대에서 내가 원하던 해답을 찾을지도 모르지.

잘 생각했어. 난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쇼린이 없는 세상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우리는 같은 방패조잖아. 네가 없으면 누굴 믿고 전투에 나서겠어?

쇼린은 산 정상을 흘낏 보더니 다시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좋아, 티아리. 아까 동작을 다시 해 보자.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어.


쇼린이 떠난 뒤에도, 난 훈련을 계속했다. 동작이 완벽해질 때까지 반복했다. 가족과 동족을 위해 완벽한 군인이 되어야 했다. 싸우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덕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할 때, 난 투구를 벗고 노을을 바라봤다. 땀으로 젖은 눈썹이 시원해졌다. 아직 남은 수확철의 벌레들이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곧 녀석들도 안식을 얻을 것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염소 울음소리와 부엌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평온하게 느껴졌다. 나도 곧 사촌 아누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해야 했다.

아누아는 믿음직스럽지만, 고집스러웠다. 언제나 자기가 갈 길이 뭔지 알았다. 해답을 구하며 혼란스러워하는 날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쇼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유도 모른 채 어떻게 떠날 생각을 한단 말인가? 난 그 정도로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 기분이 금방 지나가기를 바랐다. 난 반에서 수석이었고 지켜야 할 가족, 그리고 믿음이 있었다. 내게 주어진 역할에 비하면 내 바람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는 친구와 믿음, 가족, 명예가 있었다. 그런데 왜 그동안 다른 삶을 산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돌멩이를 집어 지는 태양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짐을 챙겼다. 갑옷과 검, 방패를 집어 들었다. 무기를 들어 올릴 때, 검에 반사된 내 얼굴이 마치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울하고 고독한 라코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나는 군인이자 지휘관, 태양과 어둠의 전쟁에서 싸울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라코어였다. 사람들이 날 그렇게 본다면... 난 그렇게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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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은 가볍게 내렸다. 시험이 몇 주밖에 안 남았기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수련생들과 나는 추위 속에서 마을 옆 비탈길을 오르내렸다. 태양은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우리의 체력과 믿음은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돋보이려고 애썼다. 군인의 마음가짐은 갖추지 못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연기를 해야 했다.

쇼린은 같은 방패조로서 내 옆에서 걸었다. 산의 부름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 듯했다. 그래서 고마웠다. 쇼린이 곁에 있으면 훨씬 외로움이 덜했기 때문이다.

난 좁은 길을 걸으며 급한 모퉁이를 돌면서도 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솔라리 기도문을 외고 있을 때, 쇼린의 외침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넘어지고 있는 쇼린이 보였다.

쇼린이 비틀거리며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난 검과 방패를 내팽개치고 몸을 던졌다. 내 보호 마법으로 방어막을 전개하려고 했지만, 너무 늦었다. 딛고 있던 바위가 갈라지면서 쇼린은 아래로 추락했다.

부주의했던 자신을 탓하며 가장 먼저 절벽 아래로 내려갔을 때, 끔찍한 광경에 숨이 턱 막혔다. 차마 혼자서 손을 쓸 수 없어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옆에 앉아 고통에 울부짖는 쇼린의 머리를 무릎으로 받쳤다.

솔라리 사제가 손에 신비한 마법의 불꽃을 피운 채 다가왔지만, 쇼린의 부상은 사원 밖에서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마을로 돌아가는 쇼린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졌다. 어쩌면 다시는 걸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며칠 뒤, 집으로 돌아간 쇼린을 찾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여동생과 아버지가 예의를 차리면서도 차갑게 쇼린의 방으로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가자 어린 시절 내 친구가 보였다. 담요와 베개로 다리를 받친 채 앉아 있었다. 옆에 나란히 앉자 쇼린이 지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침대 옆에는 여러 선물과 장신구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솔라리의 문장이 새겨진 펜던트도 있었다. 쇼린의 아버지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한 내 선물이었다.

쇼린, 정말 미안해. 내가— 가슴이 답답했다.

왜? 쇼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린 같은 방패조잖아. 내가 구해 줬어야지. 게다가 내 마법이...

