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鄱陽湖 船舶 失踪 事件중화민국 장시성 파양호에서 1945년 4월 16일 일본의 2,000톤급 운송선 고베마루 호가 실종된 후 파양호 상류 노야묘(老爺廟) 근처에서 수백여 척의 선박이 실종된 사건. 이른바 중국판 버뮤다 삼각지대 사건이라고도 한다.
2. 위치 정보
포양호(鄱阳湖; 파양호)는 장시성 북부, 장강 남쪽에 위치한 중국 최대[1]의 민물 호수다. 배들이 실종되는 곳은 중국에서 라오예먀오(老爷庙; 노야묘) 수역(水域)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포양호 중북단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주장시 두창현(都昌县) 경내에 해당한다. 라오예먀오는 포양호 동쪽 기슭에 위치한 사당 건물로 예전에는 포양호의 용왕에게 제사지내던 용왕묘(龍王廟)였다.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나라 시대에 주원장이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청나라 광서(光緖) 7년(1881년)에 '정강왕묘(定江王廟)'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왕작(王爵)을 받은 사람을 라오예(老爺)라고 불렀으므로 이후 이 사당의 이름은 쭉 라오예먀오로 불리게 된다.
3. 전개
1945년 4월 16일 일본의 2,000톤급 운송선 고베마루 호는 200여 명의 병사를 태우고 순조롭게 파양호 위를 항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파양호를 건너던 고베마루 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베마루 호가 사라진 파양호는 대단히 큰 호수로 그 면적만 무려 3,914km2에 달하며[2] 평균 수심은 8m 정도였다. 양쯔강과 연결된 파양호는 내륙에서 동쪽 해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수상 통로였고 수많은 배가 동쪽 해상으로 나가기 위해 파양호를 이용했다. 그런데 1945년 4월 16일 고베마루호가 중일전쟁 중 중국으로부터 약탈한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를 싣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파양호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파양호에서 일본군의 선박이 사라지는 사건이 또 다시 발생했지만 일본 정부는 정확한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고 단지 중국군의 게릴라 공격으로 고베마루호가 침몰당한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중국군과 일본군이 한창 중일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강서성 주변은 일본과 중국간에 치열한 전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으로 중국군에 의해 일본군의 배가 공격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파양호 일대는 완벽하게 일본군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중국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였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조난당한 고베마루 호로부터 배가 중국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바도 없었다. 일본 정부는 정확한 사고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야마시타 해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20명의 조사단을 파양호로 급파했는데 며칠 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양호로 갔던 대원들은 어디로 갔는지 야마시타 대령 혼자만이 돌아왔다. 야마시타 대령의 말에 따르면 20명의 잠수부 전원이 검은 안개에 휩싸여 실종되었고 자신만 빠져나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 고베마루호에 실린 보물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고 이에 보물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고베마루호의 잔해조차 찾을 수 없었고 실종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결국 일본군은 파양호를 잘 알고 있는 마을 주민들을 찾아갔지만 마을 주민들은 파양호를 '악마의 호수'라고 부르며 접근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던 중 마을 주민에게서 파양호의 전설을 듣게 되는데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약 2,000년 전 하늘에서 이상한 불빛이 내려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이후 호수를 지나는 배들이 검은 안개에 휩싸여 사라지는 일들이 발생했다고 설명했으며 이후 파양호를 '악마의 호수'로 부르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호수에 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고베마루호의 침몰 원인이나 침몰 지점 등 어떤 것도 밝히지 못한 채 고베마루호의 인양을 포기했다. 고베마루호 침몰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선박들이 사라지는 사건은 계속해서 발생했다.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까지 무려 200여척이 넘는 배들이 사라졌는가 하면 1984년 8월 3일 하루 동안에는 13척의 배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도 있었다. 이에 중국 정부까지 나서 실종 사건의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지만 그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4. 사고 원인에 대한 여러 주장
