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19:34:30

트런들/배경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트런들

1. 장문 배경2. 왕의 만찬3. 구 배경
3.1. 유니버스 이전3.2. 비주얼 업데이트 전3.3. 리그의 심판

1. 장문 배경

트롤은 대개 룬테라의 험악한 환경에서 주로 살아가는 거대하고 흉포한 생명체다. 불사의 존재는 아니지만 다른 필멸 종족, 특히 약한 인간보다 빠른 회복력과 강인한 신체를 자랑한다. 덕분에 트롤은 기후가 혹독하고 자원이 희소한 환경에서도 경쟁자보다 오래 살아남으며 버틸 수 있다.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진 부족들이 여전히 프렐요드 산악 지대에서 살아가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트런들은 열다섯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지저분한 동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유난히 힘든 시기를 거친 후 족장의 무리에 합류할 만큼 튼튼하게 자란 것은 그중 일곱에 불과했다. 결국 첫 번째 겨울 약탈이 끝나자 단 셋만이 남고 말았다.

족장은 포식하는 무리를 향해 다시 돌아가서 같은 땅을 약탈하자고 부추겼다. 모두가 자신들을 두려워할 테니 다시 돌아갈 때마다 약탈하기도 더 쉬워질 것이라는 얘기였다.

트런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부족이 약탈한 이들은 더 이상 가진 것이 없었다. 곳간이 다시 가득 차고 가축이 몇 입 거리는 될 정도로 자라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겨울에 돌아가야 했다.

이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다른 트롤들은 이빨을 갈고 머리 옆을 퍽퍽 치며 트런들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겁쟁이 녀석인가? 너무 추워서 머리까지 얼어붙었나? 결국 족장은 트런들을 바위로 흠씬 두들긴 후 산비탈에 던져 버렸다. 무리에 멍청이가 있을 곳은 없었다.

자신이 근처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안 트런들은 멀리 이동했다. 툰드라 이곳저곳에 흩어진 다른 트롤 부족을 피하며 산악 지대를 배회하는 무시무시한 설인과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밤이 되면 별을 올려다보며 어렸을 때 들은 현명한 그럽그랙의 전설과[1] 어신을 섬기고 지배자의 증표인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었다는 고대 트롤 왕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떠올렸다.

마침내 트런들은 땅속 깊이 파인 거대한 균열에 다다랐다. 바람을 피할 수 있어 기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로처럼 이리저리 꼬인 황량한 협곡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협곡은 프렐요드 위로 솟아오른 산보다도 더 깊숙이 땅을 파고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심연의 바닥에서 트런들은 얼음 마녀를 만났다.

얼음 마녀는 빛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트런들을 기다렸다. 털가죽과 금속으로 몸을 감싼 작은 인간 전사들이 호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트런들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얼음 마녀는 트런들이 어떻게 자신의 영역 심장부까지 찾아 들어왔는지, 어떻게 호수 위를 걸을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트런들은 밑을 내려다봤다. 발밑의 얼음은 저 위쪽에 있는 밤하늘보다도 어두웠다. 머릿속에서 뇌가 미친 듯이 꿈틀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얼음 마녀는 트런들이 '냉기의 화신'이라는 아주 특별한 존재이니 자신과 함께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던 트런들은 자신이 어쩌다 부족에서 추방되었는지 얘기하며 위대한 무기를 찾아 그럽그랙과 다른 이들 같은 트롤 왕이 되고 싶다고 했다. 놀랍게도 트런들의 말을 받아들인 얼음 마녀는 트런들에게 '뼈분쇄자'라는 이름의 거대한 얼음 몽둥이를 건넸다. 이 몽둥이가 있으면 모든 트롤의 왕이 되어 자신의 인간 부족과 견고한 동맹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트런들은 기꺼이 몽둥이를 받아 집으로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

족장은 다시 돌아온 트런들을 면전에서 비웃었다. 그러나 트런들이 뼈분쇄자를 휘두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뼈분쇄자의 얼음 마법에 순식간에 얼어붙은 족장은 두 번째 타격에 산산조각이 났다.

트런들의 새로운 힘에 경외심을 느낀 무리는 트런들에게 얼음 마녀와 그녀가 약속했다는 동맹 이야기를 들었다. 트런들은 똑똑했다. 트런들은 강력한 힘의 주인으로 선택받았다. 트런들은 그들의 왕이 될 것이다.

트런들이 이끈다면 트롤의 시대가 반드시 도래하리라.

2. 왕의 만찬

트롤들의 생태를 묘사하다보니 내용과 묘사가 몹시 지저분하다. 읽기 전에 주의할 것.
파일:a-feast-fit-for-a-king-splash.jpg

눈이 허리까지 쌓인 협곡 아래, 거구의 형체가 눈보라를 뚫으며 당당하게 나아갔다. 육중한 발걸음 탓에 지나간 자리 위로 뚜렷한 흔적이 남았고, 눈 아래 숨겨져 있던 흙은 날카로운 발톱에 의해 파헤쳐졌다. 칼날 같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거구의 인물이 가죽을 기워 만든 누더기 망토를 더 단단히 여몄다.

트런들은 트롤 중에서도 덩치가 상당히 큰 편이었다. 사막의 태양 아래에서 말린 가죽 같은 촉감의 두꺼운 푸른색 피부 밑에는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물론 트런들이 실제로 사막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들어서 어떤 곳인지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과거 얼음 마녀는 그에게 남쪽 산맥 너머에 존재하는 사막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었다. 사막의 태양은 피부를 벌겋게 물들이고, 사막의 눈은 녹지도 않을뿐더러 자갈처럼 꺼끌꺼끌해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라고 했었다.