쇼린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노려봤다. 정말 네 잘못이라고 생각해?

그래!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태양의 전사들은 동료에게 빛을 비춰야 하니까.

쇼린이 고개를 저었다.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게 지쳐 보였다. 적들과 전투를 할 때는 그렇겠지. 하지만... 산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별 수 있어? 그러더니 활짝 웃고는 몸을 움츠렸다. 내가 훈련에 집중을 못 했어. 네가 막을 방법은 없었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험에서 빠지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그 말에 쇼린이 코웃음을 쳤다. 송별 의식 때 산을 오르려고 다리를 부러트린다고?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쇼린의 말을 믿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려고?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어. 산이 날 부르는 느낌이었거든. 그래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 사실 꼭 몸을 망가트려서 시험에 떨어져야만 답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는데, 지금은 둘 다 못 하게 됐네. 말을 마친 쇼린이 씁쓸하게 웃었다.

한숨이 나왔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솔직해져야 했다. 처음 쇼린이 속내를 털어놓았을 때, 전부 털어놨어야 했다.

나도... 어떤 느낌인지 알아. 그 여정 끝에 뭐가 있을지 알고 싶지. 잠깐 말을 멈추자 쇼린이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수는 없어.

그렇지?

티아리. 쇼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넌 가야 해. 애써 부정하는 내게 쇼린이 몸을 숙이며 덧붙였다. 널 보면서 느꼈어... 아주 예전부터 말이야.

난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나도 몰랐던 걸 쇼린이 어떻게 알았지?

무엇보다 나도 느껴 봐서 알아. 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할 수 없어. 너도 변화를 원하잖아. 쇼린은 한숨을 쉬었다. 이번이 시험 전 마지막 송별 의식이야. 일단 보병대로 들어간 뒤에는, 주둔지를 벗어날 수 없어. 그게 더 불명예스러운 짓이니까. 정상에서 무사히 돌아오더라도 가족으로부터 의절당할걸.

쇼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이야. 반드시 떠나야 해.

머리가 복잡했다. 나도... 너무 갑작스러워. 넌 꽤 오래전부터 느꼈겠지만, 난 최근에 들어서야 깨달았어. 섣불리 결정할 수 없다고! 시험도 치러야 하고, 태양을 위해 봉사해야—

게다가 다른 수련생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지? 아누아는 어쩌고?

난 입을 다물었다. 산을 오를 생각에 가슴이 뛰는 건 사실이었다. 쇼린 얘기가 정말이라면, 훨씬 오래전부터 산이 날 불렀다는 뜻이 된다. 정말 나도 모르게 그동안 산을 올려다봤던 걸까?

되돌아보니 모든 게 명확해졌다. 내 눈에 산은 기회이자 희망이었다. 구불구불한 길과 치솟은 봉우리가 날 끌어당기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감정은 놀랍게도 동경이었다.

못 믿겠으면 라두악 님께 여쭤봐. 산을 잘 아시고 그동안 여러 라코어에게 조언을 해 주셨으니까. 분명 도와주실 거야.


난 솔라리 보병대와 잘 맞았다. 훌륭한 군인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 내가 '다른 운명'을 타고났다고?

라두악과 나는 먼 친척이었다. 게다가 쇼린 말이 맞았다. 라두악은 통찰력이 뛰어난 유명한 주술사였기에 조언을 구해 볼 만했다.

어린 시절, 내게서 마법이 발현됐을 때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 라두악은 삼촌께 내 마법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잘 지켜보라고 했다. 하지만 내 능력이 평범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라두악 밑에서 수련할 일은 없었다.

라두악은 산에 굴을 파서 살았는데,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았다. 나무로 짠 문은 돌을 깎은 부분과 딱 들어맞을 정도로 만듦새가 좋았다. 난 문 앞에 서서 잠시 마음을 다잡았다.

예의를 갖춰 문을 두드린 다음 뒤로 물러섰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려던 순간, 문이 안쪽으로 열리더니 라두악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보고 꽤 놀란 듯했다. 티아리?

