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ent du Jeu de paume(죄드폼의 맹세) | Tennis Court Oath(테니스 코트 서약)
자크루이 다비드의 "테니스 코트의 선서"[1] |
1. 개요
1789년 6월 20일, 프랑스 왕국의 앙시앵 레짐에 반발한 삼부회의 제3신분(평민) 의원들이 국민 의회를 선언, 정부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의회장을 폐쇄하자 의원들이 베르사유 궁전 인근 테니스 코트[2]로 장소를 옮겨 헌법 제정을 요구한 사건이다. 프랑스 혁명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꼽힌다.2. 상세
'정구장의 서약', '테니스 코트의 서약', '죄드폼의 맹세'라고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테니스가 아니라 죄드폼이라는 약간 다른 스포츠의 구장이나, 친숙하지 않은 스포츠인 탓에 테니스로 의역하여 널리 쓰이고 있다. 오역은 아닌데, 현대의 테니스는 17세기부터 존재하던 죄드폼과 랑그폼 등의 유럽 민속놀이 규칙을 하나로 통일, 규격화하면서 탄생한 스포츠이기 때문이다.[3]1789년 5월에 개최된 삼부회에서 평민계급 의원들은 계급별 투표에 반대하며[4] 삼부회의 영국식 의회 개편과 헌법 제정 등을 주장했고, 귀족, 성직자 계급 의원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귀족, 성직자 계급 의원들은 이에 반대했다. 6월 19일, 평민계급 의원들은 라파예트[5], 미라보 백작, 시에예스 신부, 기요탱 박사 등의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 계급 의원들이 평민계급의 주장에 동조함[6]에 따라 단독으로 삼부회를 국민의회로 전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루이 16세가 국민의회를 반대하여 군대를 동원해 삼부회 회의장을 폐쇄하고 국민의회를 해산하려 들었다. 이에 맞서 평민계급 의원들과 국민의회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므늬 플레지르 궁의 테니스 코트로 가서 대응책을 논의했다. 논의 과정에서 혁명을 일으키자는 등의 과격한 주장들도 있었으나 결국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민의회는 물러서지 않겠다"라고 선언하고 초대 의장으로 천문학자인 장 실뱅 바이이를 선출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 대세는 국민의회 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결국 루이 16세는 어쩔 수 없이 국민의회를 인정하고 헌법제정위원회를 만드는 것을 용인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루이 16세는 프랑스군을 파리로 보내게 되고, 결국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었으니...
3. 기타
- 장소 섭외 문제로 인해 우왕좌왕하고 있을때 이 테니스 코트를 소개하고 열쇠까지 가져온 사람은 바로 '기요탱' 박사. 단두대의 어원이 된 그 사람이다. 물론 단두대 문서에 나와 있듯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지 않았으며, 이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지지해서 나폴레옹 정권 때까지 잘 살다가 자연사했다.
-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한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당시 평민 대표의 출입을 막고자 프랑스 군대는 회의 전날 오스칼과 위병대를 시켜 회의장의 출입문을 막아버린다. 다음날 평민 대표들은 회의장 상황을 보고 절망하다가 주변 사람의 제의로 테니스 코드로 가고 이곳에서 테니스코트의 서약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본 오스칼은 주변의 탄압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평민대표의 열정에 심란하다가 마침 지나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마주친다.
[1] 이 그림은 미완성 작품이다.[2] 정확한 위치는 'Salle du Jeu de Paume, 1 Rue du Jeu de Paume, 78000 Versailles'로 현재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는 옛 구장이다.[3] 죄드폼과 랑그폼의 차이는 럭비 유니온과 럭비 리그의 차이 내지는 축구(soccer)와 미식축구,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등의 차이와도 같다.[4] 계급별 투표는 말 그대로 계급당 한 표를 주는 것인데 문제는 제1계급인 성직자와 제2계급인 귀족이 쿵짝이 잘 맞아서 제3계급인 평민에게는 불리하다는 것.[5] 미국 독립 전쟁에 참가한 그 라파예트다. 프랑스 혁명 전부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고.[6] 하단부에 세명이 모여있는 모습이 이 장면을 상징한다. 좌측이 1신분인 성직자, 우측이 2신분인 귀족을 대표하는 라파예트, 중앙이 제3신분 부르주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