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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21 17:45:15

타운스 반 잔트

<colbgcolor=#000><colcolor=#fff> 타운스 반 잔트
Townes Van Zandt
파일:TownesVanZandt_cr_Paul-Natkin-Archive_1990.jpg
본명 존 타운스 반 잔트
John Townes Van Zandt
출생 1944년 3월 7일
미국 텍사스 주 포트워스
사망 1997년 1월 1일 (향년 52세)
미국 테네시 주 스미르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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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가수, 기타리스트
장르 컨트리, 싱어송라이터, 컨템포러리 포크
부모 아버지 해리스 윌리엄스 반 잔트
어머니 도로시 타운스
배우자 프랜 피터슨 (1965년 ~ 1970년, 이혼)
신디 모건 (1978년 ~ 1983년, 이혼)
지니 반 잔트 (1983년 ~ 1994년, 이혼)
자녀 장남 존 타운스 반 잔트 2세
차남 윌리엄 빈센트
딸 케이티 벨

1. 개요2. 생애
2.1. 활동 전2.2. 음악 활동
2.2.1. 초기2.2.2. 전성기2.2.3. 후기
3. 사생활 및 말년4. 음악적 스타일 및 영향5. 여담6. 대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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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감성적인 곡 분위기와 시적인 가사로 포크와 컨트리계만이 아닌 전 세계의 여러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미국의 음악가. 그의 작곡과 작사는 미국 음악계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이지만 미국에서는 적어도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최고의 송라이터[1]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2. 생애

2.1. 활동 전

텍사스 주의 포트워스에서 유복한 가정 아래 태어났다. 아버지인 해리스 윌리엄스 반 잔트는 사내변호사였기에 이사가 잦았다고 한다. 1956년, 그가 12살이 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기타를 선물했고 그는 시골을 방랑하며 연습을 했다고.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길, 1956년 10월 8일에 에드 설리반 쇼에 나온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본 후 기타 연주자가 되기로 한다. [2]

이후 1958년 그의 가족은 콜로라도로 이사를 했고 그는 이때 콜로라도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그의 곡들인 "My Proud Mountains", "Colorado Girl", "Snowin' On Raton"등의 가사에 담았다.

학생 시절의 그는 매우 착실하고 활동적인 학생으로 기억되었는데,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높은 IQ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부모님이 그가 변호사나 상원 의원이 되도록 꼬드겼다고 한다. 이후 1962년 미네소타의 Shattuck-Saint Mary's라는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SAT를 보았으며 1170점의 점수를 받고 그의 가족은 곧장 텍사스 주의 휴스턴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62년 콜로라도 대학에 진학한 그는 2학년이 되던 해 그의 부모님이 그가 우울증이 있고 음주를 자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휴스턴으로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다. 이후 그를 갤버스턴의 UTMB Health라는 대학에 입학시킨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중 조울증을 진단받았으며 그로 인해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인슐린 쇼크 요법[3]이라는 치료를 받게 했는데 이는 그의 장기 기억을 잃게 만들었다. 이후 공군에 입대하려다 퇴짜를 맞고 그의 음악적 영웅들에게 영향을 받아 음악가라는 꿈을 꾸게 된다.

2.2. 음악 활동

2.2.1. 초기

그의 음악적 커리어는 1965년도부터 시작되었는데, 휴스턴의 제스터 라운지(Jester Lounge)[4]와 샌드 마운틴 커피 하우스(Sand Mountain Coffee House)라는 음악 클럽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자신의 우상인 닥 왓슨, 라이트닝 홉킨스와 후에 그의 소울 메이트가 될 가이 클라크 등을 만나게 된다. 그의 주된 셋리스트는 라이트닝 홉킨스, 밥 딜런등의 선배 음악가들의 커버곡이나 자신이 쓴 몇몇 곡등이 다였는데 이후에 그의 아버지인 해리스가 이제 제대로 자신만의 곡들을 써보라고 권장했다.[5]

1967년 그는 그의 룸메이트이자 서틴스 플로어 엘리베이터스(13th floor elevators)[6]의 보컬인 로키 에릭슨이 그에게 자신의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들어오라고 권유했다. 그는 일전에 베이스를 한 번도 연주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찌저찌 로키의 밴드베이트인 토미 홀에게 오디션을 보았는데 홀이 그를 거부했고 흐지부지 넘어가게 된다.