네, 라두악 님. 오랜만이네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의아해하는 눈빛에 나는 괜히 움츠러들었다. 라두악은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바라보더니,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괜찮고말고. 삼촌과 함께 찾아왔었지. 어디 보자... 10년 가까이 됐나? 라두악이 잘 다듬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우리 수호자님처럼 다른 사람을 지키는 힘이었지. 중요한 능력이야. 특히 어린 전사에게는 더욱 그렇지.

맞습니다.

기억 속 라두악의 집은 거대했지만, 지금은 비좁게 느껴졌다. 울퉁불퉁한 벽과 천장에는 인장과 별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고, 작은 책상들 위는 두루마리와 양피지로 어지러웠다. 난 별자리를 표현한 듯한 모빌 아래로 몸을 숙여 지나갔다.

전사의 길을 걷기 전에 축복을 받으려고 왔느냐? 아니면 네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궁금해서?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림과 두루마리로 가득한 선반 앞에서 그저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전사의 의무가 아닌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렸다고 날 괘씸하게 보면 어쩌지?

아닙니다.

그래? 라두악은 아스트롤라베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 내 쪽으로 돌아봤다. 그렇다면...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최근에... 어떤 충동을 느꼈습니다. 제 지식과 야망을 뛰어넘는 것이었죠. 뭔가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떻게 얘기할지 수도 없이 정리했는데도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타곤 산에 오르고 싶습니다.

라두악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표정의 변화도 전혀 없이 물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위대한 도전을 시작하겠다는데, 반응이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는 등반을 위해 모든 걸 버리겠다는데도. 그러니까... 그게 옳은 길인지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라두악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더니, 마치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누구도 대신 결정을 내려 줄 수는 없단다, 티아리. 난 별을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할 뿐, 미래를 볼 수는 없어.

나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혹시... 별을 통해 무엇을 보시나요? 제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요?

라두악은 미소 지었다. 그러는 너는 무엇이 보이느냐? 그 순간 천장에 그려진 밤하늘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별들이 빛을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잡아 보려고 했지만, 손은 그대로 통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빛에 손이 닿았을 때, 분명히 열기가 느껴졌다. 난 그저 입을 다물고 놀라운 광경을 감상했다.

너도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능력을 지녔으니, 발로란의 방패 타릭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마. 라두악의 목소리와 압도적인 존재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수호자님은 원래 라코어가 아니라, 데마시아인이었다. 페트리사이트로 지은 북쪽의 먼 나라지. 그분은 군인이자 경비대원이었지만, 아름다움과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아셨어. 자연을 보며 기쁨을 느끼셨고, 위대한 예술 작품을 좋아하셨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많은 것들을 사랑하셨어.

타릭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사촌 아누아를 포함해 많은 라코어 부족 사람들이 아름다움과 생명의 수호자인 타릭을 숭배했다. 다만 나는 우리를 지켜 주는 태양을 숭배했기 때문에 평소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필멸자였던 타릭은 타곤 산에 올라 성위로부터 엄청난 힘을 얻었다. 산에 오르기 전, 군인이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다. 나는 동질감을 느꼈다.

타릭 님이 군인의 삶에 회의를 느끼던 중에 적이 데마시아를 공격해 왔다. 눈앞의 밤하늘이 위태롭게 번쩍이기 시작했고, 별들은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타릭 님이 지키기로 맹세했던 전우들은 적의 손에 쓰러졌다. 하지만 타릭 님은 직무태만죄로 받을 처벌보다 전우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더 괴로워하셨지.

쇼린. 작은 별들이 희미해졌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타릭이 어떤 죄책감과 수치를 느꼈을지 잘 알 것 같았다.

타릭 님은 타곤 산을 올라야 하는 형벌을 받으셨다. 모두가 형벌을 받는 대신 데마시아를 떠나리라고 생각했지만, 타릭 님은 산에 오르기로 하셨지. 무사히 돌아온다면 구원을 받겠지만, 데마시아인 모두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타곤 산의 위대함을 전혀 모르는 필멸자가 어떻게 혼자서 정상에 오를 수 있겠냐고 말이지.

나는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대체 어떻게?

