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 라틴어: Veturius Calv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미상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34년 |
전임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칼레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
동기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 |
후임 | 독재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
임기 | 기원전 321년 |
전임 | 루키우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
동기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 |
후임 |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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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카우디움 협곡 전투의 굴욕을 초래한 인물이다.2. 생애
집정관을 맡기 이전의 생애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현대 학자들은 그의 이름을 고려해 파트리키 가문인 베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었다가 평민 집안인 칼비누스 씨족에 입양되었을 것이며, 이는 호민관에 선출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 담겼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334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사람은 캄파니아에 칼레스 시를 새로 건설하고 2,500명의 시민을 이주시켰다. 또한 로마에 반기를 든 시디키니 족의 영토를 침공했지만 삼니움족이 대규모 병력을 차출해 시디키니 족을 도와주려 한다는 보고를 받자 귀환했다. 이후 원로원의 요구에 따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를 독재관에 선임했다.기원전 321년,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재차 선임되었다. 그들은 각각 2개 군단씩 총 4개 군단을 이끌고 삼니움족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삼니움인들은 가이우스 폰티우스를 지휘관으로 삼고 로마군에 대적했다. 폰티우스는 정면승부로는 로마군을 절대로 이길 수 없으니 유인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10명 가량의 삼니움 병사들을 양치기로 변장시킨 뒤 일부러 로마군의 진군로 주변에 양을 방목하게 했다. 로마군이 평범한 양치기로 여기고 불러다가 삼니움인들의 동향을 묻자, 그들은 삼니움인들이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아풀리아의 루케리아를 포위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두 집정관은 서둘러 루케리아로 가서 삼니움족을 완벽하게 섬멸하기로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2개의 도로가 아펜니노 산맥에서 루케리아로 이어졌다. 아드리아 해를 따라 있는 첫번째 도로는 평평하고 장애물이 없었지만 멀리 돌아서 가야 했기에 루케리아까지 가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카우디움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은 훨씬 짧아서 빠른 시일에 루케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두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고 산악지대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좁은 산길을 가다보면 중간에 풀이 무성하고 물이 잘 공급되는 평원을 만날 수 있었지만, 평원을 통과하면 루케리아에 이르기까지 좁고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고 한다.
두 집정관은 적이 도망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카우디움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로 가기로 했다. 로마군은 몇 시간 동안 좁은 길을 강행군한 끝에 평원에 이르렀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워서 휴식을 취한 뒤 행군을 재개했지만, 두번째 산길을 지나가던 중에 바위 덩어리와 도끼에 베인 나무 줄기로 앞길이 완전히 막혀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때 삼니움인들이 협곡 위의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군은 그제야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돌아가려 했지만, 첫번째 산길마저 막혔다는 것을 곧 확인했다. 그리하여 로마군은 협곡에 갇힌 채 훨씬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적에게 둘러싸여 궤멸될 위기에 몰렸다.
이때 폰티우스가 로마군에 전령을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로마군은 프레겔라스를 비롯한 삼니움의 영역에 세워진 모든 식민도시에서 철수해야 하며, 병사들은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튜니카만 입은 채 멍에[1] 아래로 기어가라는 것이었다. 두 집정관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고, 로마 장병들은 삼니움 전사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멍에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이를 거부한 로마 병사들은 가차없이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카우디움에서 맺은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보장하기 위해 장교 및 재무관들, 600명의 기병들을 인질로 넘겼다고 한다.
그렇게 수모를 겪고 로마로 귀환한 그와 카우디누스는 어떠한 공직 활동도 하지 않다가 새 집정관이 선출되자 원로원에 출석해 이 협약은 로마 시민들의 동의 없이 맺어졌기 때문에 무효이며, 따라서 전쟁을 재개하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적에게 거짓 맹세한 자신들을 삼니움에게 넘기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여 두 집정관을 삼니움인들에게 넘기며 협약이 파기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폰티우스는 그들의 인도가 위장된 것이라고 판단해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두 집정관은 로마로 귀환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