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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22:37:54

판타인잔

<rowcolor=#ffffff> 반청간 潘淸簡
파일:반청간.jpg
출생 1796년 11월 11일
사망 1867년 8월 4일 (향년 70세)
담여(淡如)
양계(梁溪),매천(梅川)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문신이자 제후. 명명제(Minh Mạng Đế, 明命帝, 응우옌 왕조 2대 황제), 소치제(Thiệu Trị, 紹治), 사덕제(Tự Ðức, 嗣德) 등의 황제들을 보좌하면서 그들의 자문관으로 활동해왔다. 자는 담니으(Đạm Như, 담여, 淡如), 호는 르엉케(Lương Khê, 양계, 梁溪), 으억푸(Ước Phu, 매천, 梅川)이다.

2. 생애

1796년 11월 11일, 벤째 성의 화교 출신[1]의 하급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학문 공부에 열중하여 실력을 연마한 끝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고속승진을 거듭한 끝에 명명제의 자문관 역할까지 올랐다.

하지만 명명제와의 갈등으로 판타인잔은 명명제에 의해 일개 병졸로 백의종군을 당했다. 하지만 병졸의 신분으로 큰 공을 세운 덕분에 다시 조정으로 복귀되었다. 그리고는 명명제 사후에도 차기 황제들인 소치제와 사덕제의 자문관으로 일했다. 서부 3성의 땅을 통치하는 계홍왕의 직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바다 건너 프랑스의 침공이 시작됐다. 당시 베트남의 국력으로는 프랑스에 저항할 수 없기에 마지못해 제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 내용에는 동부 3성을 할양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에 판타인잔은 많은 백성들의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프랑스 파리를 갔다 온 판타인잔은 서구 문명의 진면모를 조금이나마 체험하게 되고 이후 프랑스에 대한 무조건적인 저항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측은 월경지가 된 서부 3성까지 집어삼킬 속셈이었고, 서부 3성을 침공한다. 서부 3성을 다스리던 판타인잔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병력의 질이 프랑스에 비해 까마득하게 후달리는 것을 깨닫고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긴 뒤 음독자살한다.

3. 여담

파일:attachment/흥선 대원군/man.jpg
문제의 사진

한때 흥선 대원군으로 추정되었던 화려한 관복의 인물의 정체가 이 사람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최병욱 교수의 지적 등을 보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제기되는 근거로는 판타인잔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수립 이전에 사망했는데 문제의 사진의 인물은 공화국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패용하고 있다는 것.

사실 대원군으로 추정되지 않았으면 그냥 베트남의 일개 관리에 불과했던 그가 한국에서 이런 관심을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로, 이 때는 아직 응우옌 왕조의 힘이 꽤 강했던 시절인데 3개 성이 판타인잔의 개인소유로 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이 때에 왕조의 분열이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1] 벤째 성은 베트남 남쪽 메콩강 하구에 위치한 지역으로써 이곳은 베트남 조정이 화교들에게 이주를 장려한 덕택에 많은 중국인 장사꾼들이나 관리들이 모여사는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