타릭 님은 수많은 시련을 겪으셨다. 군 생활로 단련된 육체뿐만 아니라 의지까지도 시험에 올랐지. 희생당한 전우들의 환영이 그분을 괴롭혔어. 약탈자들이 도시에 불을 지르고, 위대한 예술 작품들이 더럽혀지는 상상에 고통받으셨지. 당신께 소중해 마지않는 아름다움과 생명이 사그러드는 광경을 수없이 목격하셨음에도, 그분은 무너지지 않으셨어.

그리고 결국 수호자의 성위로부터 선택받았지.

타릭의 얼굴이 별자리가 되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두 눈은 다른 별들보다 환하게 빛났다. 그런데 타릭이 바라보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라두악이 흥미롭다는 듯이 날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봐라, 티아리. 소용돌이치는 별들을 가리키며 라두악이 부드럽게 말했다. 어둠이 사라지고 눈부신 빛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별들 속에서 어떤 이의 얼굴과 겹친 내 얼굴이 보였다.

별자리로 새롭게 만들어진 얼굴에서 자비심과 평온, 자신감이 느껴졌다.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신비한 조화가 느껴졌다.

설마 저게... 나인가?

누구인가요?

넌 무엇이 보이느냐?

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에요. 설마... 성위인가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그 얼굴에서... 나를 보았다.

라두악이 물었다. 별들 속에서 네 얼굴이 보이느냐?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별자리는 잠시 더 빛나더니 수많은 별들 속으로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라두악이 손짓하자 빛이 사라지면서 방이 어두워졌다.

라두악은 내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네가 방금 본 것은 오직 너만이 해석할 수 있다. 네 마음을 믿고 따르거라. 그것이 내가 해 줄 유일한 조언이니.

라두악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심장이 요동쳤다. 눈밭 위에 서자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차마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었다. 다시 그녀의 얼굴을 못 볼까 봐 두려웠다.


이제 시험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송별 의식까지는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난 초조한 발걸음을 옮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젯밤에 생전 처음으로 봤던 별자리가 다시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마치 등대처럼 내 마음속에서 빛났다. 그것은 과거의 내 모습이자 내 사명, 하지만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애써 잊어버리려 했다. 뭔지는 몰라도 나와는 상관없었다.

원래 타곤 산은 자기 능력을 증명하려는 사람들이 오르는 곳이었다. 하지만 난 이미 부족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힘이 닿는 날까지 전사로서 싸우고, 은퇴한 뒤에 가족을 이룰 운명이었다. 그것이... 순리였다. 아니, 과연 그럴까?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산은 계속해서 나를 불렀다. 이제 그 부름을 들었으니, 절대 멈추지 않을 터였다.

사촌 아누아와 식사를 하며 조언을 구해야겠다. 아누아라면 분명 무엇이 옳은 길인지 알려 주리라.

따뜻한 외투와 장갑을 챙기고, 문지방 앞에 서서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서 변함없는 내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머리카락과 서 있는 자세는 별에서 본 여자와 닮아 있었다. 게다가 내 표정에서 전에 없던 뭔가가 느껴졌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바보 같은 짓이야. 아누아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아누아는 찰흙으로 빚은 찻잔에 손가락을 집어넣다가, 뜨거웠는지 곧바로 손을 뺐다. 난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내 찻잔을 집어 들었다.

바보 같다라. 아누아답게 직설적이었다. 예언자라면 좀 더 신비롭게 이야기할 것 같지만, 아누아는 전혀 달랐다.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듯이, 아누아가 낮게 신음을 냈다.

왜?

너무 갑작스럽잖아, 티아리. 아누아는 잔을 불어 열기를 식힌 다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들 일생을 바쳐 등반을 준비해. 충동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야.

충동이 아니야, 아누아. 별자리에서 얼굴을 봤어. 내 얼굴이었다고. 내가 목격한 것, 내 감정을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건... 운명이야.

운명은 무슨. 아누아가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을 쳤다. 반짝이는 돌로 만든 귀걸이와 머리장식이 흔들렸다. 난 발끈했다. 역시 우리 사촌. 참 무뚝뚝하다니까.

그럼 뭔데?