1968년에는 휴스턴의 카페에서 그의 친구가 될 프로그레시브 컨트리 음악가인 미키 뉴베리[7]를 만나게 되고 그가 테네시의 내슈빌로 가도록 설득한다. 그곳에서 타운스는 이후 오랫동안 그의 프로듀서가 될 잭 클레멘트를 만난다.

2.2.2. 전성기

그는 이후 포피 레코드의 책임자인 케빈 에거스를 만나게 되는데, 잭 클레멘트가 그에게 "Tecumseh Valley"[8]의 데모 버전을 틀어주었고 에거스는 큰 감명을 받게 된다.[9] 곧장 그는 1968년 8월, 그의 곡 11개가 수록된 데뷔 앨범인 "For the Sake of the Song을 내게 된다.

하지만 작곡과 작사는 훌륭하나 프로듀싱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타운스는 이내 바로 두 번째 앨범 제작을 계획하게 된다. 1집에 있던 곡인 Tecumseh Valley의 리메이크와 그의 다른 곡들 10개, 총 11곡으로 이루어진 2집인 "Our Mother the Mountain"을 1969년 4월 발매하게 된다. 그의 대표곡들 중 하나인 "Be Here to Love Me"[10], "Our Mother the Mountain", "Snake Mountain Blues"외의 주옥같은 곡들이 수록되어있다. 이때 앨범의 아트워크는 유명 디자이너인 밀튼 글레이저가 맡았다. 상업적인 성공까진 아니었지만 그의 작곡은 입소문을 타게 되고 이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듣게 된다. 대표적으로 후배 뮤지션인 조 엘리가 있는데, 텍사스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던 그를 태워다 주었고 이때 타운스가 감사의 의미로 2집의 새 카피를 주었다. 엘리는 이후 자신의 친구와 이 앨범을 듣게 되는데 그때 앨범에 매료되었고 몇 주간 계속해서 들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977년 데뷔 앨범을 내고 입지있는 음악가가 된다.

그는 또 다시 세 번째 앨범 제작을 계획하게 된다. 이 앨범에도 1집의 곡들을 리메이크해서 수록하였는데 1곡만 실린 2집과는 다르게 4곡이나 수록하였다. 그렇게 1집의 4곡을 리메이크하고 자신의 다른 곡들 6개를 수록한 사실상 그의 최고작인 셀프 타이틀드 앨범 "Townes Van Zandt"가 같은 해인 1969년 9월 발매된다. 전체적인 장르로는 컨트리, 컨템포러리 포크, 싱어송라이터이지만 "Waiting Around to Die"같은 아웃로 컨트리 곡도 존재하고, "Fare thee well, Miss Carousel"같은 컨트리 록, 포크 록 곡도 존재한다. 본작에 수록된 곡들의 작곡과 작사는 그의 곡들 중 단연 최고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이후에 명반 리스트 등에도 오르게 된다. 밥 딜런에게 영향을 받은 시적인 가사와 깔끔한 핑거피킹 테크닉으로 고평가를 받았으며 이를 느끼고 싶다면 그냥 직접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앨범커버를 찍은 장소는 포피 레코드의 아트워크 디자이너인 밀튼 글레이저의 부엌이며 사진작가인 솔 메드닉이 찍었다. 사진 속 타운스는 무언가에 체념한 듯 턱을 괸 채로 눈을 감고 앉아있는데 곡들의 분위기가 대체로 이와 일맥상통하여 커버 또한 좋은 평을 받는다.

