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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0:10:51

파비우스 전략

1. 개요2. 유래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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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혹시 한니발이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더라도 카르타고는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비록 트라시메네와 칸나이에서 승리했을지라도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지 못함으로써 전쟁의 승패가 일찌감치 결정되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는 것이 한니발의 전쟁 전략 가운데 최우선적인 목표이자 그가 성취하려고 했던 궁극적인 승리였던 것이다. 로마에게 승리를 안겨준 일등 공신은 자마 전투의 승자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니라 지연자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다. 그가 즐겨 사용한 지연과 고갈 전술이 한니발의 구도를 무력화시키고 로마의 막대한 전쟁 동원력이 가동될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지연함으로써 국가를 구했다.(cunctando restituit rem).
프리츠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현대지성, 2017), 341쪽
한 사람, 오직 그만이 지연 작전을 써서
우리 공화국을 부활시켰노라.
그는 자신의 명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조국의 안전만을 중히 여겼도다.
지금 그의 명성은 찬란히 빛나고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더 그의 명예는 고귀하게 되리니.
엔니우스, 연대기[1]

고대 로마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장군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와 관련된 일화이자 시사용어.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거두거나, 혹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끝끝내 이기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현대의 소모전, 지구전 전략의 모태이자 지향점인 셈이다.

"파비우스의 전략"은 아군이 큰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피로스의 승리에 빗대어 파비우스의 승리라는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다만, 그 뜻은 180도 다른데, 전투에선 승리해도 전략에선 실패했다는 것을 빗댄 '피로스의 승리'와 다르게, 비록 전투에선 패배할지언정 결국 대전략에서 승리하는 것이 바로 '파비우스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비우스의 승리'에 부합되는 가장 대표적인 전쟁이 바로 독소전쟁.

최근 현대전의 경우, 과거처럼 한정된 국지전이 아닌 국가 대 국가로써의 총력전으로 번지는 경향이 많아, 이러한 '파비우스의 승리'라도 노려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총력전의 경우 패배하면 국가를 비롯해 모든 걸 잃기 때문이다.

2. 유래

제2차 포에니 전쟁 초기인 기원전 217년, 알프스산맥을 넘어온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의 군대에 맞섰던 로마트레비아 전투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고, 이때 로마군을 지휘했던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도 전사했다. 로마 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임명했다.

로마군의 통수권을 위임받은 파비우스는 한니발 군대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식량징발대의 본대를 차단시키는 작전을 폈을 뿐 직접적인 싸움은 피했다. 지연작전으로 한니발 군대가 스스로 지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전략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파비우스는 일부러 전면전을 피하고 청야전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식량을 확보하려는 카르타고 군의 소규모 부대를 공격해 전멸시키거나 한니발의 본대와 떨어진 만만한 부대를 공격하는 식으로 대응하였다. 이런 전략으로 인해 가뜩이나 빈약한 보급 자체가 부족해진 한니발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쑤시면서 어쩔 수 없이 목표였던 로마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략적 요충지에서는 방어군이 유리한 지형에서 방어를 굳건히 하고 있었고, 이런 일련의 상황이 이어지면서 한니발 군의 사기와 전쟁 수행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의 장화에 해당하는 지방에서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전술에 휘말려 상당한 곤경을 치렀다. 파비우스의 전략은 한니발 스스로 말라죽게 하는 것이 목적인 지구전이었다. 한니발만 만나면 로마군은 맥을 못추고 패배하기 일쑤였지만 그렇기에 한니발과 굳이 싸우지 않고 그의 힘을 빼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 된다는 생각이었던 것. 싸우면 지니까 안 싸운다는 간단한 전술이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그의 전략을 나약하고 비겁한 것이라며 이해하지 못했다. 로마인들의 생각으로는 정정당당하게 맞서싸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했고, 한니발의 군단이 이탈리아 내부를 휘젓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들과 특히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시들의 피해는 매우 컸다. 지구전, 소모전 문서에 나오듯이 이런 식으로 전쟁을 질질 끌고 적의 힘을 빼는 전략은 반대 급부로 아군에게도 피로감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아무리 적이 무섭다지만 더 피해를 입기 전에 한번 싸우는게 더 낫지 않나?'라는 판단이 나오기 쉽다. 파비우스 외에도 불가피하게 이런 지구전 전략을 쓰다가 자국 여론의 반감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장수의 사례는 적지 않다.

