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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17 00:00:31

프리들링겐 전투



파일:Plan_der_Schlacht_bei_Friedlingen.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2년 10월 14일 프라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프리들링겐에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밀어내고 전장을 장악하긴 했지만 상대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2. 배경

1700년 11월 1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사망했다. 카를로스 2세는 죽기 전 루이 14세의 외손자이며 자신의 이복 누나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1]를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이에 대해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열강들은 필리프가 스페인 국왕이 되면 프랑스에게 귀속되면서 가뜩이나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야욕으로 가득찬 루이 14세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장될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곧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 대공[2]를 내세웠다.

이후 양측은 첨예한 갈등을 벌이다가 1701년 7월 1일 이탈리아의 카르피에서 벌어진 전투를 시작으로 장장 14년에 걸친 전쟁의 막이 올랐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독일의 연방 국가들은 대부분 제국의 우두머리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를 지지했지만, 바이에른은 프랑스를 지지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 지휘관인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은 프랑스군과 바이에른군이 합세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켰다. 9월 30일 랑다우 요새를 공략한 오스트리아군은 라인강을 따라 남하해 바이에른 방면으로 진군했다.

한편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랑다우 요새를 포위한 적을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빌라르는 랑다우 요새를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9월 4일 헌팅겐으로 진군한 뒤 2천 명을 헌팅겐에 남겨 요새를 건설하게 하고 라인강 건너편 프리들링겐 마을으로 가기 위해 다리 건설 작업에 착수했다 10월 10일 프리들링겐에 접근한 루트비히 빌헬름 장군은 적이 이미 도착해 방어 태세를 갖춘 걸 보고 감히 적을 공격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프리들링겐 마을 인근에 자리를 잡고 적이 도하하는 걸 요격하기로 했다.

당시 빌라르는 헌팅겐에서 라인강을 따라 30km 거리에 각각 두 개의 다리를 건설했다. 하지만 강 건너편에 오스트리아군이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이라 다리를 건너던 중 적의 역공을 받을 시 막대한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만 한시바삐 바이에른군과 합세해야 했던 그로서는 오스트리아군을 돌파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그는 많은 피해를 무릅쓰고 도하를 감행하기로 결심하면서 프리들링겐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10월 13일 밤, 빌라르는 야음을 틈다 상당수 병력을 헌팅겐과 프리들링겐의 경계선에 위치한 슈스터 섬에 배치시켰다. 그 후 10월 14일 이른 아침, 그는 이 병력을 이끌고 라인강 상류의 개울을 따라 도하시킨 뒤 숲을 경유해 프리들링겐 마을에 주둔한 적을 기습하려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 척후병들은 적의 이같은 움직임을 간파하고 오전 8시에 지휘부에 알렸고, 루트비히 빌헬름 장군은 즉시 병사들에게 참호를 파고 단단히 수비하라고 지시하고 기병대에겐 적의 측면을 요격하라고 명령했다.

오전 11시경, 적의 진영이 시야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빌라르는 포병대에게 적지를 향해 포격을 퍼붓게 한 뒤 보병대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 보병대는 명령에 따라 적진을 향해 돌격했지만, 이미 방비가 되어있던 오스트리아군은 이에 격렬하게 저항했고, 예비로 남겨뒀던 부대들까지 가세해 역공을 가하면서 프랑스군의 공세는 갈수록 약화되었다. 한편, 제국군 기병대는 프랑스군 보병대 측면을 지키고 있던 프랑스 기병대를 습격했고, 프랑스 기병대는 혼란에 빠진 채 패주했다. 이에 프랑스 포병대가 적 기병대를 향해 포격을 가했고, 독일 기병대는 물러섰다. 뒤이어 프랑스 포병대가 적 보병대를 향해 포격을 가하자, 그때까지 프랑스 보병대에게 역공을 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보병대 역시 주춤했다.

빌라르는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보병대 대열에서 벗어나 기병대와 합세한 뒤 그들을 평원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더 많은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 보병대를 향해 돌격을 개시했고, 빌라르가 떠나 자신들을 이끌어줄 지휘관이 부재했던 프랑스 보병대는 공황 상태에 빠져 패주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강 건너편에 있던 프랑스군이 두 개의 다리를 건너 대열을 갖추자, 루트비히 빌헬름은 더이상의 공세를 중단하고 프리들링겐 마을에서 방어 태세를 갖춘 뒤 10월 15일 새벽 극비리에 철수했다. 이렇게 해서 프리들링겐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랑스군은 프리들링겐 전투에서 1703명이 전사하고 2601명이 부상당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는 335명 전사, 742명 부상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이 철수한 뒤, 빌라르는 10월 15일 프리들링겐 마을에 입성했다.

루트비히 빌헬름은 적 보병대를 완전히 물리치고 전장에서 5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다가 철수했기에 자신이 이겼다고 주장했고, 빌라르는 제국의 많은 깃발을 확보했으며 아군의 깃발은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이유로 프랑스군의 승리를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양측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상대보다 훨씬 많은 손실을 입고 적이 철수하는 걸 저지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군은 결과적으로 적이 도하하는 걸 방해하지 못해 바이에른군과 합세하는 걸 허용해 버렸기 때문이다.
[1] 훗날 펠리페 5세[2] 훗날 카를 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