그는 계속해서 음악적 활동을 이어가는데, 이때부터 라이브도 많이 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1973년, 텍사스 주 휴스턴의 올드 쿼터 커피 하우스에서의 공연이 녹음된 그의 첫 라이브 앨범[11]이 1977년 발매되고 이 앨범 또한 그의 최고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정규 앨범에서 여러 악기나 세션이 쓰인 곡 구성이 아닌 오로지 통기타 연주 하나만으로 가득 채워진 그의 라이브 버전은 오히려 라이브가 더 좋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다. 이 외에도 "Rear View Mirror", "A Gentle Evening With Townes Van Zandt"[12], "Austin City Limits"등등의 라이브 앨범들이 훌륭하니 들어보는 것을 권장한다.

이후에도 1978년까지 약 4장의 앨범을 더 내었으며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슬럼프를 겪은 1972년의 "High, Low and In Between"[13]가 그나마 그의 앨범 중 가장 저평가를 받으며(그마저도 그렇게 안좋은 것이 아니다.) 그의 곡 중 가장 유명하다고도 할 수 있는 "Pancho & Lefty"[14]와 "If I Needed you"[15]가 수록된 "The Late Great Townes Van Zandt"를 같은 해인 1972년 발매하였다. 이 앨범 이후로 그는 뜬금없이 6년이 지난 1978년에서야 7집인 "Flyin' Shoes"를 내게 되는데, 이유로는 그 사이 1974년 즈음 7 come 11이라는 앨범을 내기로 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엎어지게 되었고 그러던 중 공연도 많이 하다 보니 공백이 꽤나 길어진 것으로 보인다. 후에 이 앨범에 수록하려 했던 곡들을 모은 "The Nashville Sessions"라는 아카이벌 음반이 1993년 발매된다. 이 아카이벌 앨범에는 정규 음반이 아닌 라이브 앨범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곡들이 여럿 수록되어 있는데 한편으론 아쉬울 따름이다.

2.2.3. 후기

그의 곡들이 계속해서 유명세를 타고 수 많은 유명 음악가들이 그의 곡을 커버하게 되면서 그의 입지는 더더욱 단단히 다져지기 시작하고 그는 자주 공연을 다니게 된다. 해외에서도 투어를 하기도 했으며 이 때의 공연들은 영상 또는 음반으로 남게 된다. 하지만 이 중에는 정식으로 발매된 것이 아닌 사람들이 직접 녹음하여 만든 부틀렉 형식의 앨범이 대다수이므로 자세한 것은 유튜브에 검색해보길 바란다.

이후 그는 계속해서 투어를 하게 되면서 약 9년이 지난 1987년에서야 8집인 "At My Window"를 내게 되고, 1994년 마지막 정규 앨범인 "No Deeper Blue"를 발매한 후 그는 앨범 제작 보다는 투어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그의 커리어는 하락세를 보이고 건강도 점점 악화되기 시작한다.

3. 사생활 및 말년

1965년 8월 26일, 프랜 피터슨이라는 여성과 결혼을 한 후 아들인 존 타운스 반 잔트 2세가 1969년 4월 11일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1970년 1월에 이혼을 하게 된다. 이후 신디 모건이라는 여성과 교제를 하다 1978년 재혼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들은 1980년대 중으로 계속해서 별거를 하게 되고 1983년 또 다시 타운스는 이혼을 하게 된다. 이후 세 번째 아내인 지니 문셀이라는 여성과 1983년 3월 14일, 결혼을 하게 되고 10일이 지나 아들인 윌리엄 빈센트가 태어난다. 그 후로도 1992년 둘째인 케이티 벨이라는 딸이 태어나고 얼마 가지 않아 1994년 또 다시 이혼을 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이들은 타운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가까운 사이로 지내게 된다.

