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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22:51:58

펑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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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c0,#3f3f3f> 제6, 7차 전국 정치협상회의 상임 위원
정체 馮友蘭
간체 冯友兰
한국식 독음 풍우란
영문 Feng Youlan
지생(芝生)
출생 1895년 12월 4일
청나라 허난성 탕허현
사망 1990년 11월 26일 (향년 94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직업 정치가, 교수, 철학자
종교 유교(신유교주의)

1. 개요2. 생애
2.1. 가계2.2. 초기 경력2.3. 중화민국 시절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초기2.5. 문화대혁명 시기2.6. 말년
3. 사상4. 저서5. 가족 관계
5.1. 여담
6.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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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교수, 철학자. "현대의 신유학자(New Confucianism)[1]"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1919년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가서 존 듀이, 버트런드 러셀의 영향을 받아 신유학 이론을 제시했고 귀국 후 칭화대학 등 여러 대학의 교수를 역임, 중국 철학사의 강좌를 담당하였으며 1939년 <신이학(新理學)>을 발표, 성리학에 독자적인 해석을 함으로써 자신만의 관념론 철학을 전개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1952년 10월부터 베이징대학의 철학과 교수이자 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서 활동했고 격동의 세월을 보내며 반동분자라는 매도를 수차례 당하고 그 자신도 자아비판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으나 끝내 살아남았다.

2. 생애

2.1. 가계

펑유란은 1895년 12월 4일 허난성 탕허현 치의진에서 태어났다. 풍씨는 현지의 명문 가문으로, 천여 무에 달하는 토지를 보유한 대지주였다. 그의 할아버지 풍옥문(馮玉文)의 자는 성징(聖徵)이며, 지역의 유지였다. 부친 풍대이(馮臺異)의 자는 수후(樹候)로, 1898년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탕허현 숭실서원 산장을 역임했다. 또한 어머니 오청지(吳清芝)는 탕허현 단본여학교의 학감(學監)이었다.

2.2. 초기 경력

1902년, 펑유란은 7살에 소학교에 가서 먼저 시경을 읽고, 다음에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읽었으며, 나중엔 상서춘추좌씨전을 읽었다. 이때 그는 서적을 다 읽은 후에도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해서 읽으며 암기했다. 1907년, 풍씨 가문은 전문 교사를 초빙해 펑유란의 교육을 담당하게 했고, 펑유란은 정규적으로 고문과 산수, 글쓰기 등의 교육을 받았다. 펑유란은 여가 시간에도 늘 아버지가 소장한 새 책이나 새 간행물을 읽으며 서구 사상과 접촉했다. 12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했다. 이에 그는 어머니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교사를 계속 초빙해 공부했으며 황종희(黄宗羲)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을 읽고 천문, 역법, 역사 등을 익혔다.

1910년, 펑유란은 모친의 권유에 따라 탕허헌 고등 소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봄에 중주공학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1912년 여름에 우창중화학교로 전입했고 그해 겨울에 상하이 제2중학교 고등학교 예과반 전입 시험을 치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당시 상하이 제2중학교는 모든 과목에 영어 원저 교재를 채택했는데, 한 교사는 <논라학강요>를 영어 독본으로 삼았다. 펑유란은 이 책을 읽고 형이상학 논리에 관심을 가졌고 철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1915년 9월 베이징대 문과 충국철학반에 입학한 펑유란은 비교적 체계적인 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18년 6월 베이징 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고 1918년 가을 후난 제일공업학교의 언문(语文) 수신(修身) 교원을 맡았다. 그가 베이징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 저명한 철학자 후스와 량수밍(梁漱溟)이 베이징 대학을 방문해 철학 토론회를 연 적이 있었다. 펑유란은 이 토론회에 참석해 중국과 서양 철학, 특히 중국과 서양 문화의 관계를 깊이 탐구했다.