망상이지. 훈련을 소홀히 하고 잡생각이나 해서 그런 거야. 딱딱하게 말을 뱉은 아누아는 또다시 차를 홀짝였다.

수련생으로서 능력은 이미 증명했어. 사람들의 기대를 따르기만 했던 내가 처음으로 원하는 게 생겼다고.

보병대에 들어가고 싶다며 불타오를 때는 언제고? 아누아가 짓궂게 말했다. 뛰어난 군인이 될 수 있을 텐데, 왜 마다하고 힘든 길을 가려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해. 이렇게 곧바로 날 몰아붙일 줄은 몰랐다. 비난 어린 아누아의 태도에, 내 확신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난 변했어. 운명이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의미야.

아누아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급하게 결정하다니, 너답지 않아. 게다가 수련생으로서 훈련했다고는 하지만, 타곤 산을 무사히 오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타릭도 등반 훈련 없이 성공했어. 난 맞받아쳤지만, 수호자의 이름을 듣고 움찔하는 아누아의 모습에 부끄러웠다. 마치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낸 듯한 기분이었다.

아누아는 경직된 동작으로 목에 건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아누아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수호자로부터 하사받았다고 믿는 바로 그 보석이었다. 티아리. 아누아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내게 보내는 경고였다.

난 표정이 일그러졌다. 타릭도 군인이었잖아. 나처럼 말이야.

그럼 지금 행동이 군인답지 않다는 것도 알겠네. 군인의 명예는 어디 갖다 버렸어?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거야?

나는 움찔했다. 내가 쇼린에게 했던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타릭과 난 비슷한 점이 많아. 타릭이 성공했다면, 나도—

타릭은 속죄하려고 산에 올랐지만, 넌 지금 영광의 길을 걷고 있잖아. 왜 굳이 벗어나려고 해? 아누아가 발끈하며 쏘아붙였다. 하마터면 찻주전자를 쏟을 뻔했다. 나는 기다렸다가 주전자를 옆으로 치웠다. 타릭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 티아리. 비교 대상이 잘못됐다고. 게다가 그분의 방식은... 아주 비범했지. 말을 마친 아누아는 윤이 나는 나무 탁자 위에 보란 듯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누아의 아버지가 만든 탁자였다. 또 다른 가보이자 가족이 거는 기대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는 서로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미안해. 너희 가족은 널 사랑해. 나도 그렇고.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아누아가 머뭇거리더니, 몸서리치며 말했다.

아누아. 손을 뻗어 아누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분명 그럴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난 한숨을 쉬었다. 네가 수호자에게 거는 믿음, 내게 빌려줘. 너와 수호자가 지닌 힘도 함께 말이야. 그분이라면 날 응원하겠지, 안 그래? 네 축복 없이 산을 오르고 싶지 않아. 네가 믿어 준다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아누아는 아무 말 없이 목에 건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내게서 몸을 돌렸다.

우린 함께 자랐어. 그래서 나는 널 사랑해. 그렇기 때문에 널 축복할 수 없어. 아누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인생이 꽃피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축복하겠어?

난 고개를 떨궜다.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무겁게 뛰는 심장 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목이 메었지만,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누아...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내 얘기를 듣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날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 마치 내 여정이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난 탁자에 잔을 놓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럼 네 축복 없이 산을 올라야지.

아누아는 말 없이 바닥만 바라봤다. 사과나 응원의 말을 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아누아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안녕, 아누아. 내뱉듯이 말하고는 외투와 장갑을 챙겼다. 그리고 서둘러 몸을 돌려 나간 뒤, 살며시 문을 닫았다.

밖으로 나온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혀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조용히 흐느꼈다.


시험이 가까워지자 다른 수련생들은 훈련에 매진했다. 나 역시도 몸과 마음이 지칠 때까지 함께 땀 흘렸다. 그래야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난 분통이 터졌다. 그리고 실망스러웠다. 아누아가 옳았을까? 그저 내가 무사하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산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여정의 끝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가족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산은 몇 번이고 내 마음을 어지럽혔고, 그럴 때마다 나는 훈련에 집중하면서 애써 외면했다. 검으로 베고 방패로 밀치면서 잊어버리려고 했다.

