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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31:04

토머스 2세 드 움프라빌

성명 토머스 2세 드 움프라빌
Thomas II de Umfraville
출생 1362년
잉글랜드 왕국 움프라빌 영지
사망 1391년 2월 12일 (향년 29세)
잉글랜드 왕국 리즈데일
아버지 토머스 1세 드 움프라빌
어머니 조앤 로담
형제 로버트 4세
아내 아그네스
자녀 길버트 5세, 엘리자베스, 모드, 조앤, 마가렛, 아그네스
직위 리즈데일 남작, 노섬벌랜드 카운티 보안관, 잉글랜드 의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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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스코틀랜드군에 맞섰다.

2. 생애

움프라빌 가문은 시조인 로버트 1세 드 움프라빌이 1155년경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에 의해 프라도와 리즈데일의 영주권을 수여받은 이래로 수 세기 동안 잉글랜드 북동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은 발휘했다. 그들은 노섬벌랜드, 요크셔, 러틀랜드 및 서퍽에서 광범위한 부동산을 소유했으며, 길버트 2세 드 움프라빌이 1243년 앵거스 여백작 마틸다와 결혼하면서 스코틀랜드에도 영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패배한 후, 엥거스 영지를 상실했다. 1375년에 앵거스 3대 백작 길버트 4세 드 움프라빌이 프라도 영주권을 제4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에게 매각하면서, 잉글랜드 북부에서 움프라빌 가문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잉글랜드 북부에서 알아주는 귀족 집안이었다.

아버지 토머스 1세 드 움프라빌은 제2대 앵거스 백작 로버트 3세 드 움프라빌의 막내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가문의 소유물과 칭호 대부분은 큰형인 길버트 4세 드 움프라빌에게 넘어간 뒤 기사로 복무했다. 그러다가 길버트 4세가 1381년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리즈데일을 물려받았지만, 그 외의 영지는 제4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에게 넘어갔기에 수입이 많지 않았고, 잉글랜드 의회에 소환되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첫 부인이자 계모인 루시 드 카임으로부터 카임 남작위를 물려받았다. 토머스 1세는 기사 아담 로담의 딸인 조앤과 결혼해 토머스 2세와 로버트 4세를 낳았다.

1362년에 출생한 토머스는 2세는 1387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무렵엔 이미 기사 작위를 받고 왕실에서 복무했으며, 뉴캐슬의 감옥에 포로를 인도한 위원으로 활동했다. 1387년 7월 휘팅엄에 있는 에슬링턴 저택을 조사하는 위원회에 참석했으며, 1388년 2월에 개최된 잉글랜드 의회에 리즈데일 남작의 자격으로 소환되었다. 그해 6월과 8월에 노섬벌랜드 배열 위원회에 소속되었고, 12월에는 노섬벌랜드 카운티 보안관을 맡았다. 그는 이 의회에서 리처드 2세의 측근들을 대상으로 한 반역죄를 심의하는 재판에 참석했는데, 훗날 우스터와 런던의 주교가 될 리처드 클리퍼드와 왕실 예배당의 교장인 니콜라스 블레이크가 6월 런던 탑에서 석방될 때 보증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가 리처드 2세 측근들의 운명에 대해 동정심을 느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후 잉글랜드 북부로 돌아가서 1388년 6월 19일에 휴전이 만료된 뒤 스코틀랜드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지침에 따랐지만, 휴전이 만료된 지 2주 후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군이 쳐들어왔고, 그해 8월 오터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그는 이 전투에 참여했지만 친척인 헨리 '핫스퍼' 퍼시와는 달리 생포를 모면했다. 이후 잉글랜드 당국은 국경 수비를 활기차고 유능한 사람들에게 맡겨야겠다고 판단하고, 1388년 12월 토머스 2세를 노섬벌랜드 보안관에 선임했으며, 1389년 봄 록스버그 성주로 선임했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 북부의 주요 요새인 뱀버러와 베릭어폰트위드에 주둔한 수비대의 규율을 개선하고 방어력을 키우는 위원회에 참여했다. 1389년 12월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으며, 1390년 1월 다시 잉글랜드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391년 2월 12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