1919년 5.4 운동이 발발해 중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그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몇몇 친구들과 함께 <마음의 소리(心声)> 잡지를 창간했다. 그는 발간사에 "잡지의 취지는 외국의 사상을 흡수하고 양심적 주장을 펴는 것"이라며 "사회, 교육상의 낡은 틀을 깨고 진보의 길을 재촉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1920년 1월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존 듀이로부터 교육받았다. 펑유란은 미국 유학 시기에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방법>과 <심력(心力)> 두편을 집필하여 중국 철학계에 베르그송의 철학 사상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베르그송의 철학 관점으로 <중국은 왜 과학이 없는가?>라는 글을 쓰면서 중국이 근대과학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이 어리석은 게 아니라 사회 자체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전통은 인간의 품성과 수양을 중시하고 지식과 권력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 철학은 내면을 추구하고 인간의 본성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 서양 철학은 자연을 인식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중, 서 철학의 서로 다른 이상과 추구가 중, 서 문화의 차이를 야기하고, 중국 근대 과학의 낙후된 상황을 야기했다."

또한 펑유란은 인도 출신의 저명한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만나 동서문화의 여러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담화 기록을 정리해 국내에 발표했다. 그리고 1921년 <동서문화 및 철학>을 출판하면서 중서문화 논쟁은 고금의 다툼이 아니라 문화가 만들어내는 '의욕'의 근본이 다른 것으로 간주했으며, 이를 이론의 기초로 삼아 논리를 전개했다. 한편 헝유란은 중국 철학자 량수밍의 저작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 학계에 소개하기도 했다.

1923년 여름, 펑유란은 졸업 논문을 제출해 무사히 통과했으며 이듬해 박사 논문을 출간하여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존 듀이 등의 지도 아래 박사 논문인 '인생 이상적 비교 연구'를 완성했다. 그는 이 글에서 세계 철학을 '손도(损道)', 이익, 중도(中道)로 분류했다. 그는 이 세가지 철학의 분기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에서 기인하며 인간은 "자연적인 것"과 "인공"을 경험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멸하며 인간과 관련이 없는 천역적인 사물이다. 반면 인공은 인간이 만든 것들인데, 자연에 위배되므로 그들의 존재는 인간에 의존해야 한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전하고 인위적인 것을 경계한 일부 서양철학의 논지가 중국 고대의 "절성기지(绝圣弃智), "절인기의(绝仁弃义)”, 절교기리(绝巧弃利)"를 주장한 도교와 같다고 여겼다. 또한 그는 인간의 경지를 아름답게 여기고 자연을 개조하고 정복하자는 서구 철학은 묵자의 논리와 같다고 주장했다.

2.3. 중화민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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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펑유란.