또한 동료 음악가인 가이 클라크와 그의 아내인 수잔나 클라크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지내기도 했는데, 수잔나 클라크가 말하길 자신들은 서로 '소울 메이트' 였다고 한다. 가이와 타운스는 자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가까운 친구로 남았다. 가이 클라크 또한 컨트리계에서 많은 존경을 받은 음악가로 그의 음악을 한번쯤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 계속해서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공연 중 가사를 까먹은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케빈 에거스의 형제인 해롤드 에거스가 그를 24시간 케어하기 위해 매니저로 따로 고용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 계속해서 공연을 하고 티비에도 출연하기도 하는 등 음악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다가도 중독 치료를 위해 재활센터에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병적인 사유로 아내와 함께 병원에 들렸는데 아내는 진통제를 먹여선 안된다 등등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그를 퇴원시키게 된다. 하지만 곧바로 진전섬망 증세를 보이게 되는데, 아내인 지니가 곧장 그에게 달려가 증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보드카를 마시게 했다. 이후 집에 그를 데려온 후 그는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친구들과 통화를 하였다. 그러던 중 네 정의 타이레놀을 먹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그의 아들인 윌이 지니에게 타운스가 숨을 쉬지 않고 죽은 것 같다고 알렸고 수잔나 클라크와 통화를 하던 지니는 그에게 곧장 달려가 CPR를 하기도 했지만 이내 1997년 1월 1일 사망하게 된다. 사인은 부정맥. 이후 텍사스 주 포트워스 근처의 디도 묘지에 안장되었다.

4. 음악적 스타일 및 영향

라이트닝 홉킨스, 선 하우스와 같은 블루스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 중에서도 라이트닝 홉킨스와는 생전 매우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포크, 컨트리, 블루스 세 장르에게서 골고루 영향을 받은 것이 그의 재능과 맞물려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적 스타일을 구축해 내었으며 그로 인해 수 많은 명곡을 탄생시켰다.

C, A, E, D, F와도 같은 아주 한정된 코드들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끝도 없이 다른 곡들을 만들어내는 진정한 천재였다. 작곡과 작사에 모두 두각을 보였으며 특히나 작사로는 밥 딜런과도 자주 비견될 정도로 아주 고평가를 받는다. 그에 반해 그는 평생을 상업적인 성공과는 동떨어져 살았는데 이는 아마 자신의 신념과 직결된 문제로 보인다. 그로인해 그는 세계적인 유명세 보다는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물론 지금은 세계적으로도 나름 유명하다.

5. 여담

그의 후배 뮤지션이자 그의 멘티이기도 한 스티브 얼(Steve Earle)[16]이 한 발언이 잠시 유명해지기도 했는데 이는 "타운스 반 잔트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송라이터다. 나는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채로 밥 딜런 앞에 서서 이 말을 할 것이다."[17]로 앨범인 At My Window의 스티커에 실린 이 말을 보고 타운스 본인이 매우 불쾌감을 표출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 말은 자주 언급되었으며 그로인해 타운스와 스티브 얼 두 사람 모두 매우 뻘쭘해 했다고. 또한 그는 자신의 아들의 미들네임에 Townes를 넣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저스틴 타운스 얼(Justin Townes Earle)은 훗날 음악가가 되어 입지를 꽤나 쌓았으나 안타깝게도 2020년 8월 20일에 사망했다.

그를 포함한 여러 컨트리 음악가가 등장하는 Heartworn Highways라는 1976년 개봉된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도 꽤나 잘 알려져있는데, 영화 속에서 "Waiting Around to Die"를 연주하는 타운스 옆에서 시모어 워싱턴이라는 노년의 흑인 남성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유튜브에서 유명하다.

2005년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Be Here to Love Me: A Film About Townes Van Zandt"라는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으니 관심이 있다면 시청해 볼 필요도 있겠다. 또한 2020년 가이 클라크와 타운스 반 잔트, 수잔나 클라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 "Without Getting Killed or Caught"이라는 영화도 개봉되었다.