녹지 않는 눈이라니? 트런들은 내심 얼음 마녀가 과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런들의 넓은 어깨 위에는 가죽 자루가 걸쳐져 있었다. 자루 안에는 엘누크, 드류바스크, 멧돼지, 그리고 발을 헛디뎌 생을 마감한 멍청한 산양 몇 마리가 들어 있었다. 양손으로 셀 수 있는 것보다 오래전 동굴을 떠나온 탓에 자루 안쪽에서는 트런들의 구미를 돋우는 악취가 퍼져 나왔다. 사체에서 흘러나온 피는 이미 검게 얼어붙어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트런들의 양옆으로 거대한 얼음 절벽이 푸르게 솟아 있었다. 마치 파도가 얼어붙은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트런들은 얼음 절벽이 정말로 파도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먼 옛날, 마법으로 엄청난 일들을 일으켰다고 얼음 마녀가 말해 주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는 정말 세계의 정상에서 얼어붙은 파도 사이를 지나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퍽 마음에 드는 상상이었다. 트런들은 바다 괴물의 화석이라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음 속 바다 괴물이라. 좋은 이야기 소재였다. 사실,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트롤치고 머리에 든 게 있는 놈은 드물었으니까.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의심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일단 머리를 굴리는 건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나중을 위해 생각을 아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북쪽은 자신의 영역도 아닐뿐더러 죽음에 이르는 방법은 자신이 셀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았다. 트런들이 여느 트롤보다 숫자를 잘 센다는 점을 고려하면 북쪽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빙하 틈새로 빠지거나, 수수께끼 같은 얼음용에게 잡아 먹히거나, 야생 트롤 부족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국거리가 될 가능성도 다분했다. 북쪽에 터전을 잡은 트롤 부족은 덩치가 상당이 컸는데, 왕은커녕 그 권위를 엘누크의 똥보다 못한 것으로 여겼다.

자신이 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달려들어 공격할 터였다.

사실 그가 이 먼 곳까지 여정을 떠나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왕이라면 귓등으로도 안 듣는 놈들 사이에서 괴상한 소문이 퍼진 것이다. 예투라는 이름의 거대한 트롤이 북방 부족을 돌며 자신이 진정한 트롤 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트런들은 헛소리를 나불대는 몇몇 멍청한 놈들의 머리를 후려갈겨 줘야 했다. 개나 소나 트롤 왕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판에 트런들에게 가장 큰 사냥감을 양보하고 그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있냐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였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그 예투란 놈을 처리해야 했다.

자신이 그럽그랙이나 다른 고대 트롤 군주들처럼 왕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다른 트롤도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됐다!

발걸음을 옮기던 트런들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누군가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맨눈으로 보이는 건 없었지만 그의 예리한 후각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앞쪽의 눈밭 아래에서 생생한 악취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곧 쏟아질 피 냄새를 맡지 못한 왕치고 명줄이 긴 놈은 없었다.

그는 아침에 뒷간에 볼일을 보러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커다랗게 입을 벌린 채 하품까지 연기하며 트런들은 앞에 펼쳐진 눈밭을 훑어보았다.

칼날 같은 강풍과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무언가를 제대로 보기란 꽤 힘들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트런들은 마침내 두 개의 불룩 솟아 있는 눈덩이를 찾는 데 성공했다. 자연스럽게 생겨났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눈덩이였다.

결정적으로 한쪽 눈덩이에서는 발 하나가, 나머지 한쪽에서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솟아 있었다.

벌어진 이빨을 드러내며 활짝 웃은 트런들은 들쭉날쭉한 붉은 갈기를 흔들며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얼음을 털어 냈다.

트런들은 누더기 망토 안쪽으로 손을 뻗어 허리띠에 매어 놓았던 곤봉의 서늘한 자루를 쥐었다. 그러고는 거친 눈보라 탓에 힘겹게 전진하는 듯한 연기를 곁들이며 앞쪽으로 걸어갔다.

트런들이 발걸음을 옮기자 왼쪽 눈덩이에서 길고 누런 손톱이 달린 긴 손가락 두 개가 삐죽 튀어나왔다. 손가락이 다시 모습을 감추자 이번에는 노란 눈동자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트런들은 눈덩이 쪽으로 이동하며 뼈분쇄자로 거리를 계산했다. 몽둥이를 휘두르자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고 손아귀에는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었다. 뼈분쇄자는 흑요석 손잡이에 얼음 정수를 얹은 커다란 몽둥이였는데, 여태까지 트런들의 기대를 배신한 적이 없는 아주 훌륭한 무기였다.

트런들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거대한 몽둥이를 내려치자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눈 속에 감춰져 있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끼 낀 나무처럼 초록빛 피부를 지닌 트롤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운석이라도 맞은 듯 뒤통수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트런들을 향해 돌칼을 휘둘렀으나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갔는지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이미 죽은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눈치였다.

"나… 죽은 것 같다." 트롤이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군." 트런들이 대답하자 녹색 트롤이 눈밭 위로 풀썩 쓰러졌다.

곧이어 두 번째 습격자가 커다란 포효와 함께 뛰쳐나와 거대한 돌 몽둥이로 트런들이 서 있던 자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잠시 후 자신의 무기 끝에 트롤의 시체는커녕 먼지조차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죽어 있는 거라고는 자신과 함께 숨어 있던 동료밖에 없었다. 공격을 피한 트런들이 묵직한 손으로 트롤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중간 크기의 트롤이었다. 녹이 슨 듯 갈색을 띠는 피부 위에는 울퉁불퉁한 혹이 가득했고 겨드랑이와 아랫도리에는 철사처럼 뻣뻣한 털이 수북이 자라 있었다.

"자, 그럼 이유를 들어 볼까!" 트런들이 신난 듯 말했다.

"너 죽었어야 했다. 그래서 몽둥이로 때리려고 했다." 트롤이 힘겹게 내뱉었다.

"그래. 아주 잘 봤어."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자 트롤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 너와 네 친구는 별로 운이 안 좋았던 모양이지만."

트런들이 손에 힘을 풀자 갈색 트롤이 눈밭에 떨어져 황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여긴 예투 왕의 땅이다. 너, 원하는 게 뭐냐?" 트롤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트런들이 트롤의 얼굴 옆에 뼈분쇄자를 들이밀었다.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냉기에 트롤의 입에서는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내 이름은 트런들, 트롤들의 왕이지. 예투에게 날 데려가도록."
갈색 트롤의 이름은 슬리구였다. 슬리구는 길잡이 역할을 하며 폭풍을 뚫고 나아갔고, 빙하 동굴로 추측되는 장소로 트런들을 인도했다. 슬리구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트런들이 뼈분쇄자로 몇 번 어루만져 주자 입을 열심히 놀리기 시작했다.

트런들은 트롤의 빈약한 상상력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예투가 산처럼 거대한 덩치, 바위 같은 주먹, 협곡보다 깊은 위장을 지닌 트롤이라는 슬리구의 말에 대충 어떤 놈일지 상상이 갔다.

"그래서 그놈은 뭐가 잘나서 왕을 자처하는 거지?" 트런들이 물었다.