펑유란은 컬럼비아 대학교 졸업 후 캐나다를 경유해 중국에 귀국했고 초임 중주대 철학교수 겸 문과 주임, 철학과 주임을 역임했다. 1925년 가을광저우 중산대 교수 겸 철학과 주임을 맡았으며 1926년 옌징대 교수에 부임했다. 그후 1928년 가을에 칭화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1934년 문학원 원장을 겸임했다. 또한 펑유란은 1931년과 1934년 사이에 <중국 철학사>를 상하 2권으로 출판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유학의 독존과 정통성을 대대적으로 추앙했으며 서양철학자들에게 친숙한 관점에서 중국 철학을 소개하고 비평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34년, 펑유란은 프라하에서 열린 제8차 국제철학회의에 초청받았다. 그는 이 대회에서 "철학은 현대 중국에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회의가 끝난 후, 그는 "러시아 혁명 이후의 상황에 대해 천국, 낙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지옥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모습인지 직접 보고 싶다."며 소련을 방문했다. 그는 소련을 살펴본 후 소련이 지상의 지옥도, 천국의 낙원도 아니며 변화하는 인류사회에 불과하고 천국의 낙원으로 통할 수는 있지만 당장의 처지는 곤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국으로 돌아간 뒤, 펑유란은 두차례의 공식 강연을 가졌다. 한 번은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자유롭게 서술했고, 다른 한 번은 '진한 역사철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역사 유물주의의 일부 사상을 기본요소로 하는 '신삼통오덕론(新三统五德论)"을 제기해 사회적 계급에 대해 집중 조명했다. 이에 국민정부는 그가 공산주의를 설파한다고 간주하고 1935년 10월 말에 정치사범으로 규정하고 11월 초에 체포해 심문을 가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항의 시위가 열렸고 펑유란의 동료들은 그가 공산주의자가 결코 아니라는 투서를 보냈다. 결국 그는 심문을 받은 지 수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국민당의 통치에 순응했고 장제스가 펼치는 신생활운동에 지지를 표명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펑유란은 창사로 이동했다가 곧 쿤밍으로 자리를 옮겨 서남연대 철학과 교수이자 문학원장으로 재직했으며 1939년에 국민당에 가입했다. 쿤밍에 있던 시기, 그는 <신이학(新理學)>, <신사론(新事論)>, <신원인(新原人)>, <신원도(新原道)>, <신지언(新知言)>을 잇달아 출간했다. 펑유란은 서남연대 교수로 일하면서 국민당 고위층과 자주 교류했다. 1942년부터 수차례 충칭으로 가서 국민당 간부들 앞에서 강의했고 1943년 서남연당부의 명의로 장제스에게 '인심 수습'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후 1945년 중국 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펑유란은 주석단 성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최우수 교수당원 98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1946년 남서연대가 해산하자, 펑유란은 칭화대로 돌아갔다가 펜실베니아대의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가서 1년간 석좌교수로 일하면서 <중국철학 약사>를 출판했다. 그러던 중 그는 중국으로 귀국하려 했는데, 친구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대륙을 석권할 것이 확실하며 비공산주의자인 그가 가면 반드시 탄압받을 거라며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했고 칭화대 교수와 철학과 주임, 문학원장을 역임했으며 중앙연구원 초대 원사와 중앙연구원 평의회 3기 평의원에 올랐다. 1949년 국공 내전에서 패한 장제스가 대만으로 떠나면서 함께 가자고 요청했지만, 펑유란은 끝내 중국에 남았다.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초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때 펑유란은 마오쩌둥에게 "과거에는 봉건 철학을 강의해서 국민당을 도왔지만, 마르크스주의로 사상을 바꿔 5년 안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입장에서 중국 철학사를 다시 쓰겠다"는 서신을 보내 마오쩌둥의 허락을 받고 농장 노동과 자아 비판을 거쳐 1952년 10월부터 마오쩌둥의 베이징 대학 철학과에서 교수를 맡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정치협상회의에서 공산당원이 아닌 외부인사로서 정치에 참여했고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를 촉구했고 1955년 후스, 량수밍 비판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1957년 반우파 투쟁에 연루되어 '반동분자'의 수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마오쩌둥이 보호해주면서 무사할 수 있었다.

2.5. 문화대혁명 시기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펑유란은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문화혁명소조는 펑유란의 저술을 '반동', '봉건' 사상이 듬뿍 담겨져 있으니 부정되어야 마땅하다고 비난했고, 그는 외양간에 보내져서 노동 개조를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1968년 11월 18일 마오쩌둥이 "펑유란은 꼭 필요한 인재다."라고 발언하고 그를 복권시키면서 펑유란은 겨우 자유의 몸이 되어 베이징 대학으로 돌아갔다.

1971년 린뱌오가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달아나다가 몽골에서 추락사한 9.13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장칭4인방은 린뱌오와 공자를 규탄하는 명목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저우언라이를 실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펑유란은 4인방이 장악한 량사오(梁效)의 고문을 맡아 <공자 비판과 과거의 자신에 대한 자아비판>과 <복고주의와 반복고주의 두 노선의 투쟁에 관하여>를 출판해 4인방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1976년 9월 말 4인방이 실각하여 량사오는 철저히 청산되었고, 펑유란 역시 장기간 구금심사를 받았다.

2.6. 말년

펑유란은 1980년대부터 <중국 철학사 신편>을 집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중국 철학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나의 이해와 경험을 직접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 서적은 마르크스주의와 계급투쟁 관념을 비중있게 다뤘다. 1990년 11월 26일 펑유란은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향년 95세.