그는 생전 많은 음악가들과 친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블레이즈 폴리라는 아웃로 컨트리 음악가와도 특히나 친했다. 그 또한 컨트리계에서 타운스만큼이나 컬트적인 인기를 지닌 음악가로 매우 고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총에 맞아 사망한 후 그에게 헌정하는 곡인 "Blaze's Blues"를 1994년 앨범인 "No Deeper Blue"에 수록하였다.

항상 곡을 연주할 때 눈을 감고 연주를 했는데 이는 청자들을 음악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의 곡을 커버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눈을 감는 습관을 따라하기도 한다.

생전 술과 마약을 좋아한 만큼 담배 또한 좋아했다. 말보로 레드를 가장 좋아한 듯.

키가 191cm로 매우 장신이다.

밥 딜런이 "난 그저 노래를 하는 가수이지만 타운스 반 잔트는 시인입니다." 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정확한 정보는 아니다.

그의 이름을 "톤즈"로 발음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어느 영상을 보든 모두 그의 이름을 타운스로 발음하고 실제로 본인 또한 타운스로 발음한다. 오해가 없길.

6. 대표곡



[1] 흔히들 Songwriter's Songwriter라고 표현한다.[2] 그가 세상의 모든 돈과 여자, 그리고 캐딜락을 가졌다고 생각했고 그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3] 환자에게 인슐린을 주사하여 혼수상태에 빠뜨렸다 다시 깨워 정신병 증상을 치료하는 요법이다. 혼수상태에서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고 저혈당으로 인한 위험성 때문에 이후에 전기충격요법에게 자리가 밀려났다.[4] 이곳에서 공연을 했던 것이 후에 라이브 음반으로 나왔다. 관심이 있다면 Live at Jester Lounge를 검색해보길.[5] 1966년 쯤 타운스가 녹음한 곡들이 수록된 "In the Beginning"이라는 아카이벌 앨범이 2003년 발매되기도 했다. 본작의 곡들도 꽤나 호평을 받았으니 관심이 있다면 들어보는 것을 추천.[6] 텍사스 주 오스틴 출신의 밴드. 사이키델릭 록계에서는 입지가 매우 단단한 밴드이다.[7] 컨트리계에서 입지가 있는 유명한 음악가다. 타운스와 음악적 스타일이 그나마 가장 비슷한 음악가로도 평가받으며 생전 타운스가 그의 목소리를 극찬하기도 했다.[8] 컨트리 음악의 전형적인 스토리텔링 형식의 가사를 포함한 곡이며 한 여인의 비극적인 인생을 다룬 곡이다.[9] 그가 회고하길 "듣자마자 명곡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크게 될 인재라는 것을 깨달았고 곧장 잭에게 달려가 그와 계약하고 녹음을 하겠다며 말했다. 타운스는 첫 만남부터 대단했다." 라고..[10] 노라 존스가 커버하기도 했다.[11] 앞서 말한 1965년 제스터 라운지에서의 라이브가 그의 첫 라이브 앨범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때 녹음된 라이브는 그의 사후 몇년이 지난 2004년에 앨범으로 발매되었다.[12] 특이하게도 이 라이브는 카네기 홀에서 진행되었는데 그가 무명 시절이었던 1969년에 공연을 한 것이다. 그렇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시절에 어떻게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했는지는 의문.[13] 그의 여자친구가 이 앨범을 내기 전 1971년 즈음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19] 아마 슬럼프는 이런 이유에서부터 얻은 걷으로 추정된다.[14] 에밀루 해리스, 윌리 넬슨, 멀 헤거드, 밥 딜런 등등의 음악가들이 커버를 하기도 했다.[15] 이 역시 에밀루 해리스, 돈 윌리엄스, 닥 왓슨 등등의 유명 음악가들이 커버하였다.[16] 이 양반도 이쪽 음악계에서는 유명하다.[17] 원문 "the best songwriter in the whole world and I'll stand on Bob Dylan's coffee table in my cowboy boots and say that."[18] 원곡은 로튼 윌리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