파양호에서 선박들이 없어지는 사건들을 면밀히 조사하던 중 한 가지 특징을 찾아냈는데 바로 파양호의 상류 지점인 노야묘(老爺廟) 지역에서 빈번히 발생했다는 것이다. 파양호는 전체적으로 조롱박 모양을 하고 있는데 노야묘 수역은 호수의 북쪽 조롱박 목 부분에 해당하고 있다.노야묘 수역의 총 길이는 24km에 달하고 강폭이 가장 넓은 곳은 15km, 가장 좁은 곳은 3km다. 바로 이 3km의 좁은 폭을 가진 지점에서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호수 면적이 넓은 파양호의 남쪽 부분은 유속의 평균이 초속 0.3m 이하인데 비해 북쪽에 위치한 노야묘 수역에 도달하면 그 폭이 좁아져 유속이 7배나 빨라진 초속 2m가 된다.[3] 게다가 노야묘 수역은 파양호에서 유일하게 강한 바람이 부는 곳으로, 초속 13m의 강한 바람이 불고 최대 풍속은 초속 51m에 달한다. 따라서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게 되면 입구 양쪽에 위치한 산봉우리들이 바람을 압축시키고 폭이 겨우 3km인 노야묘 부근에 이르면 풍속이 더욱 강해진다. 그리하여 지망 지 후어 박사는 "노야묘 일대의 빠른 유속과 강풍으로 인해 파도와 소용돌이가 발생했고 그 때문에 선박이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의 밀도가 선박 침몰의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이 주장은 중국과학원 남경 지리 연구소에 소속된 우징누 박사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우 박사는 "파양호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검은 안개란 지하에 형성된 틈을 통해 마그마와 가스가 새어나올 때 만들어지는 기포가 수면으로 올라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며, 과거에 이 검은 연기를 목격한 사람들이 검은 안개로 착각하면서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고 마그마와 가스로 인해 뜨거워진 호수 아래쪽 물과 수면에 있던 차가운 물이 밀도차에 의해 이동하게 되면서 급격한 대류 현상이 발생되고 이러한 갑작스런 대류 현상으로 그 위를 지나던 선박이 침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의 문제점은 바로 선박의 잔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 배가 침몰한 것이라면 호수 어딘가에라도 침몰한 배의 흔적이 보여야 정상인데 파양호에서 수백 여 차례 선박 실종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배의 잔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의문이다. 그러자 중국지질과학원 지질연구소 소속 론 징상이 박사는 "배는 전부 호수 밑으로 사라졌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호수 지하에 형성된 동굴이나 틈으로 선박의 잔해들이 빨려 들어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문제의 노야묘 일대는 모두 석회암 지대로, 바위에 칼슘 성분이 많아 물에 쉽게 녹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하에 수많은 동굴이나 틈이 형성되었고 그곳에 잔해가 들어간 것이라는 게 론 박사의 주장이다. 선박의 잔해가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동굴과 갈라진 틈 위로 두꺼운 모래층이 빠르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론 징상이 박사의 주장이 나온 지 얼마 후 실제로 파양호 밑바닥을 조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바로 2008년에 오랜 가뭄으로 인해 파양호의 물이 줄어드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중국 정부는 호수의 밑바닥을 조사하기 시작했지만 조사 결과 호수 바닥에 동굴이나 갈라진 틈이 존재한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5. 고베마루호 사건의 진실
상술한 고베마루호 실종사건은 사실 발생한 적이 없다. 해당 내용은 중국의 작가 슝젠화(熊建華)가 집필하여 1992년 중국의 잡지 켄춘리(墾春泥) 창간호에 실린 미스터리 문학작품이다. 슝젠화는 라오예먀오 사당에서 들었던 지역 전설을 기초로 하여 '중국의 버뮤다 삼각지대'를 컨셉으로 글을 썼는데 작품에서 창작된 정부 관계자, 전문가, 뉴스 기사들이 너무 그럴싸했는지 황색언론들이 이를 무분별하게 확대 재생산하면서 마치 실제 발생하였던 사건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전쟁에 영향을 줄 정도로 어마어마한 보물이 실려있던 배가 감쪽같이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다면 일본과 중국의 주류 언론에서 보도한 자료가 있어야 정상이지만 중국국민당 기관지 민국일보를 포함한 그 어떤 주류 언론에서도 보도한 바 없다. 슝젠화 본인도 실제 사건으로 포장되어 퍼지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실제 고베마루호는 1940년에 진수되어 나가사키와 상하이를 잇는 정기 항로에 투입되었던 화객선으로, 1942년 11월 11일에 상하이로 향하던 중 텐잔마루호(天山丸)와 충돌하여 침몰했다. 두 선박 모두 새벽에 항행하다가 전시 중 등화관제로 인해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충돌 원인이었다. 고베마루호 탑승자 746명 중 105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다.
참고 문헌: 바이두 백과 고베마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