3. 사상

펑유란은 「철학과 철학사에 대한 의견(對於哲學及哲學史之一見)」에서 철학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정리한다. 그는 “사람은 태어나면서 욕구를 가지고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좋다고 한다”고 정리하면서 인간은 좋지 않은 것(evil)을 피하고 이상적인 인생을 추구하는데, 이것이 바로 철학의 용도와 목적이니 이상적인 인생을 추구하는 것, 바로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중세를 거치면서 철학과 종교의 구별, 과학과의 구별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며 과학 연구는 여전히 현상 세계에 국한된다고 보는 칸트, 베르그송과 이와는 달리 과학적 기계주의, 객관적 진리, 미와 선의 존재를 주장하는 스피노자 등과 같이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또한 철학은 good을 추구하고 과학은 true를 추구한다고 여겼다.

펑유란은 각종 학설의 목적은 경험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를 세우는 것으로, 그 방법은 논리적으로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논리와 과학방법을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과학과 논리학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세 분야로 나누면서, 현재의 언어로 나누어본다면 우주론, 인생론, 지식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정리한다. 특히 우주론이 달라지면 결국 그에 따른 인생론도 달라지고 철학은 이상적인 인생을 추구하면서 우주론과 세계관을 정립하려 하니 반드시 과학을 종합하여보게 된다고 했다.

또한 중국철학에서는 지식 문제를 중요한 철학 문제로 여기지 않았지만, 이것이 중국철학이 철학으로 이해되기에 커다란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펑유란은 중국에는 비록 구미의 정교한 형식적인 체계의 철학은 없을지 모르지만, 마치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통해 그의 철학을 알 수 있듯이 중국 전통사상에도 실질적 내용으로서의 체계는 존재한다고 여겼으며, 중국철학 연구의 과제는 형식적으로는 체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중국사상에서 실질적인 철학의 체계를 분석해 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펑유란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역사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실재 존재했던 역사 본연의 모습인 실재로서의 역사와 그러한 활동에 대해 역사가에 의해 서술된 역사가 있다고 봤다. 또한 펑유란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철학과 역사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역사는 바로 철학의 실현이며 철학은 역사의 정신이다."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철학은 하나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철학은 그 자신의 특별한 정신을 가지고 특별한 면모를 보인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 시대, 한 민족에게는 각자 그들의 철학이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세계에는 ‘철학’이 없다. ‘한 학파’의 혹은 ‘한 시대’의 철학이 있는 것으로 ‘철학’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것과 같다. 장차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역사가 있은 후에 지금까지 세계에는 ‘철학’이란 없었으며 오직 ‘여러 철학들’만이 있었다. 현재 철학가들이 세운 도리들을 모든 사람이 그것이 옳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고, 옛 철학가들이 세운 도리들을 모든 사람이 그것이 옳다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반드시 한편으로는 철학사를 연구하고 이를 통해 각 위대한 철학체계가 세계와 인생에 대해 세운 도리들을 보고, 또 한편으로 실제의 세계와 인생을 직접 관찰하면서 스스로 도리를 세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펑유란은 역사와 서술된 역사의 구별은 철학사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실제로서의 철학사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서술된 철학사이며 이러한 철학사의 근거 자료들 역시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 때문에 연구자들은 가능한 원시자료를 통해 그러한 한계성을 극복하려고 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사실 간의 선후·인과 관계를 고찰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펑유란의 독창적인 철학 '신이학'은 전통 유교사상의 핵심 방법론이라고 할 격물지치(格物致知)를 구미의 논리분석 방법과 개념으로 치환하고 논리적 이해를 통한 깨달음을 자신의 철학체계의 핵심 통로로 삼았다. 그는 우선 “사람들은 이(理)의 지식을 가리켜 개념이라고 한다”, “사물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개념에 의지해야 한다”고 정의했다. 또한 칸트가 "지각 없는 개념은 빈 것이며, 개념 없는 지각은 맹목적이다."라고 서술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개념은 빈 것일 수 없다고 비판한다.
"하나의 이름의 지식은 경험 속에서 인증을 얻는 것으로, 그것을 통해 그 이름이 대표하는 개념과 그 개념이 대표하는 이치(理)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경험과 개념이 연합하여 의의를 가지며 이러한 이름과 경험이 연합하게 되니 비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인증을 얻은 사람은 그러한 경험과 이름에대해 일종의 활연관통(豁然貫通)의 이해를 가지게 된다."