"네가 왕 노릇을 한다고 들었다. 다른 트롤들이 너에게 맛있는 음식을 바친다는 것도. 그 얘기를 듣더니, 예투가 왕 소리를 아주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북방 트롤들은 왕이라면 질색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왕 안 좋아한다. 하지만 예투가 너처럼 미적지근한 남쪽 놈들도 왕 노릇을 하는데, 자기라고 못 할 건 없다고 했다. 반대하는 부족장들도 전부 죽여서 다들 예투 앞에서는 입도 뻥긋 못 한다."

"전부 죽였다고?"

"그렇다. 돌이빨 부족장은 머리에 주먹 한 대 맞고 쓰러져 버렸다."

"나쁘지 않은 실력이군."

"예투가 빙하 동굴에 살던 트롤들은 내쫓고 동굴을 차지했다."

"어떻게?"

"동굴 버섯이랑 엘누크 똥을 잔뜩 먹고 동굴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 공기 구멍에 대고 방구 뀌었다."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이군. 좀 더럽긴 한데, 확실히 영리해."

"그리고 검은똥 부족에서 가장 큰 녀석을 무릎 위로 전부 먹어 치웠다."

"무릎 아래는 왜 안 먹고? 발이 별미인데 말이야."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냄새 때문에 싫어했던 것 같다. 똥핥개 놈들도 안 건드릴 거라고 했으니까." 슬리구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수북이 자란 뒷머리에서 조그마한 쥐 한 마리가 불평하듯 머리를 내밀고 찍찍거렸다.

"씹는 맛이 일품인데 뭘 모르는군." 트런들은 슬리구의 펑퍼짐한 발과 바삭바삭해 보이는 발톱을 곁눈질하며 입맛을 다셨다.

"나도 손가락을 즐기지만, 발도 꽤 좋아한다." 슬리구가 트런들의 말에 동의했다.

트런들은 뼈분쇄자로 슬리구를 쿡 찔렀다. "예투 얘기나 마저 하자고."

"아, 그래. 예투…" 슬리구가 다시 화제를 돌렸다. "예투는 네가 이끄는 트롤 군단에 대해 듣고, 자신도 군단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옆에서 누가 왕이 아니면 군단을 이끌 수 없다고 했다."

"혹시 놈이 왕관도 갖고 있나?"

"왕관이 뭐냐?"

"자신이 왕이라는 걸 증명하는 뾰족뾰족한 모자 같은 물건이지."

"왕이라는 걸 증명하는 모자? 마법 모자냐?"

"마법 모자도 있긴 하겠지."

"음… 그럼 예투도 왕관 있다."

"그 왕관, 어디서 났는데?"

"예투는 자기가 냄새나는 통로를 뚫고 얼음용의 뱃속에서 얻었다고 했다. 그런데 내 친구 레지는 뒷간에 쌓여 있는 이빨이랑 사슴뿔을 엮어서 만들었을 거라고 했다."

뒷간이고 뭐고, 트런들은 놈이 쓴 왕관을 당장 확인해 보고 싶었다. 가짜 왕이 자신보다 더 큰 왕관을 썼다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는 꼴을 두고만 볼 생각은 없었다.

"예투가 있는 동굴까지 얼마나 걸리지?"

트런들의 물음에 슬리구는 구부러진 손가락을 들어 협곡 끝에 위치한 거대한 빙하를 가리켰다. 빙하는 트롤의 얼굴을 조잡하게 본뜬 모양새였는데, 트런들이 지금까지 살면서 본 것 중에서 두 번째로 큰 건축물이었다. 교활해 보이는 거대한 눈동자가 빛나는 거대한 트롤의 얼굴에는 뚱뚱한 입술이 달려 있었다. 툭 튀어나온 이빨은 사마귀가 피어난 뭉툭한 코 밑으로 쭉 뻗어 있었다.

"저게 예투냐?" 트런들은 애써 감탄한 기색을 감추며 물었다.

슬리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긴 한데, 코를 조금 잘못 만든 것 같다."

자세히 살펴보니 구불거리는 돌길과 뼈로 이루어진 발판이 빙하의 전면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자, 그럼. 올라가 볼까?" 트런들이 말했다.
동굴 입구에 도착할 때쯤이 되자 태양이 막 협곡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입구는 조각상의 콧구멍 부분이었다. 안쪽에서는 이상하게 초록빛을 띠는 고드름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동굴의 입구는 야생 트롤 둘이서 지키고 있었다. 손에 든 거대한 뼈도끼와 드류바스크의 두개골로 만든 투구 외에 특별한 장비는 없어 보였다.

놈들은 주황색 피부를 지니고 있었는데 덩치가 상당히 컸다. 투구의 눈구멍에서는 철사 같은 머리카락이 삐죽 솟아 있었다. 둘 다 슬리구보다 훨씬 몸집이 컸다. 아무래도 슬리구는 덩치가 작아 몸을 숨기기 쉬워 정찰대로 뽑힌 모양이었다.

입구를 지키는 놈들이 이 정도인데 예투는 얼마나 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거기 누구냐?" 첫 번째 경비병이 물었다.

"나다, 슬리구."

"어떤 슬리구?"

"네 형, 슬리구다. 이 머리에 똥만 찬 놈아."

"아, 그 슬리구구나. 다음부터 미리 말해라. 원하는 게 뭐냐?"

슬리구가 노랗게 변색된 엄지손가락을 들어 트런들을 가리켰다. "이 트롤이 예투 만나러 왔다."

"예투는 아무나 못 만난다."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경비가 말했다. 놈의 눈동자는 마치 석탄이라도 박아 넣은 듯 검게 번들거렸다.

"나라면 보고 싶어 할 텐데." 트런들이 말했다.

두 번째 경비가 물었다. "나? 나가 누구냐? 네 이름이 나냐?"

트런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머리가 지끈거리자 곧 그만뒀다.

"내 이름은 트런들. 트롤 왕 트런들이다."

"트런들, 들어 본 적 있다. 너 우리 쪽 트롤 아니다." 슬리구의 동생이 말했다.

"그래, 넌 그나마 똑똑하군."

슬리구의 동생은 고개를 흔들더니 동료 트롤을 가리켰다. "쟤가 더 똑똑하다."

트런들은 뼈분쇄자를 휘둘러 두 번째 경비의 머리를 힘차게 내려치고 슬리구의 동생에게 돌아섰다. 슬리구의 동생은 조금 전까지 동료가 서 있던 자리에 어느새 반짝이는 얼음 정수 덩어리가 있는 것을 보더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지 트런들과 뼈분쇄자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트롤의 두뇌 회전이 느리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트런들은 어깨에 메고 있던 커다란 자루를 내려놓은 후 슬리구의 동생 앞에서 열었다. 구더기가 들끓는 고기와 응고된 피에서 나는 악취가 후각을 자극했다.

