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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16:28:50

테오포보스

이름 테오포보스
(영어: Theophobos, 그리스어: Θεόφοβος)
출생 미상
사망 842년
직위 파트리키오스
반란 대상 테오필로스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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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아모리아 왕조의 반란자. 본래 아바스 왕조를 상대로 벌어진 반란인 호람딘 세력의 일원이었으나 아바스 조에게 밀린 뒤 동로마 제국에 귀순했다. 그 후 테오필로스 황제의 핵심 장성으로서 활동하다가 다지몬 전투에서 황제가 사망했다는 헛소문을 듣고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칭했지만, 테오필로스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귀순했다. 그러나 842년경 죽음을 눈앞에 둔 테오필로스는 어린 아들 미하일 3세의 앞날을 근심하여 그를 처형했다.

2. 행적

본래 이름은 나시르(ناصر)이다. 그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참회자 테오파네스의 연대기에 전해진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된 페르시아 사절과 현지 소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옥세이아에서 살다가 정체가 밝혀졌고, 동로마 황제(테오필로스인지, 아니면 그 전의 황제 미하일 2세인지는 불확실하다)는 소년이 황궁에서 자라나며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줬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페르시아 왕족이었으나, 정적들의 술수를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하여 한 상인의 하인으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현지 처녀와 결혼하여 테오포보스를 낳았고 얼마 안가 사망했다. 몇 년 후, 페르시아 왕실 대표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사람을 보내 테오포보스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를 호람딘의 왕으로 추대하여 아랍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로 계획했다고 한다.

12세기의 역사가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조용히 자랐지만 실은 페르시아 왕실 혈통이었고, 페르시아인들이 그의 정체를 밝혀낸 뒤 그들에 의해 왕중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그 후 바박 호람딘과 함께 페르시아군을 이끌고 아바스 왕조와 맞섰으나 끝내 실패하자 14,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제국에 투항했다. 테오필로스는 그를 흔쾌히 받아들여 파트리키오스로 삼았다. 또한 그가 이끌고 온 호람딘 군대는 모두 정교회로 개종하고 과부들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페르시아 투르마'라고 불리는 동로마 부대에 입대했다.

837년, 테오필로스 황제와 함께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서 아랍군을 격파하고 자페트라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838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무타심이 일전의 침략에 보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테오필로스 황제와 함께 이에 맞섰다. 양군은 다지몬 전투에서 맞붙었는데, 이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워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튀르크 궁기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돌격하는 동로마 대열을 파괴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한편, 테오필로스는 말도 없이 친위대와 동분서주하였는데, 일부 병사들이 그가 죽은줄 알고 후퇴하였고 결국 동로마 진영은 무너졌다.

이후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시노페에서 아랍군에 대항할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병사들은 테오필로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을 믿고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얼마 후 테오필로스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테오필로스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하겠으니 직위를 유지해달라고 요청했다. 테오필로스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 대신 그가 이끌고 있던 부대를 여러 연대로 나누어 각지의 테마로 분산시켰다.

파일:The_head_of_Theophobos_is_brought_to_Emperor_Theophilos_on_his_deathbed.jpg

그러나 842년 1월 20일 죽음을 눈앞에 둔 테오필로스는 어린 아들 미하일 3세의 안위를 걱정하여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킬 지도 모르는 테오포보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그는 테오필로스의 처남 페트로나스에 의해 처형되었고, 테오필로스는 그의 수급을 확인한 뒤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