즉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체험적·실질적 경험의 합치를 거쳐 비로소 진정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에 대해 후스는 펑유란이 신비주의에 빠졌다며 비판했지만 펑유란은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이 바로 '중국 철학'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철학은 무엇 때문에?’와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없으니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인생은 왜 무엇 때문에 있느냐?’와 같은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고 보았다. 철학이 이야기하여야 할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일인지를 알아보는 것이며, 우리가 그러한 것에 대한 이해가 생길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의의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해는 개념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이러한 이해를 진행하는 자각은 일종의 심리 상태로, 우리가 이해의 활동을 할 때 우리 자신이 깨어 있는 명각(明覺)한 상태를 바로 자각이라고 한다고 보았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의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방법론과 관련하여서는 필머 노스럽(Filmer Stuart Cuckow Northrop, 1893∼1992)의 관점을 인용하면서 개념에는 두 유형이 있으며, 하나는 직관을 이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중국철학은 직관의 개념을 사용하고 이것이 바로 부(負)의 방법이고, 구미철학은 가설의 개념을 사용하고 이것이 바로 정(正)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또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는 특히 중국의 도가, 불교와 같은 경지에 관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언설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그것은 무엇이 아니다와 같은 부정적 정의를 통해서 다가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중국의 도가와 불교의 선종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미의 신비주의는 여전히 덜 신비주의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펑유란은 이와 달리 논리 분석의 방법은 형이상학의 정(正)의 방법론으로 보았다. 이 부분이 바로 중국철학 영역에서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장차 중국철학은 점점 이성주의 논리 분석적 연구 방향으로 다가가야 할 것이며 구미철학은 조금 더 신비주의 쪽으로 다가가면서 상호 보완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즉, 그는 중국철학의 신비주의적 요소는 구미보다 더 멀리 나아간 것이며 상대적으로 중국철학의 논리 분석적 요소는 구미보다 부족한것이니 향후 두 철학적 방향이 서로 상호 보완하며 좀 더 통합된 세계 철학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펑유란은 이러한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중국철학을 바라보며 자연, 공리, 도덕, 천지의 네 가지 경지(境界)를 제안한다. 이러한 경지는 인륜과 일용생활 속에서 개인의 각성(覺解)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펑유란이 제기한 이 네 가지 경지는 각성(覺解)의 많고 적음을 통해 자연·공리·도덕·천지의 경지로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자연의 경지에서 사람은 아무런 이해 없이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지만 공리의 경지에서는 자신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고 도덕의 경지에서는 자신을 버리고 도덕적 목적을 위해 행동하며, 마지막 단계인 천지의 경지에서는 천지와 하나가 되어 자신이 천지간의 한 사물이면서 천지간의 일들을 행하는 최고의 경지라고 보았다.

펑유란은 유심론에서 언급하는 우주의 마음 및 우주의 정신과 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 역시 감각의 대상으로서 형이하학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우리의 지식은 감각에서 시작되며 감각의 대상은 사물과 사물들 모두 형이하학이다. 우리는 감각의 대상에 대해, 사물들에 대해 이지적 분석을 가하고 그것을 통해 형이상학을 알게 된다. 사물에 대한 분석은 ‘격물(格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분석을 진행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을 알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치지(致知)’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펑유란은 존재의 본연의 모습을 진제(眞際)로, 자연의 모습을 실제로 구분하면서 진제가 실제를 포함하는 것이며 진제는 철학의 관념·명제·추론·형식논리를 포함하면서 반드시 실제와 경험에 국한될 필요는 없으며 이를 넘어설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그는 실제에 치중할수록 과학에 가까워지며 진제에 치중할수록 철학에 가깝다고 보았다. 이러한 펑유란의 사상을 주광친(朱光潛)은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했다.
"진제는 시간과 공간 일체를 초월하는 이(理)이며 실제의 최후의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것은 기(氣)이다. 진제의 모든 이치의 전체를 가리켜 태극이라고 하며 무극(無極)은 물질의 기초이니 모든 것은 무극에서 태극으로, 기에서 리로 형상화하여 간 것으로, 이것이 바로 실제 세계이며 진정한 철학의 대상은 형이상학, 즉 진제에 대한 이해다."