슬리구의 동생이 입맛을 다시자 돌출된 엄니 사이로 누런 침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트런들은 자루 안쪽에 손을 넣고 고기 한 덩어리를 꺼내 건넸다.

"너, 들어가도 된다." 슬리구의 동생은 굶주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슬리구의 동생 이름도 슬리구였다. 트런들은 덩치가 큰 쪽을 큰 슬리구, 작은 쪽을 작은 슬리구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까 끝장내 버린 놈도 이제 두 슬리구를 잘 구분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뼈분쇄자에 산산조각나서 그럴 기회는 없겠지만 말이다.

큰 슬리구가 빙하 안쪽으로 트런들 일행을 인도했다. 매끈한 얼음 통로가 빙하의 내부를 관통하는 형태였는데, 결코 트롤의 솜씨로 만들어진 공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통로도 아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마법적인 느낌이 강하게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예전, 얼음 마녀의 궁전 아래에서 보았던 얼음 미로와 분위기가 유사했다.

트런들은 삐죽삐죽 솟아 있는 얼음 천장을 지닌 동굴을 지나며, 가지각색의 크기와 모습을 지닌 트롤들을 보았다. 다들 덩치가 컸는데, 그중에서도 엄청난 덩치를 지닌 놈도 여럿 있었다.

트런들은 곧 놈들의 숫자를 세는 걸 포기했다.

"북방 트롤은 엄청나게 크군." 트런들이 말했다.

큰 슬리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 괴물 아주 많다. 놈들은 트롤 잡아먹는다. 그래서 큰 트롤만 살아남는다."

트런들은 작은 슬리구를 바라보았다. 저런 덩치로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영리한 놈일지도 몰랐다. 트롤 사이에서 머리싸움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지만, 트런들은 똑똑한 놈을 높게 쳐 줬다.

돌아갈 때 작은 슬리구를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똑똑한 놈을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아까웠다. 덩치는 작아도 나중에 비상한 생각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침내 큰 슬리구의 인도 아래 트런들 일행은 얼음 동굴의 심장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달빛 한 줄기가 비추고 있었다. 우뚝 솟은 벽에 반사된 달빛은 마치 춤을 추는 듯 영롱한 빛을 뿌렸다.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트런들은 예투가 이 동굴을 어떻게 차지했는지 떠올리며, 그가 혹으로 가득한 엉덩이를 저 구멍에 대고 뱃속 가스를 내보내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큰 트롤들은 예투 왕과 함께 여기서 지낸다." 큰 슬리구가 말했다.

동굴 안쪽에는 거대한 덩치의 트롤들이 미끈거리는 이끼와 타이가 풀로 엮은 매듭 같은 것으로 뒤덮인 거대한 푸른색 바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바위가 아니었다.

바위인 줄 알았던 존재가 고개를 돌려 트런들이 어깨에 메고 있는 자루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돌리자 덩치가 한층 더 커 보이는 듯한 착각마저 드는 위압감이었다.

예투는 트런들보다 덩치가 거의 두 배는 컸다. 길쭉한 팔은 나무처럼 두꺼웠고 다리는 그보다 더 굵직했다. 머리는 마치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온 돌처럼 얼음 이끼와 덤불로 덮인 모양새였는데 몸통이 워낙 커 바위 위에 작은 돌을 얹은 듯했다. 불길이 피어오르는 산에서 채취한 매끈한 돌로 만든 흑색 단검이 예투의 접힌 가슴팍에 비스듬히 끼워져 있었다.

예투는 서리송곳니 무리가 절룩거리는 살찐 엘누크를 바라보듯 트런들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트런들은 본래 예투를 보자마자 뼈분쇄자로 부숴 버릴 작정이었으나 놈의 거대한 두개골을 본 뒤 바로 포기했다. 예투의 머리와 뼈분쇄자의 얼음 정수 중 어느 쪽이 더 단단할지 가늠이 안 되었다.

새로운 계획이 필요했다.

"너한테 고기 냄새가 나는군." 예투가 낮고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고기라면 갖고 있지." 트런들이 자루에서 말린 뿔이 달린 산양의 냄새가 나는 사체를 꺼내며 말했다. 그 모습에 눈이 커진 예투는 성큼성큼 다가와 트런들의 손에 들려 있던 산양을 낚아채 한입에 집어삼켰다.

예투는 붉게 물든 입가를 닦고서 트림을 했다.

"네가 트런들이냐? 트롤 왕을 자처하는?"

"맞다."

예투는 손을 뻗어 트런들의 누더기 망토를 들어 올렸다.

"작은 트롤. 북쪽은 너에게 너무 추운 것 같다." 예투가 트런들을 조롱하자 주변에 있던 트롤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산사태가 서로 천천히 부딪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소리였다.

트런들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트롤 왕은 겉모습도 중요한 법이지. 보아하니 네가 예투겠지?"

"나 말고 누가 있나? 왕관 쓴 트롤 여기 나밖에 없다."

트런들이 예투의 머리 위에 얹힌 이끼 뭉치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가시 들장미와 얼음으로 엮은 왕관 사이로 피 묻은 여러 동물의 뼈와 뿔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예투의 왕관은 마치 뒤집힌 먹구름이 뼈로 된 번개를 하늘로 쏘는 듯한 형상이었다.

"바로 그 왕관이로군." 트런들이 말했다.

예투가 고개를 끄덕이며 트런들을 향해 쿵쿵 다가갔다.

"너 덩치 별로 안 크다." 예투가 트런들의 붉은 머리카락을 자신의 두꺼운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트롤이라고 들었다. 머리는 하늘에 닿을 정도로 키가 크고 바다를 마실 수 있을 만큼 위장이 크다고 했다."

"재밌는 이야기네. 내가 그런 얘기를 하고 다니라고 시키기는 했지. 큰 초록숲에서 가장 큰 나무를 이쑤시개로 쓴다는 얘기는 혹시 들어 봤나? 아침으로 매머드를 먹고 그 머리뼈로 목욕을 했다는 얘기는?"

"목욕이 뭐냐…?"

