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
Tucker 48 / Torpedo[1][2]
1. 개요
미국의 사라진 자동차 제조사인 터커 모터스가 1948년에 생산한 리어 엔진 후륜구동 대형 세단.출시 당시 혁신적인 설계와 엄청난 성능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수많은 찬사를 받았고, 프레스턴 터커 본인의 열정과 혼이 담긴 혁신적인 작품이었으나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사건사고와 우여곡절 끝에 결국 51대밖에 생산되지 못한 비운의 자동차이다. 터커 모터스가 생산한 유일한 차이기도 하다. 만약 이 차량이 지체없이 생산됬다면 자동차 기술력을 20년 이상 앞당길 수 있었다는게 정설이다.
2. 역사
2.1.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은 대중들은 좀 더 새로운 디자인의 자동차를 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BIG 3 (포드, GM, 크라이슬러)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신차를 개발할 역량이 부족했는데, 다름아닌 전쟁 중에 군수물자를 생산해야 했기에 신차 개발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스튜드베이커, 허드슨 같은 중소 규모의 자동차 제조사들이 빠르게 차를 개발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고, 프레스턴 터커 역시 이 흐름에 편승한 사람 중 하나였다.프레스턴 터커는 터커 모터스를 설립하면서 혁신적이고 완전히 현대적인 신개념의 자동차를 만들기를 원했다. 프레스턴은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디자이너를 고용하여 전체적인 스타일을 잡는 등 신차에 대한 계획을 구상해 오고 있었으며, 종전 후 자신의 꿈이 담긴 플랜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프레스턴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신차 개발은 순탄치 못했다. 프레스턴과의 의견 불일치 등으로 기존 디자이너가 사임하고 새로운 디자이너 팀으로 교체되기도 하였으며, 엔진 선정에도 꽤나 난항을 겪었다. 처음에는 라이커밍(Lycoming) 사의 항공기용 엔진을 차량 후방에 장착할 계획을 세웠으나, 엔진이 엔진룸의 크기에 맞지 않아 이 계획은 사장되었다. 대신 프랭클린(Franklin)사의 O-355 항공기용 엔진을 차에 알맞게 대폭 개량하여 얹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안전하고 튼튼한 차를 만들겠다는 프레스턴 터커의 철학에 따라 29,000km의 거리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풀 스로틀로 엔진을 가동하며 내구성 테스트를 진행하여 최적의 세팅을 조율했다.
48의 엔진. 항공기용이었던 프랭클린 O-355 엔진을 자동차용으로 개량한 물건이다.
한편, 이 혁신적인 엔진의 동력을 전달해줄 변속기를 선정하는 데도 많은 노력이 투입되었다. 터커 48의 특성에 잘 맞는 변속기로 코드 810/812에 사용되었던 수동 4단 변속기의 메커니즘이 활용되었는데, 이 변속기는 코드 810과 812에 적용되었을 때에는 수도 없이 말썽을 일으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48에 맞물렸을 때는 별 이상이 없었고 실제 양산차 중 일부에 이 변속기가 달린 채로 출고되었다.
또 다른 변속기로 터커매틱(Tuckermatic)이라는 반자동 변속기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터커 48의 기술적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후방에 장착된 싱글 토크 컨버터가 후진 기어의 역할을 하고 일반적인 변속기보다 훨씬 단순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효율을 극대화한 설계는 이 차가 출시된 1940년대에는 상상하기 힘든 혁신 그 자체였다. 일반적인 수동변속기의 스틱 시프터가 아닌 스티어링 칼럼에 버튼 3개가 달려 있는 버튼식이었다.[3] 전체 51대 중 가장 희귀한 사양으로, 터커매틱 변속기를 사용한 차량은 단 2대 뿐이다.
양산차 출시 이전에 공개된 토르피도 컨셉카의 모습. 양산형인 48과는 꽤 차이를 보이나, 전체적인 스타일링은 유지된 것을 알 수 있다.
2.2. 혁신의 아이콘
우여곡절 끝에 성공적으로 개발을 마치고 프로토타입 차량까지 생산했지만, 신생 기업이었던 터커 모터스는 본격적인 양산을 위한 자금이 매우 부족했다. 투자자를 찾기 위해 신문 광고를 시작으로 채권 발매, 차량 구매 대금을 받는 조건으로 자본금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드디어 1948년 양산차를 출시할 수 있게 되었다.또한 성능에서 큰 관심을 보여 당시로선 신기술인 디스크 브레이크를 적극 사용했으며, 또한 당시에는 어려운 최고속도 198km를 달성하였다. 그리고 타사 승용차들은 0-130km 가속에 1분 이상 소요되는반면, 터커 48은 15초면 도달했다. 체감이 잘 안간다면 1948년에 만들어진 자동차가, 70년 뒤에 만들어진 쏘나타 1.6터보와 가속력이 동일하다(!). 이런 괴물같은 성능에서 연비는 1L당 10km정도로 뛰어났다.
프레스턴 터커가 48을 개발하면서 가장 크게 신경쓴 또 다른 부분은 탑승자의 안전이었다. 정면 충돌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승객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스티어링 휠 박스를 앞 차축 뒤에 배치하였고, 앞 유리창은 사고 시 전체가 쉽게 떨어져나가도록 설계하는가 하면[5], 당시에는 드물었던 장비였던 안전벨트를 전 좌석에 설치하는 등 안전장치 도입 면에서도 혁신적이었다.