훈련을 마친 다른 수련생들이 떠나면서 내 자세를 칭찬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길은 따로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발을 끌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쇼린이 지팡이에 의지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날 지켜봤던 걸까? 나는 화가 났다. 동시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꼈다.

내 자세가 그렇게 형편없어? 사납게 쏘아붙였지만, 쇼린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내 분노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완벽해. 너도 잘 알겠지만.

차분한 말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다짜고짜 화를 냈던 나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아누아한테 들었어.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발로 돌멩이를 걷어차며 물었다. 그래서?

쇼린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정말 이게 네가 원하는 길이야, 티아리?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쇼린의 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갑자기 손에 쥔 창이 무겁게 느껴져, 하마터면 떨어트릴 뻔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내 결심의 무게는 이 무기 만큼이나 무거웠다.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쇼린...

적절한 대답을 찾으려고 고민했다. 쇼린을 만나면 수련생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차마 또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태양이나 별 같은 불변의 존재를 보며 삶의 방향을 정하지. 그 존재들의 영향력은 늘 우리 주위에 있어. 난 방패를 내리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내 직감만을 믿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겠어?

쇼린이 내 옆에 오더니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친구야. 이미 정해진 대로, 남들이 바라는 대로만 살아야 한다면 과연 네가 만족할 수 있을까?

난 햇빛을 받으며 눈을 껌뻑였다. 아니, 하지만—

그리고 반려자를 만나 산골 마을이나 계곡의 농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면, 네가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그래, 내가 봐도 농사는 너랑 안 어울려. 쇼린은 농담을 던지고는 손으로 나를 찔렀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고개를 들어 쇼린을 바라봤다. 네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햇볕 아래에 있었지만, 등골이 오싹해졌다. 쇼린은 내 속을 완전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른다는 고통, 무엇보다 부름에 응답하지 못한다는 괴로움이지. 쇼린은 내 어깨를 붙잡더니 가볍게 흔들었다. 확신이 없는 것과 망설임은 달라. 넌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려고 군인이 되려고 했지만, 너 자신을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해. 그러려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쇼린이 떠난 뒤에도, 나는 먼지가 자욱한 계곡에 한참을 서 있었다. 해가 진 뒤에 흐릿한 달이 떠올랐고,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눈을 감고 라두악이 보여 줬던 별자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눈을 떠 고개를 들자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과 내 얼굴이었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서 내게 부족했던 믿음이 보였다.

쇼린과 라두악, 아누아가 했던 말들을 되짚었다.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길이 내가 원하는 길이 맞는지만 알면 충분했다. 난 별자리 속 여인에게 '여행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녀가 어디로 안내하든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기를 챙기고, 마지막으로 솔라리의 갑옷을 벗었다.


거대한 산으로 향하는 돌계단 앞에서, 나는 몇몇 등반자들과 함께 서 있었다. 지팡이를 든 솔라리 사제가 서약을 하기 전 우리에게 축복을 내렸다.

송별 의식은 기념 행사라고 하기에는 엄숙하고 침울했다.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는 가운데, 우리는 구경꾼들과 성공을 비는 사람들 앞에서 그동안 소유했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맹세했다. 집과 가족, 세속의 물건과 서약으로부터 벗어나 산을 오르겠다고 다짐했다. 등반에 실패하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없기에, 사제는 마지막 작별의 의미로 우리 머리 위에 흙을 뿌렸다.

돌계단을 오르는 순간부터 등반의 시작이었다. 지금이 가족과 친구와 작별할 마지막 기회였다. 지팡이를 쥔 손이 떨렸다. 처음 마법이 발현했을 때, 삼촌으로부터 받은 지팡이였다. 나중에 크면 쓰기 편할 거라고 했던 삼촌의 말은 옳았다.

아누아에게는 차마 얘기할 수 없어서, 아누아의 아버지이자 내 삼촌에게만 전했다. 삼촌의 반응은 태연했다.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아누아를 찾았다.

그때 쇼린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이내 서글퍼졌다. 아누아는 오지 않았다.