"목욕이 뭐냐면… 됐다. 내가 흰바위 거인을 상대하기 위해 남쪽 산맥을 단번에 뛰어넘은 얘기는? 내가 그놈 꼬리를 무릎으로 부러뜨리고 라켈스테이크에 가져가서 땅을 팠더니 바다가 만들어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얘기 중 하나인데 못 들어 봤나?"

"너 거인과 많이 싸웠다."

"놈들 말고는 적수가 없거든."

"나랑 싸우려고 왔나?" 예투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슬리구가 묘사한 것처럼 정말 바위 같은 주먹이었다. 주변에 서 있던 트롤들이 트런들과 예투를 원으로 둘러싸고는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트롤들은 예투가 트런들을 박살 내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얼음 마녀의 머리카락도 녹일 만큼 기발한 계획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싸움은 주먹으로만 하는 게 아니지." 트런들이 말했다.

"맞다. 나도 가끔 발로 차서 죽인다."

"그런 뜻이 아니야." 트런들이 누렇게 말린 발톱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왕… 진짜 왕이라면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하거든."

예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박치기 좋아한다. 아주 좋아한다."

"아니, 머리가 아니라 머릿속에 든 걸 말하는 거다. 생각할 때 쓰는 뇌 말이야!" 트런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뇌?"

"너에게 두뇌 싸움을 제안한다." 트런들이 말했다. 그러고는 들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행히 네놈 머리는 텅텅 빈 모양이지만."

"물렁물렁한 뇌로 싸움을 어떻게 하나?"

트런들이 씩 웃으며 자루를 거꾸로 뒤집었다. 트런들과 예투 사이로 털, 뼈, 그리고 각종 썩은 고기로 이루어진 작은 언덕이 만들어졌다.

"먹는 걸로 승부를 보자!" 트런들이 외쳤다.

"먹는 게 뇌랑 무슨 상관이지?" 예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에 서 있던 트롤들을 바라보았다.

"곧 알게 될 거야."
의자에 앉은 채 자리를 잡은 두 트롤 왕 사이로 더 많은 고기 더미가 쌓였다. 바다 괴물의 고기, 털이 수북한 매머드의 갈비뼈, 썩은 생선, 날지 못하는 툰드라 새의 거대한 날개, 엘누크 머리, 그리고 정체를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온갖 부위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고기 외에도 거대한 돌그릇에 거품이 낀 음료도 준비됐는데, 냄새가 워낙 강렬한 탓에 코털이 절로 말려드는 느낌이었다. 불과 연기를 뿜는 산 주변의 균열에서 나는 냄새와 유사했다. 아무래도 남부의 물렁한 놈들이 맥주라고 부르는 음료보다 더 맛이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왕에게 걸맞은 화려한 만찬이었지만, 살아서 떠나는 건 오직 한 명의 승자뿐이었다.

"먹기만 하면 되는 거냐?" 예투가 물었다.

트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먹기만 하면 된다. 먹다 죽으면 지는 거고. 마지막에 서 있는 자가 진짜 왕이 되는 거지."

예투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트런들의 이야기는 재밌지만 위장은 아주 작아 보인다. 진짜 왕은 배가 커야 한다. 예투는 배가 크다. 예전에 하품하다가 매머드 두 마리를 통째로 삼키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두 왕을 둘러싼 트롤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래? 난 예전에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오줌을 쌌더니 라켈스테이크에 바다가 생겼는데 말이야."

트롤들이 다시 감탄사를 터뜨렸다.

예투가 눈살을 찌푸리곤 눈알을 굴리며 조금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되짚었다.

"잠깐, 아까는 라켈스테이크에 구멍을 파서 바다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트런들은 예투의 지적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말했다.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오줌을 쌌다는 말이었지."

두 왕이 각자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열띤 경쟁을 펼치자 트롤들의 고개가 연신 돌아갔다. 이야기는 가면 갈수록 이상해졌다.

이윽고 트런들이 말했다. "난 여기 오기 전에 예티 산 정상에서 달을 베어 물었다."

말도 안 된다는 듯 트롤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리자 트런들이 위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 손가락을 따라 뚫려 있는 천장 사이로 모습을 비춘 초승달을 바라본 트롤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수군거렸다.

놈들이 달에 시선이 팔린 동안 트런들은 비어 있는 자루를 망토 아래 숨긴 채 떨어지지 않게 몸통에 단단히 묶었다.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먹는다." 예투가 으르렁댔다.

트런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침내 만찬이 시작되었다.

트런들은 거대한 갈비뼈를 손에 쥐고 고기를 발라 먹은 후, 무릎으로 뼈를 쪼개 골수까지 쪽쪽 빨아 먹었다. 그에 대적하듯 예투는 드류바스크의 옆구리를 게걸스레 뜯어 먹고서 돌그릇에 담긴 거품 낀 액체를 힘껏 들이켰다.

"마셔라! 프러스트보가가 없으면 만찬이 아니다!" 예투가 재촉했다.

트런들은 예투가 내민 그릇을 잡고 꿀꺽거리며 단숨에 들이켰다. 끔찍한 맛 때문에 눈가에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천 년 동안 썩은 늪물을 마신 것 같은 맛이었다. 식도가 타오르는 느낌에 뱃속은 불이라도 삼킨 듯 화끈거렸다. 나중에 뒷간에서 고생할 듯한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드는 순간이었다.

트런들은 애써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나쁘진 않군! 더 강한 것도 마셔 봤지만 말이야."

트런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본 예투는 웃음을 지은 채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예투의 턱에서 기름이 뚝뚝 떨어졌다. "뱃속이 뜨거워 보인다. 작은 트롤은 프러스트보가 감당 못 한다."

트런들은 그의 말에 반박하듯 커다란 고래 고기를 세 입 만에 집어삼켰다. 연골과 뼈를 투두둑 뱉어내자 굶주린 트롤들이 찌꺼기를 차지하겠다고 서로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예투는 머리를 젖히고 아우르마 생선 한 마리를 통째로 삼켰고, 이내 꼬리가 입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부족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트런들은 고기와 내장을 한 움큼 입에 쓸어 넣고 음미하듯 꼭꼭 씹어 삼켰다.

두 왕이 끊임없이 고기와 프러스트보가를 먹어 치우자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먹어도 먹어도 음식 더미는 줄어들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예투는 크기가 작은 두개골을 한 움큼 입속에 털어 넣고서 마치 별미라도 되는 듯 씹고 굴리며 맛을 음미했다.