프레스턴 터커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 |
프레스턴 터커는 48을 매년 1,000대씩 생산하겠다고 자신 있게 선언했고,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 역시 48의 성공을 예견하는 듯 했다. 그러나...
2.3. 꿈도 펴 보지 못하고...
48의 첫 양산차가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1948년 3월이었으나, 이미 터커 모터스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직면해 있었다. 신생 기업이었던 회사의 재정 상황은 매우 열악했으며, 신차를 너무 급하게 출시하려고 한 나머지 전 년도에 진행되었던 프로토타입 발표회에 출품된 차량을 미완성 상태로 내놓은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다행히도 출시 직후 48에 대한 대중과 언론들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문제투성이였던 프로토타입이 갖고 있던 문제점들을 거의 모두 해결했고, 차량의 전체적인 스펙과 지금껏 들어보지도 못했던 수많은 첨단기술들은 당시 사람들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터커 48의 구매를 희망하는 고객들도 속속 생겨났고, 프레스턴 터커는 48을 매년 1,000대 이상씩 생산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48의 탄탄대로는 오래가지 못했다. 출시한 지 불과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갑자기 언론들이 터커 모터스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분명 출시할 때만 해도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며 호평일색이었던 신문기사들이 돌연 터커 모터스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논조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프레스턴 터커는 상황이 계속해서 안 좋아지자 차를 생산할 여력조차 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수익을 내 보려고 무리하게 계약을 받았고,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것으로 모자라 직원들까지 무더기로 해고해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터커 모터스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프레스턴을 사기를 쳤다며 소송을 걸었고, 미국증권감독위원회(SED)는 그를 법정 기소했다.
1950년 진행된 재판에서 프레스턴 터커에게 벌금 15만 달러와 무려 징역 115년이라는 처벌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터커는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을 어떻게든 벗어내려 했고, 수많은 법정싸움 끝에 결국 무죄를 선고받는 데 성공한다. 아무도 자신의 편에 서 주지 않는 극한의 상황에서 오직 자신의 힘과 피나는 노력만으로 끝내 무죄를 입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꿈과 열정이 담긴 회사는 도무지 희망이 없었다.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작은 규모의 기업이다 보니 원래도 재정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던 데다가 고된 법적 공방과 재판으로 인해 정상적인 경영이 불가능했고, 안타깝게도 결국 파산 직전까지 몰린 터커 모터스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공공연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는데, 바로 미국의 BIG 3 자동차 제조사(GM, 포드, 크라이슬러)가 이들을 압박해 터커 모터스가 몰락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던 것이다. 1940년대 후반 신차 개발 역량에서 중소 규모 브랜드들에게 밀리고 있었던 이들에게 혜성처럼 등장한 터커 48은 크나큰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터커 모터스에게 파이를 뺏길 것이 두려웠던 이들은 터커를 집요하게 괴롭혔는데, 언론과 은행은 물론이고 무려 미시간 주 상원의원까지 조종해 어떻게든 터커를 몰락시키려 했고, 그들의 계략은 결국 성공했다. 이 거대 기업 집단들이 권력을 휘둘러 터커를 공격했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드러난 바는 없지만, 이들이 터커 모터스가 몰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행사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 기타
총 생산된 51대 중에서 현재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개체수는 47대이며, 이 차들은 전 세계의 박물관이나 자동차 컬렉터들이 소장하고 있다.[6] 엄청난 희귀성과 더불어 역사적 의미가 깊은 차종이라 현재는 부르는 게 값.4. 미디어에서
- 프랜시스 코폴라가 감독하고 제프 브리지스가 주연을 맡은 1988년에 개봉한 영화 <터커: 한 남자의 꿈>[7]은 터커 오토모빌의 창립자 프레스턴 터커와 그의 회사, 그리고 이 차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다루었다. 흥행 면에서는 마이너한 장르 특성상 실패한 영화이나 작품성 면에서는 큰 호평을 받았다고 전해진다.[8] 한국에서도 1992년 12월에 극장 개봉했었다.
5. 둘러보기
[1] 토르피도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 양산차의 정식 명칭은 토르피도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그냥 '48'이다.[2] 이름을 토르피도에서 48로 변경한 이유는 대중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의 공포심을 다시 느끼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토르피도(Torpedo)는 영어로 어뢰를 의미한다.[3] 위에서부터 후진 - 중립 - 전진 순서[4] 비록 최종 양산 버전에서는 제외되었지만, 프로토타입 차량의 경우 마그네슘 휠, 연료분사식 엔진까지 달려 있었다.[5] 유리창 자체는 비산 방지 유리를 사용해 충격을 받았을 때 산산조각나서 파편이 흩어지지 않게 설계했다.[6] 아이러니하게도, 포드 모터 컴퍼니 역시 이 차를 소장하고 있다(...). 포드가 터커 모터스의 몰락의 주범 중 하나였다는 걸 생각하면...[7] <Tucker: The Man And His Dream>[8] 사실 코폴라 감독부터가 터커 48의 오너다. 한마디로 자신이 덕질하려고 만든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