곧 길을 떠나야 하기에, 나는 슬픔을 억누르고 마음을 다잡았다.

등반을 준비하는 다른 라코어를 바라봤다. 먼 마을 출신인지 내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사원 지킴이의 복장을 한 것으로 보아, 종교적인 이유로 산에 오르는 듯했다. 어쩌먼 힘이나 영광, 행운을 바랄지도 모르지만, 난 묻지 않으려고 했다. 섣불리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이 산에 오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사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정상에 가까워지면 어떤 난관이 펼쳐질지 몰랐으나, 최대한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또 점검했다. 무사히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봐도, 어느 지점 이후로는 정보가 없었다. 듣기로는 산이 미로처럼 변하고, 길이 계속 움직여서 지도로 남기기 어렵다고 했다.

라두악이 말한 대로 의지의 시험이었다.

쇼린은 어김없이 쾌활하게 날 응원해 주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쇼린은 부정하겠지만, 마치 친구의 자리를 빼앗은 듯했다. 그럼에도 쇼린은 진심으로 날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사과와 감사 인사를 건네는 날 단호하지만 다정하게 돌려세웠다.

열심히 훈련했으니 어떤 고난도 이겨 낼 거야. 쇼린의 목소리에는 나조차도 부족했던 확신이 가득했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 만든 지도를 보더니, 내 가슴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지금껏 수많은 시험을 통과했잖아. 너 자신을 믿어. 그게 가장 중요해.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포옹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쇼린은 누구보다도 나를 잘 이해했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천천히 돌아가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오늘 떠나면 영영 못 볼 얼굴들이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은 가벼웠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떠나갔고, 등반자들도 차례로 출발했다. 각자 다른 경로를 통해 혼자서 등반을 시작했다. 곧 내가 걸어야 할 길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내 차례를 기다리던 중, 아버지 손을 잡고 다가오는 아누아가 보였다.

타곤 산 정상에 오를 때까지 다시는 울 일이 없을 줄 알았지만, 아누아를 보는 순간 안도의 눈물이 흘렀다. 훌쩍이는 내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아누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티아리.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아누아의 손을 잡아 내 가슴 위에 올린 뒤, 그 위로 내 손을 포갰다.

아누아. 난 눈물을 삼키며 겨우 입을 떼었다. 와 주었구나.

아누아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한 말을 곱씹어 봤어. 아직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이기로 했어. 너한테 중요한 일이니까, 그리고 난 널 영원히 사랑할 테니까. 별것 아닌 내 축복이 네게 힘이 된다면,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

아누아가 자기 것과 거의 똑같은 목걸이를 꺼내 보였다. 목걸이에 달린 하늘색 수정들이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목걸이를 높이 치켜들며 중얼거렸다. 수호자께 간청합니다. 사랑하는 제 사촌을 보호해 주십시오. 타릭이시여. 방패가 되어 우리를 지켜 주시고, 길을 안내해 주십시오. 스스로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아누아는 목걸이를 내 목에 걸었다. 특히 제 사촌, 그리고 이곳에 남은 저희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난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수정은 차가웠고 약간 거칠었다. 정말 고마워, 아누아.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 절대 목걸이를 벗지 않을게.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누아에게 물었다. 이 목걸이가... 날 지켜 줄까?

아누아는 슬프게 웃었다. 그러길 바라, 티아리.

아누아 부녀는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이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점검을 하는 등반자들 가운데, 혼자 있는 젊은 여성이 보였다. 어디 출신인지 의복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추위를 버티도록 만들어졌지만, 산사람들이 입는 옷과는 색이 달랐다. 게다가 호전적인 부족과 달리 중무장하지도 않았다. 아는 얼굴이 있나 살피려는지 이따금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배낭과 등반 용품, 옷을 점검하는 데에 집중했다.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발밑에 선물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혼자인 듯했다. 표정에는 투지가 넘쳤지만, 마음 깊은 곳의 슬픔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등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친구와 가족의 배웅을 받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깨달았다. 이제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서 그 은혜를 갚을 때였다.

수호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했으리라.