예투가 말했다. "나무로 만든 난파선에서 찾았다. 작은 인간이 많이 죽었는데 남기고 가기 아까웠지."

트런들도 인간을 먹긴 했지만, 워낙 작아 먹을 것도 별로 없을뿐더러 잔뼈가 이빨 사이에 껴서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또다시 갈비뼈를 발라낸 후 고기와 함께 프러스트보가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대가를 치를 게 분명했다. 예투는 털이 수북한 매머드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었지만, 벌겋게 상기된 얼굴과 느려진 속도로 보아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트런들은 먹는 속도를 늦췄다.

트런들 또한 엄청난 양의 고기와 프러스트보가의 부작용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예투가 커다랗게 트림을 하자 동굴 천장에 붙어 있던 고드름과 눈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트롤들이 잽싸게 자리를 피하는 사이 트런들은 망토 아래에 숨겨 놓았던 자루의 입구를 붉게 물든 두툼한 턱 밑에 몰래 가져다 댔다.

고개를 들자 그를 바라보는 작은 슬리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영리한 녀석은 아까 자신이 망토 아래에 자루를 숨기는 걸 본 듯했다. 작은 슬리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트런들은 씩 웃으며 앞으로 몸을 숙여 고기를 더 집어 들었다. 입 쪽으로 손을 움직였지만 대부분의 음식은 그의 식도가 아닌 자루 안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트런들은 시간을 들이며 천천히 고기를 씹었고, 틈틈이 날개, 머리, 그리고 검게 변색된 갈비뼈를 자루 안에 담았다.

이윽고 트런들의 배가 꾸르륵대더니 누런 트림이 터져 나왔다.

"배부르지?" 예투가 길고 커다란 다리뼈를 뜯으며 물었다.

트런들은 불룩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배부르냐고? 아직 시작도 안 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먹어 볼까?" 트런들은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고기와 뼈를 씹으며 말했다.

둘을 둘러싼 트롤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예투가 성난 목소리로 일갈했다.

"저놈이 아니라 내가 왕이다!"

트런들이 씩 웃었다. 예투는 이곳에서 가장 힘이 세고, 성질이 더럽고, 많이 먹어서 왕 노릇을 하는 놈이었다. 이런 왕이라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영리한 왕이라면? 왕좌를 뺏길 걱정 따윈 하지 않아도 됐다.

트런들은 마치 잠이라도 오는 것처럼 뒤로 몸을 젖힌 채 하품했다.

트런들은 예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봐. 네 단검 좀 빌릴 수 있을까?"

붉게 물들어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예투의 눈가에 의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칼, 왜 필요하냐? 나를 찌를 거냐?"

"무슨 소리. 다음 음식을 먹기 전에 속을 좀 비우고 싶어서 말이야."

북쪽의 왕은 돌 손잡이를 잡고 자신의 가슴에 비스듬히 꽂혀 있던 단검을 뽑았다. 트런들은 고기 더미 너머로 날아오는 단검을 피와 기름으로 끈적이는 손길로 잡았다. 트롤이 지닌 무기치고 제련이 훌륭한 데다 날도 상당히 날카로웠다.

트런들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선 후 망토 자락이 펼쳐지지 않도록 잘 고정해 두었다. 그러고는 천둥 같은 방귀를 내뿜어 자연스레 자신의 뒤에 공간을 만들었다.

트런들은 예투가 건네준 단검을 들고 망토에 가려진 복부를 쭉 그었다.

트런들이 거짓 신음을 내자 자루에 담겨 있던 음식이 망토 아래로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씹다 만 고기, 갉아 먹은 뼈, 그리고 반쯤 먹어 치운 연골까지 음식이 산처럼 쌓였다.

"오, 이제야 살 것 같군." 작은 슬리구에게 슬쩍 윙크를 보내며 단검을 건네주자, 작은 슬리구가 다시 예투에게 단검을 돌려줬다. 트런들이 다시 고기를 한 움큼 입에 퍼 넣자 예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예투는 단검과 트런들을 번갈아 가며 보더니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이대로 질 건가?" 작은 슬리구가 물었다.

예투가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나를 이길 순 없다." 예투가 으르렁대고는 단검으로 자신의 배를 찔렀다.

예투는 예리한 칼날로 자신의 배를 가르고 단검을 들어 올린 채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투도 이제 더 먹는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띤 예투였지만, 곧 그의 얼굴에 어려 있던 웃음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됐나?" 태연스레 생선 뼈를 입 안에서 발라내며 트런들이 물었다.

예투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물고기처럼 입만 뻥끗할 뿐이었다. 결국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떨어뜨리고는 무릎을 꿇었다.

예투는 바닥에 주저앉아 필사적으로 배를 부여잡았다.

"기분이 안 좋다…" 예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기 더미에 얼굴을 처박았다.

작은 슬리구가 앞으로 나오자 트런들은 의심과 약간의 존경이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처럼 조그만 트롤이 덩치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제야 알겠군. 넌 머리를 쓸 줄 아는 놈이야."

"조금 쓸 줄 안다." 슬리구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는 게 어떻겠나?" 트런들이 물었다. 그의 어조로 보아 결코 제안은 아닌 듯했다.

"알았다." 작은 슬리구가 다른 트롤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기분 전환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는지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

작은 슬리구가 다가와 트런들의 팔을 들어 올렸다.

"트런들 승자다!" 작고 영리한 트롤이 외쳤다. "진정한 트롤 왕은 트런들이다!"

3. 구 배경

3.1. 유니버스 이전

사람들은 트롤이라고 하면 무식하게 힘만 세고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얼간이들을 떠올리곤 한다.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느 동족과는 판이한 트롤이 한 명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트런들은 트롤족으로선 아주 드물게 머리를 쓸 줄 알았다. 거기에 심술궂고 교활한 성격까지 더해 자신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기지를 발휘해 상황을 역전시키는 재능이 있었다.

호전적으로 유명한 트런들의 무리도 한때는 멍청하고 겁많은 족장을 섬겼다. 이 나약한 지도자 아래에서는 툰드라에 흩어져 사는 다른 부족에게 언제 습격을 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고, 트런들은 이 무능한 족장에게 오랜 시간 반감을 품어온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트런들은 힘에서나 덩치에서나 절대 밀리지 않는 이 족장에게 야심 차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굴욕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트런들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순간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해 말했다. "고대 트롤 지도자들에게서 내려온 위대한 힘을 지닌 무기가 있다. 이 무기를 손에 쥔 자야말로 정당한 이 부족의 지배자다!" 물론 이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소리였고, 그럼에도 트런들은 이 무기를 찾든지 아니면 훔쳐오든지 하는 날에는 지도자의 자리를 내어놓아야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멍청하기 짝이 없었던 트롤들은 그의 모든 이야기를 믿었지만, 그렇다고 트런들이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해낼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허풍쟁이 트롤 녀석이 모험 길에서 절대 목숨을 건사할 리 없을 것으로 생각한 족장은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길로 트런들은 족장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 길을 나섰다.