그리하여 파비우스는 해임되고[3] 강경파가 정권을 잡았지만, 그 결과는 칸나이 전투의 대패였다.

칸나이 전투의 대패로 로마인들은 파비우스의 전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파비우스는 다시 독재관에 임명되어 지연전을 수행했고, 다시 한니발군은 지쳐갔다. 그리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히스파니아카르타고 공세가 성공하면서 전세가 일발역전되었고, 결국 로마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파비우스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쿤크타토르(cunctator)"[4]라며 비난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록 단기간에 결판은 나지 않았어도 그의 전략이 결국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어 "지연자", "굼뜬 사람" 등의 비난섞인 호칭은 "지구전주의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바뀌었다.

자세한 사항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참조.

3. 기타

갈리아 전쟁 당시 베르킨게토릭스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상대로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역 정복을 시도하다 여기에 맞서 로마군이 보급할 만한 마을이나 도시를 모두 초토화하고 주민들을 전부 이주시키는 것. 이 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카이사르를 패배 일보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카이사르가 퇴각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베르킨게토릭스 본인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로마군을 정면공격하는 뻘짓을 저질러버렸고, 곧바로 카이사르에게 박살난 뒤 알레시아에 갇혀 끝내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하고 항복, 전쟁을 순식간에 말아먹고 말았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런 뻘짓을 한 이유에 대해선 해석이 엇갈리는데, 계속해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면서 베르켄게토릭스 본인이 자만에 빠졌다는 설과, 반대로 휘하 부족장들이 자만해서 로마군과 일전을 벌이자고 주장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우려해 어쩔 수 없이 교전을 행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이후 카이사르와 대립하던 폼페이우스도 베르킨게토릭스와 똑같이 지연 전술을 펼쳐 재미를 봤고[5] 또한 베르켄게토릭스와 마찬가지로 급하게 결전을 서두르다 망했다.[6]

영국의 페이비언 협회가 파비우스의 전략을 정치에 적용 사민주의를 영국사회에 적용시키겠다는 정치운동이었다.


[1] 원문은 소실되었고 키케로의 의무론에만 남아있다.[2] 삼국지에 비슷한 일화가 나온다. 원소와 대결하느라 후방을 챙길 여유가 없던 조조가 유대와 왕충을 대신 보내 자신이 후방에 있는 척하면서 유비를 견제했으나, 우주방어로만 일관하는 걸 보고 조조가 없다고 간파한 유비가 유대와 왕충을 사로잡는다.[3] 한니발도 파비우스의 전략에 자군이 심히 고충을 받을것을 예상하여 약탈을 하되 파비우스의 영지는 건드리지 않은 반간계를 구사하였고 이게 제대로 먹혀서 파비우스가 한니발과 내통한다더라 라던가 파비우스가 일부 자기 영지만 지키고 있다는 음모론이 나왔다.[4] 직역하면 "굼뜬 사람", 의역하면 "굼벵이"라고 할 수 있겠다.[5] 폼페이우스는 여기저기 원정을 자주 다녔고 그 와중에 클레이엔테도 많았다. 이들을 이용해 카이사르의 보급과 진군을 어렵게 했던 것.[6] 로마인들이 파비우스를 닥달한 것처럼 갈리아의 부족장들은 베르킨게토릭스를 갈궈서 결전에 나서도록 했고 폼페이우스도 주변의 원로원 의원들이 폼페이우스를 닥달해서 카이사르와 결전을 할 것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