난 긴장한 기색을 감추고, 짐짓 쾌활한 미소를 띠며 다가갔다. 안녕. 여자는 의도가 뭔지 파악하려는 듯, 내 얼굴을 살폈다. 송별 의식에서 봤어. 라코어 부족이 아닌 사람이 여기까지 오다니 신기하네.

그래, 난 라코어 부족이 아니야. 여자는 여전히 내 표정을 읽으려 애썼지만, 변함없는 내 태도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위아래로 날 살피며 물었다. 이름이 뭐야?

티아리. 대답과 함께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내 손을 잡았다. 아귀힘이 강한 것이 전사의 손이었다. 난 헤일리야. 반가워, 티아리. 너도 산을 오르려고?

그래. 같이 가면 어떨까 싶은데.

그 말에 헤일리가 눈을 치켜떴다. 의심은 사라졌지만, 꽤 놀란 듯했다. 나랑 같이 가고 싶다고?

정상까지 가려면 힘을 합치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헤일리는 말이 없었다. 난 지팡이에 기댄 채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헤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송별 의식 때 나 말고 다른 외지인이 있었어. 데마시아인이야. 이름이 에미르였지, 아마? 산행에 익숙해 보이던데, 우리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 게다가 셋이면 정상에 오를 가능성도 커지겠지. 어때?

난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괜찮네.

좋아, 찾아볼게. 에미르를 찾으러 걸어가던 헤일리는 갑자기 멈추더니 날 돌아봤다. 아까의 옅은 미소는 사라지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함께 등반하게 돼서 기뻐. 넌 확신에 가득 차 보여. 마치 어디로 가야 할지 안다는 듯이 말이야.

난 수줍게 미소로 화답했다. 그 모습에 헤일리가 키득거렸다.

에미르를 찾아서 갈 테니 송별의 돌에서 만나.

그래.

헤일리가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세속의 다른 굴레와 마찬가지로, 구경꾼들 역시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이다. 험난한 타곤 산을 오르는 동안,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지리라. 의심과 두려움 역시 이곳에 두고 떠나야 했다.

그때 확신이 내 몸을 감쌌다.

내 여정은 이곳에서 시작해 산 정상에서 끝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을 겪든 뜻깊은 경험이 될 것이다.
파일:LoL_Universe_Tyari_3.jpg

4. 구 배경

타릭의 리메이크 이전의 배경,타릭의 신규 장문 스토리가 공개된 후에는 폐기된 스토리이다.
크리스탈과 보석의 공명으로부터 힘을 끌어내는 대지의 마법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이는 룬테라의 대다수가 모르고 있으며, 그 존재를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형태의 마법이다. 대지의 마법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드넓은 룬테라에서 오직 보석 기사 타릭만이 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고향 땅에서 저명한 치유사였고, 타릭은 일찍이 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약초와 동식물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갈수록 정작 자신의 관심은 오로지 단 한 곳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바로 '보석의 힘'. 타릭은 이 아름답고 완벽한 물질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요동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진심으로 사람들을 돕고 싶었지만, 단순히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다친 마음을 치유해주는 것으로 그치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타릭은 단지 치유사가 아닌 대지의 힘으로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수호자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정의의 수호자이자 방랑 기사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러던 어느 날, 소환사들의 실수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룬테라로 타릭이 소환되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울 뿐이었지만, 이내 발로란도 자신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가끔 고향이 그리워지기도 했지만, 자신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리그에서 싸우는 일 역시 값진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전장에 뛰어든다. 아버지에게 배웠듯 타릭은 길가의 돌멩이 하나에서도 쓸모를 찾는 사람이었고, 이는 타릭을 상대하는 적에게는 그야말로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단정하고 멋진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매력, 영롱하게 빛나는 갑옷과 찬란한 빛을 내뿜는 무기로 인해 이계에서 소환된 이 멋쟁이 보석 기사는 순식간에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챔피언이 되었다. 발로란의 언론은 이 미남자의 사생활을 캐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만, 타릭은 챔피언으로 사는 삶만 공개하고 있을 뿐 사생활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에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그의 사생활이 어떻든 대지의 마법으로 전장을 빛내는 타릭은 이제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