이내 트런들은 혈혈단신으로 대담하게 무시무시한 얼음 마녀의 왕국에 발을 들여놓았다. 예로부터 이곳에는 치명적이고 강력한 고대의 비밀을 담은 유물이 많다고 전해 들은 적이 있었고, 그렇다면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뒷받침할 무기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런들은 얼음 마녀의 파수꾼들을 수월하게 힘으로 제압했고 흑마법으로 설치된 마녀의 함정을 요리조리 재치있게 피했다. 그러나 눈을 씻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자신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어울릴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얼음 왕국에서 한참을 헤매던 트런들은 마침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진귀하고 신비스러운 물건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절대 녹지 않는 얼음의 정수로 만들어진 거대한 마법 몽둥이었다. 트런들은 그 무기를 집어들자마자 아찔하게 스며드는 냉기의 마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 채 넋을 놓고 그 자태를 감상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늘 끝까지 노여움이 뻗친 얼음 마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강력한 흑마법을 시전하며 그를 향해 돌진했고 트런들은 이제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나 그 순간 또 한 번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곤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가며 얼음 마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지금 여기서 트롤 하나를 죽여 없애는 것보다 훗날 강력한 트롤 부대를 자기편으로 부리는 게 훨씬 이득이지 않겠냐고...

트런들은 의기양양하게 마을로 돌아왔고 부족민은 이제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며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트런들은 자신의 무기를 뼈분쇄자라 이름 붙였고 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 거대한 얼음 몽둥이에 맞으면 뼛속까지 얼어붙고,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온몸을 찔러댔다. 이 무기의 첫 시험대상은 트런들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트런들은 충격에 휩싸인 족장을 보고는 씨익 한 번 웃었고 순식간에 그를 제거했다. 지휘권을 장악한 그는 이제 더 이상 족장이란 없으며 오로지 모든 트롤이 복종해야 하는 트롤의 왕 트런들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선언했다. 이 자신만만한 새로운 지도자 아래 트롤 종족은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영역 방어에 몹시 예민했던 트런들은 겁 없이 자기 땅에 발을 들이는 자가 있으면 끝까지 쫓아가 붙잡아서는 새하얀 동토가 피로 물들 때까지 얼음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패준다고 한다. 트런들의 휘하에서 마침내 트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3.2. 비주얼 업데이트 전

트롤은 이제껏 발로란에서 좋은 평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일반론적으로는 야만적이며 식인 습성을 가진 교활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지능이 뛰어난 존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세상의 어두컴컴하고 후미진 구석으로 밀려난 생명체들이 이들이다. 하지만 사악한 본성에도 불구하고 러고스크는 이렇게 처참한 운명을 감당해야 할 만큼 악한 존재는 아니었다. 몇 세대 전 뼈 조각가 하코린이라는 못된 흑마법사가 러고스크 부족을 노예로 삼으려고 했다. 비록 인간의 기준으로는 여전히 상스러운 존재였지만, 다른 사악한 트롤들보다는 상당히 고상했던 러고스크 부족은 이 흑마법사에게 온 몸으로 대항해 결국 그를 몰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야욕을 이루지 못하고 쫓겨난 하코린은 트롤들에게 작별 선물의 의미로 나병이라는 영원의 저주를 선물했다. 트롤의 타고난 재생력이 아니었다면 이들의 온 몸이 썩어 들어갔을 것이다. 살집이 영원히 썩어 들어가는 저주에 걸린 러고스크 부족은 필사적으로 치료 방법을 찾으며 저주의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하지만 치료 방법은 없었다.

현명한 러고스크족 주술사는 마법을 이용해서 트롤 한 명에게 부족민들의 질병을 지워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물론 희생양이 될 트롤은 모든 부족민의 저주를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강인해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그런 트롤은 없었다. 적어도 트런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트런들의 재생력은 너무나 강력했기에 마치 질병에 걸리지 않은 듯 보일 정도였다. 트런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의 천부적인 능력에 대해 알게 되었고, 부족민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또한 깨닫게 되었다. 적정한 나이가 되자 그는 타오르는 듯한 고통의 세례를 통해 부족에게 걸린 저주를 이양받았다. 주술사의 의식을 거친 트런들은 계속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떨어져 나간 살점이 또다시 자라나는 끔찍한 외모의 생명체로 변해버렸다. 그는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완벽하게 풀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 리그 오브 레전드에 합류했다.

"난 고통에 대해서 정말 잘 알고 있다! 진정한 고통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마."- 트런들

3.3.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
후보: 트런들
날짜: CLE 20년 11월 26일

관찰

트롤이 왔다는 걸 광고라도 하듯 코를 찌르는 아주 썩은 내가 진동한다.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 힘겹게 쉬는 숨소리, 지저분한 발을 티 한 점 없는 대리석 바닥 위로 질질 끄는 발걸음 소리가 트런들을 앞서 대전당에 울려 퍼진다. 전쟁 학회의 깔끔하게 단장된 실내와 극도로 안 어울리는 행색을 가리려 애쓰기라도 한 듯 누더기를 덮어썼다. 트런들은 작달막한 키에 거의 맞먹는 다루기 불편하고 조잡해 보이는 몽둥이를 고쳐 잡는다. 피부는 온통 물집이 잡혀 있고, 여기저기 시뻘겋게 염증이 생겨, 허물이 벗겨지며 뭉떵뭉떵 떨어져 나간다. 몸에 살이 아직 남아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트런들의 지친 시선은 정문 위에 새겨진 문구에도, 발로란 최고의 예술성을 떨치는 아름다운 조각상에도 머무는 법이 없이 그저 대전당 내부를 쓱 훑어볼 뿐이다. 이런 물질적인 것들은 트런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다. 상처투성이인 혀로 문드러진 입술을 축이더니, 회고실로 통하는 문쪽으로 손을 뻗는다. 그러자 한 쌍의 문이 마치 그의 손길을 피하기라도 하듯, 스르르 먼저 열린다. 트런들은 이런 반응쯤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회고

뭔가 날카로운 게 손을 쿡 찌르자 트런들은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대충 만든 제단에 몸이 묶인 채, 주위에는 룬들이 둥그렇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묶인 몸 위를 마을 주술사들이 에워싸고서 평생 고통을 지워주게 될 의식을 막 치르려 하고 있었다.

