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0.742em; letter-spacing: -0.35px" | 기원전 509년 | 기원전 509년 보결 | 기원전 509년 보결 | 기원전 508년 | 기원전 50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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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560년 | ||
로마 왕국 로마 | |||
사망 | 기원전 503년 (향년 56~57세) | ||
로마 공화국 로마 | |||
재임기간 | 고대 로마 집정관 | ||
기원전 509년 3월 1일 ~ 기원전 509년 3월 3일 | |||
고대 로마 집정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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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이름 미상 | ||
자녀 | 2명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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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집정관.2. 생애
로마시의 저명한 귀족 집안인 발레리우스 씨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볼레수스 발레리우스이고 형제로 기원전 505년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볼루수스와 기원전 494년 독재관을 역임한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있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공직에 오르기 전부터 평민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귀족이어서 많은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혁명에 가담해 마지막 로마 국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추방하고 공화정이 수립되는 데 일조했다.이후 브루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세워진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가 타르퀴니우스 왕과 가까운 인척이며 타르퀴니우스를 복위시키려 했던 음모자들을 처형하는 과정에서 눈물을 흘린 일로 인해 민중의 의심을 사자 견디지 못하고 다른 도시로 떠나버리자, 발레리우스가 새 집정관으로 세워졌다. 그 후 타르퀴니우스 왕이 에트루리아인들의 지원을 받고 로마로 쳐들어왔고, 두 집정관은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자는 로마 인근 실바 아르시나 숲에서 맞붙었다. 이때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아룬스가 기병을 이끌고 있는 브루투스에게 결투를 신청하자, 브루투스가 응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어 격투를 벌이다가 동시에 서로의 가슴에 창을 찔려 죽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는 밤새 이어진 끝에 에트루리아군이 끔찍한 살육에 지쳐 달아나면서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발레리우스는 로마로 귀환한 뒤 네 말이 끄는 마차에 탄 채 개선식을 거행한 후 브루투스를 위한 장례식을 거행했다.
이후 발레리우스는 로마인들로부터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브루투스를 대신할 새 집정관을 조속히 뽑지 않고 원로원 의사당에서 눈에 띄게 보이는 벨리안 언덕 꼭대기에 화려하고 웅장한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은 왕으로 등극하려는 야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간에 이러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발레리우스는 사람들을 집회에 소집한 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나는 저번에 로마를 용감하게 해방시켰지만 지금은 왕이 되려 한다는 비방을 받고 있소. 나는 폭군을 가장 증오하는 원수였으니 왕이 되고 싶어한다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되오."
그리고는 공사를 중단하고 하룻밤 만에 구조물을 철거하게 했으며, 집정관을 호위하는 릭토르들에게 평소 소지해야 하는 도끼를 제거하게 했다. 그 대신 산꼭대기에 승리의 여신 니케를 기리는 신전을 세우게 했으며, 자신의 집은 산기슭에 조그맣게 짓게 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그가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풀었고, 그는 인민의 친구라는 뜻의 Poplicola 또는 Publicola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편 리비우스는 발레리우스가 치안판사가 국민에게 상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왕이 되려는 계획을 가진 사람의 신체와 재산을 신에게 바치는 법을 제정했다고 기술했지만, 학계에서는 후대에 그런 법이 도입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후 루크레티아의 아버지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 트리키피티누스가 발레리우스의 동료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가 며칠 만에 노환으로 사망했고, 마르쿠스 호라티우스 풀빌루스가 새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발레리우스의 지지자들은 호라티우스가 발레리우스와 같은 급이 된 것을 마뜩치 않게 여기고 그를 망신 주기 위해 호라티우스가 봉헌 기도를 하고 있을 때 방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발레리우스는 이듬해인 기원전 508년에도 집정관에 재선되었고,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의 형제인 티투스 루크리티우스 트리키피티누스와 함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기원전 507년에 세번째로 집정관을 역임했는데, 이때의 동료 집정관은 마르쿠스 호라티우스 풀빌루스였다.
기원전 508년 또는 507년, 쫓겨난 로마 국왕 수페르부스의 요청을 받은 에트루리아의 클루시움 통치자 포르세나(Porsenna)가 타르퀴니우스를 복위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로마로 쳐들어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발레리우스는 앞장서서 이들과 맞서 싸웠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로마시로 퇴각했다. 이후 로마 시에서 농성하던 그는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적 습격대를 소떼로 유인하여 로마에서 2마일 떨어진 비아 가비나까지 끌어낸 뒤 역공을 가해 궤멸시켰다고 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포르세나가 여러 패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포위를 풀지 않자, 가이우스 무키우스라는 청년이 포르세나를 암살하겠다고 자청했다. 발레리우스와 원로원의 승인을 얻은 뒤, 무키우스는 에트루리아 군영에 숨어들어가 급료를 지급받으러 줄선 에트루리아 병사들 틈에 끼여들었다. 포르세나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던 그는 한참 살펴보다가 유난히 화려한 옷을 입고 군인들에게 손수 급료를 전달하고 있는 인물이 포르세나라고 여기고 그를 공격해 죽였다. 그러나 그 인물은 포르세나가 아니라 서기관일 뿐이었고, 무키우스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무키우스는 자신이 로마를 구하기 위해 포르세나를 죽이려 했다고 당당하게 밝힌 뒤, 자신은 지금 죽지만 300명의 로마 젊은이들이 뒤를 이어 포르세나를 처단하러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옆에 피워진 모닥불에 오른손을 집어넣고 전혀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포르세나는 크게 놀라 무키우스를 로마 시로 돌려보냈고, 무키우스는 왼손잡이라는 의미의 스카이볼라(Scaevola)라는 코크노멘을 얻었다고 한다. 그 후 발레리우스는 포르세나와 직접 만나서 협의한 끝에 자기 딸 발레리아를 포함한 여러 인질을 클루시움으로 보내고 그동안 에트루리아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는 대가로 철군하게 했다. 그 후 에트루리아인들은 두 번 다시 타르퀴니우스를 위해 로마와 싸우려 하지 않았고, 타르퀴니우스는 죽을 때까지 에트루리아 각지를 전전하며 지냈다.
기원전 506년 형제 마르쿠스가 집정관을 맡고 있을 때 사비니인들이 로마를 침략해오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승리했고,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집을 보상으로 받았다. 기원전 505년 라틴 동맹과 사비니족이 대규모 군대로 로마를 위협하자, 그는 이번에도 군대를 지휘하여 로마 시를 포위한 사비니인들을 격파하고 사비니 귀족 아티우스 클라수스가 500명의 친족들과 함께 로마로 망명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아티우스 클라수스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사비누스 레길렌시스(Appius Claudius Sabinus Regillensis)로 개명하고 기원전 495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이 인물의 후손들은 로마 정계를 좌지우지한 유력 씨족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형성했다.
기원전 504년 4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어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트리키피티누스와 함께 임기를 수행했고, 사비니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2번째 개선식을 거행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듬해인 기원전 503년에 사망했을 때 전 재산을 국가에 봉헌한 터라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특별 세금이 전 시민에 부과되었고, 로마 부인들은 브루투스를 위해 행한 것처럼 공개적으로 애도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벨리안 언덕에 안장되었고, 1년 내내 애도되었다고 한다. 이후 아들인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가 기원전 475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발레리우스 씨족의 여러 저명한 인사들은 그가 묻힌 지점 인근에 대대로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