4. 저서

펑유란은 일찍이 자신이 일생동안 집필한 작품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삼사고금(三史釋古今), 육서기정원(六書紀貞元)>으로 분류했다. 삼사는《중국철학사》,《중국철학 약사》,《중국철학사 신편》 등 세 권의 중국 철학사 저작이며 육서는 '정원 6서', 즉 신이학, 신세훈, 신원인, 신원도, 신지언 등 여섯 권의 철학 저작이다.

《중국철학사 하책》은 각각 1931년, 1934년에 완성되어서, 서방 철학의 개념으로 최초로 완성한 중국 철학사 저서이다. 그 중 많은 개념은 이미 정설이 되어서, 이른바 중국 현대 철학사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철학 약사>는 1948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수업할 때 만든 영어 서적이다. 이 책은 10여 개 국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권의 서적을 판매했다. 현재 이 책은 서양 각국 대학의 중국 철학사 수업에 꼭 필요한 교과서이자, 서방이 중국 철학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입문서로 꼽히고 있다.

《중국 철학사 신편 7권》은 펑유란이 84세부터 집필을 시작해 죽기 직전인 1990년에 완성한 대작이다. 그는 이 시기 매년 수차례 병원에 입원하는 등 몸상태가 안 좋은 상태에서 제자가 대신 쓰고 자신은 구술하는 방식으로 책을 집필했다.

《정원육서》는 《신이학》, 《신세훈》, 《신사론》, 《신원도》, 《신지언》으로 나뉜다.《신이학》은 그의 총요강으로, 후 5권은 각 장절에 속하는 것으로, 주로 순수 철학을 논한다. 《신세훈》은 사회관으로, 새로운 이학 관점이 사회 문제에 응용되는 것이다. 《신사론》은 생활 방법론과 도덕 수양론이다. 《신원인》은 인생철학으로, 인생을 네 개의 경계로 나눈다.《신원도》는 철학사관으로 중국 철학의 발전상을 분석하였다. 《신지언》은 방법론으로, 중서 철학사의 경험을 총결한 것이다.

그의 저서는 현재 《삼송당전집》 총 15권에 수록되었다.

5. 가족 관계

아내 임재곤(任载坤)의 자는 숙명(叔明)으로, 1894년 3월 28일 허난성 신차이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상하이 제2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14년 동창생의 소개로 펑유란과 면담했다. 이후 두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진전되어 1915년에 약혼했다. 이후 임재곤은 당시 중국에서 최고의 여성 명문학교로 알려진 베이징 여자 사범학교에 입학했고 1918년 여름 베이징 여자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펑유란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펑유란은 23살, 임재곤은 24살이었다. 이후 그녀는 평생 펑유란과 함께 했다가 1977년 가을에 사망했다.

장녀 펑종롄(冯钟琏)은 서남연대 어국어과를 졸업했고 베이징 중학교 국어교사로 일했다. 1975년에 사망했다.

장남 펑종랴오(冯钟辽) 랴오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보일러 전문가로 일하다가 미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현재까지 미국인으로 살고 있다.

차녀 펑종박(冯钟璞)은 중국의 유명 작가이며 차남 풍종월(冯钟越)은 중국 항공 우주공업부 주임 엔지니어, 비행기 제작 전문가였으나 51세에 사망했다.

5.1. 여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특별히 좋아했던 철학자였다

중국 특사는 왜 박근혜 만나 펑유란을 말했나?
가족끼리 손을 잡고 나들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하는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그런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내가 강해져야 했다. 그리고 그 힘은 수많은 철학서적을 읽고, 사색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그때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바로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다.”

6. 참고 문헌



[1] Neo-Confucianism이 아님에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