이번엔 의식을 처음 치를 때처럼 흥분, 공포, 자부심이 뒤섞인 소용돌이치던 감정 같은 건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차분하게 거리를 두고 남의 일을 보듯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땐 너무 어려, 매일 같이 다른 어린 트롤들한테서 괴롭힘을 당하는 상처가 더 쓰라렸지. 어린 날의 자기 모습을 돌이켜 보건대, 다른 아이들 탓만 할 일은 아니었다. 트롤이 잘생겨 봤자 거기서 거기겠지만, 트런들은 그중에서도 심하게 못생긴 데다 왜소하고 힘까지 약해 늘 도리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더 못생기고 약한 트롤이 태어나기만 했다면 트런들 역시 앞장서서 녀석을 괴롭혔을 게 뻔했다.

어른들이 소리 낮춰 했던 약속들이 아직도 귀에 선했다. 일족에게 내려진 저주를 혼자 몸으로 받아내 주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유사 이래 가장 고귀한 희생으로 기록될 것이다. 타고난 재생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오직 트런들만이 일족을 구원할 수 있다… 어린 트런들은 어른들의 이런 말에 그만 넋을 잃고, 자기를 놀려대던 녀석들의 눈빛이 존경의 시선으로 변하는 모습, 부족 전체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자신의 미래, 고귀한 희생에 대한 모두의 감사를 만끽하며 부와 명예를 누릴 나날에 대한 환상에 젖었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아이들의 괴롭힘만 안 당한대도 그게 어딘가.

그래서 트런들은 끔찍한 질병에 자기 몸을 내주기로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러고스크 부족은 마침내 질병을 벗어난 데에 기뻐하며 한마음으로 트런들을 경배했다. 문제는 그런 감사의 마음이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가족과 친지들조차도 트런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트롤이라 해도, 또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똑같은 질병을 앓고 있었긴 해도 시뻘겋게 벌어진 상처와 곪아 짓물러가는 살을 쳐다보는 건 고역이니까.

이 즈음해서는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는 편이 이런 지독한 따돌림보단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적어도 자기를 놀리던 그땐 곁에 다가오기는 했으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상념에 빠진 그를 홱 흔들어 깨웠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트런들이 몸을 돌리며 일어나 앉았다. 제단에 몸을 묶었던 끈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푸른 로브로 몸을 감싼 소환사 한 명이 그의 뒤에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두건을 깊숙이 눌러쓴 그의 얼굴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이 병의 치료법을 구하기 위해서." 트런들이 지친 목소리로 읊조렸다.

"치료법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면 어쩌겠나?"

"내가 그따위 거짓말에 속을 것 같아!"

"그대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났소, 트런들. 이 학회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후보자에 대한 건 모두 다 파악해 내는 게 리그니까. 그 질병에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놀라운 재생 능력 덕분에 자신을 희생해서 그 병이 다시 동족에게 퍼지지 않도록 막고 있지."

트런들이 코웃음을 쳤다. "뻔한 얘기만 계속할 거요? 이 뼈에서 떨어져 나가는 살덩이나 썩어들어가는 고약한 냄새는 바보천치라도 알 수 있는 거잖소. 난 트롤이지, 멍청이는 아니오."

"맞아, 하지만 그대가 모르는 게 있소, 트런들. 그대가 동족을 대표해 질병을 짊어졌을 때 그들의 몰락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말이지. 그대의 부족이 겪던 질병은 몸을 쇠약하게 만들긴 했지만, 결국 신체는 그 병에 적응하게 됐소. 그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줬고 늘 병마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 병이 재생과 치유의 능력을 키워준 뿌리가 됐던 거요." 소환사의 목소리는 어딘지 의사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래서 드디어 병마를 떨쳐내게 되자, 재생 능력도 함께 사라져버렸지. 이제 그들의 육신은 스스로 버틸 능력조차 없다고 봐도 무방하오."

소환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대의 일족은 그 의식을 통해 치유 받은 게 아니오. 오히려 피할 수 없는 절멸의 시기만 앞당긴 거라고나 할까."

트런들은 엄청난 사실에 압도당해 두 눈을 감았다.

소환사는 그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다시 묻겠소. 러고스크의 트런들이여, 동족에게 내려진 천형을 치유하기 위해 리그가 필요한 것이오?"

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 감은 눈앞에서 펼쳐졌다. 또다시 모두 똑같은 병마에 시달리는 동족의 모습. 더 끔찍한 운명을 피할 길은 이런 희생임을 모두에게 알려주는 자신의 모습. 마침내 모두들 트런들이 진정한 부족의 구원자였음을 깨닫게 될 바로 그 순간.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이 얼마나 순진해 빠진 상상인가 하는 깨달음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일족을 대신해 병마를 짊어지기로 선택했어도 그가 왜소하고 약해빠진 트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었지. 동족을 위한 희생 아니라 그 어떤 대단한 일을 한들 변하는 건 없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에 뒤틀린 미소가 지나갔다. "러고스크는 고통을 겪도록 둡시다. 그들이 내게 준 선물은 내가 간직할 테니."

"그렇게 하지요. 다시 묻겠소.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뭡니까, 치료법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면?"

"내가 찾아 헤매던 소위 ‘치료’라는 게 바로 이거였던 것 같소만."

"그래,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떻소?"

트런들이 오래 생각에 잠겨 있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난생 처음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소. 고맙군."

소환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라졌다. 이제 트런들은 긴 복도에 홀로 서 있고, 아까 들어왔던 길을 따라 지저분한 흙과 벗겨져 나간 살점들이 점점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트런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또 곪아 터진 살점을 우수수 떨구고 나서, 리그 오브 레전드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1] 오른의 배경 이야기에 등장하는 고대 트롤. 오른과의 술 빨리 마시기 내기에서 꼼수로 승리한 후 이긴 댓가로 자신의 보물 창고를 지킬 단단한 문을 만들어 달라고 했으나, 고지식한 오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 문'을 만들어 주었고, 창고의 문을 닫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안 그랩그럭은 결국 문을 열지 못해 창고 속의 보물들을 전부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