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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9년 |
함경도 명천현 (현 함경북도 명천군) | |
사망 | 미상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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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79년 함경도 명천현(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흑룡강행성(黑龍江行省) 여빈부(臚濱府)[1]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地) 지방회(地方會) 회장으로 재직 중이던 1911년 4월, 관내 조선인 6명이 일본 경찰에 의해 무고하게 살해된 사건을 조사하여 대한인국민회 북미중앙총회장 황사용(黃思溶)에게 보고하고, 향후 방책을 상의했다. 그리고 그는 1912년 러시아 시베리아로 이주해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에 참여했는데, 당시 부회장 및 서기로 선출되었다.
1913년에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 총무를 역임하던 그는, 1914년에는 고성삼, 권화순 등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 치타 일대의 한인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한글과 애국가 등의 교육을 실시했고, 같은 해 시베리아 지방총회 재무 및 총무를 맡기도 했다.
또한 1920년 치타시 조선인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23년 2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치타시 서쪽 지방 대표자로 참석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결의한 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의 경력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태용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