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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3 19:18:10

토머스 하워드(제2대 노퍽 공작)

<colbgcolor=#CBE0A7><colcolor=#000> 제2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
Thomas Howard, 2nd Duke of Norfolk
파일:제2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jpg
이름 토머스 하워드
Thomas Howard
출생 1443년
잉글랜드 왕국 서퍽주 스토크바이네일랜드
사망 1524년 5월 21일 (향년 80~81세)
잉글랜드 왕국 서퍽주 프램링엄 성
배우자 엘리자베스 틸니 (1472년 결혼/1497년 사망)
아그네스 틸니 (1497년 결혼)
자녀 토머스, 에드워드, 에드먼드, 존, 헨리, 찰스, 헨리, 리처드, 엘리자베스, 뮤리엘, 윌리엄, 토머스, 리처드, 도로시, 앤, 캐서린, 엘리자베스
형제 앤, 이사벨라, 조앤, 마거릿, 니콜라스
아버지 초대 노퍽 공작 존 하워드
어머니 캐서린 드 몰린스
직위 서리 백작, 노퍽 공작, 잉글랜드 백작 원수, 가터 기사단 단원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공작, 군인. 장미 전쟁 시기 요크 왕조 편에서 랭커스터 왕조에 대적하다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생포된 뒤 영지를 상실하고 3년간 투옥되었다. 이후 헨리 7세헨리 8세 두 대에 걸쳐 충성을 다해 튜더 왕조의 신임을 회복했고, 플로든 전투의 대승을 이끌면서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되찾았다.

2. 생애

1443년경 잉글랜드 왕국 서퍽주 스토크바이네일랜드에서 초대 노퍽 공작 존 하워드와 윌리엄 드 몰린스 경의 딸인 캐서린 드 몰린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를 섬겼고, 1470년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랭커스터파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키자 에드워드 4세의 군대에 종군했으나, 에드워드 4세가 패배하여 부르고뉴국으로 망명할 때 콜체스터로 피신했다. 1471년 초 에드워드 4세가 부르고뉴국의 공작 용담공 샤를의 지원을 받고 귀환했을 때 사병대를 이끌고 에드워드 4세와 합류하여 1471년 4월 14일 바넷 전투에 참전해 에드워드 4세가 워릭 백작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수년간 궁정 신하이자 군 사령관으로서 에드워드 4세를 계속 따랐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한 뒤, 아버지 존 하워드는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에드워드 4세의 장남 에드워드 5세폐위하고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3세로 등극하는 데 일조했다. 리처드 3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존 하워드를 초대 노퍽 공작으로 선임했는데, 토머스 역시 서리 백작에 선임되었다. 1485년 8월 22일 보스워스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리처드 3세 편에서 종군했으나, 아버지는 전사하고 토머스는 생포되었다. 그는 영지를 박탈당하고 런던 탑에 감금되어 3년간 갇혀 지내야 했다.

1487년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이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을 사칭한 램버트 심넬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거부했고, 헨리 7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석방하기로 했다. 1489년 5월, 헨리 7세는 그를 서리 백작에 복직시키고 요크셔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그 후 그는 스코틀랜드 국경지대를 경비하는 임무를 1499년까지 수행했으며, 가족과 함께 국경 요새인 셰리프 허튼 성에서 지냈다. 1499년 궁정으로 소환되었고, 1500년 헨리 7세의 프랑스 방문에 동행했다. 1501년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6월 16일 재무 장관으로 선임되어 윈체스터 주교 리처드 폭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럼과 함께 국왕의 '행정 삼두정치'로 일컬어졌다.

1501년 아라곤의 카타리나아서 튜더 왕자의 결혼 협상에 참여했고, 1503년 마거릿 튜더제임스 4세의 결혼을 성사하기 위해 그녀를 스코틀랜드로 데려갔다. 1509년 4월 21일 헨리 7세가 사망했을 때 유언 집행자로 선임되었고, 헨리 8세대관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뒤 잉글랜드 백작 원수로 지명되었다. 그는 새로운 왕의 로드 챈슬러(Lord Chancellor)가 되기 위해 요크 대주교 토머스 울지와 결합했지만, 토머스 울지가 그 직위를 차지하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1513년 6월 30일에 헨리 8세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칼레로 향했을 때 국내에 남아서 스코틀랜드의 침략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고, 1513년 9월 9일 노섬벌랜드의 브랜크스턴 인근에서 벌어진 플로든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2만 6천 명을 통솔해 장남 토머스 하워드와 함께 스코틀랜드군 3~4만 명을 격파하고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를 사살했다. 그는 이 대승으로 잉글랜드 국민들로부터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1514년 2월 1일 71세의 나이에 부친의 작위였던 노퍽 공작에 선임되었고, 장남 토머스는 서리 백작에 선임되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토지와 연금을 받았으며, 하워드 가문의 문장에는 플로든 전투를 기리는 의미로 스코틀랜드 사자의 입이 화살에 꿰뚫린 문양이 추가되었다.

1514년 토머스 울지, 리처드 폭스와 함께 메리 튜더와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의 결혼을 협상했고, 그녀를 프랑스로 호위해 결혼식에 참석하도록 했다. 1517년 5월 1일, 1,300명의 가신으로 구성된 사병을 이끌고 런던에서 발발한 견습공들의 외국인 혐오 폭동을 진압했다. 1521년 5월 대법관에 선임된 그는 반역 혐의로 기소된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의 재판을 주관해 사형을 선고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장남 토머스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엘리자베스 스태퍼드의 아버지인 버킹엄 공작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싶지 않았지만, 왕의 강압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며 사형을 선고했다고 한다.

1522년 봄, 80세에 접어들면서 기력이 쇠하자 궁정에서 물러났고, 그 해 12월 아들에게 재무장관직을 물려주고 사임한 뒤 1523년 4월 의회 개회식에 참석한 후 서퍽 주 프랭임성 성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524년 5월 21일에 사망했다. 6월 22일 태트퍼드 수도원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엔 횃불을 든 두건 쓴 남자 400명과 밀랍 인형 100개, 7000개의 양초가 얹힌 정교한 관의 행렬이 이뤄졌고, 1,300파운드가 넘는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훗날 잉글랜드 종교개혁으로 태트퍼드 수도원에 해체된 뒤, 그의 무덤은 프랭링엄의 성 미카엘 대천사 교회로 이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