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08:47:58

플람스 운동

1. 개요2. 특징3. 상징4. 전개
4.1. 언어차별부터 언어평등법 통과까지4.2. 왈롱운동의 발생과 지역갈등 점화4.3. 양차세계대전과 플람스 운동의 급진화4.4. 레오폴드 3세의 귀환 여부4.5. 언어경계 설정과 뢰번 가톨릭 대학교 소요 사태4.6. 연방제와 그 이후
5. 참고 자료6. 관련 문서

1. 개요

플람스 운동은 19세기 벨기에의 언어차별에 의해 시작된 네덜란드어권 정체성 운동이다. 현대 벨기에의 정치는 플란데런 운동과 왈롱 운동 대립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벨기에의 정치 뉴스를 접할 때는 플람스 운동과 왈롱 운동을 알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2. 특징

초기 플람스 운동은 언어의 평등만을 요구했으나 현대 플람스 운동의 기본 이념을 요약하면 "우리끼리" "잘 살자"이다. 이게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급진화된 이후 광속으로 우경화되었기 때문에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진다.위 특징은 주로 플람스의 강성 민족주의자들나 민족주의 정치인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플란데런의 모든 정치인과 모든 플란데런인들이 위 특징을 전부 다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3. 상징

파일:플란데런 전투 깃발.svg
플란데런 민족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깃발[1]
역사적으로 플람스 운동가들은 노란 바탕의 흑사자 깃발을 사용해왔다. 해당 깃발은 나치 부역기 논란이 있다. 주로 프랑스어권에서 지적을 많이 하는데 플람스 운동가들은 이런 경우 보통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 이 깃발은 나치 부역기가 맞다. 그런데 당신들도 비슷한 걸 했지 않느냐?" 식으로 대응한다.

이 깃발은 정당 차원에서는 주로 N-VA플람스의 이익 같은 강성 민족주의 성향의 정당이 많이 사용한다.

4. 전개

4.1. 언어차별부터 언어평등법 통과까지

« Les premiers principes d’une bonne administration sont basés sur l’emploi exclusif d’une langue, et il est évident que la seule langue des Belges doit être le français. Pour arriver à ce résultat, il est nécessaire que toutes les fonctions civiles et militaires soient confiées à des Wallons et à des Luxembourgeois ; de cette manière, les Flamands […] seront contraints d’apprendre le français, et l’on détruira ainsi peu à peu l’élément germanique en Belgique. »
"좋은 행정의 기본원칙은 단일 언어의 독점적 사용에 근거한 것이며, 벨기에인의 유일한 언어는 프랑스어가 되어야 함이 명백하다. 이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민간업무와, 군무를 왈롱인과 뤽상부르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 이 방식으로 플란데런 사람들은 프랑스어 학습이 강제되며 이로써 우리들은 벨기에의 게르만적 요소를 서서히 파괴할 것이다."[2]
샤를 로지에, 1832
헌법에 적힌 선택적인 언어 사용은 표면적인 것이었고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어만이 유일한 공용어였다. 프랑스어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북부지역 주민들은 법정에서 사형을 포함한 불리한 판결을 받곤 하였다. 이에 1840년대에 플람스 운동이 발생하였고 1845년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네덜란드어의 공용어화였고 1873년 형사재판의 네덜란드어 사용 허가를 시작으로 1889년 언어평등법 통과로 목적을 달성하였다.

4.2. 왈롱운동의 발생과 지역갈등 점화

플람스 운동을 본 남부지역은 1870년대를 기점으로 이에 대응하기 위해 왈롱운동을 전개한다. 이들의 목적은 네덜란드어 사용의 반대였는데 1889년 언어평등법 통과 이후 남부지역의 프랑스어 수호로 전략을 수정한다.

1912년 총선에서 북부지역 의석의 상당수를 가톨릭 세력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북부 가톨릭 세력은 플람스 운동의 중심이었는데 남부 지역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은 겐트 대학교의 플람스화를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북부지역의 자극과 남부지영의 불안감은 두 진영의 싸움에 불을 지폈다. 왈롱운동 세력은 왈롱 프랑스어 플란데런 이중언어라는 구호를 걸고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대응은 플람스 운동 급진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4.3. 양차세계대전과 플람스 운동의 급진화

1차 세계대전 때는 플란데런의 독립을 위해 독일제국의 편을 든 이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패전 이후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북부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인들은 각종 법을 입법 혹은 개정하여 네덜란드어 사용 비율을 늘리는 쪽으로 장려해왔다. 대표적으로 1921년에 겐트 대학교의 프랑스어 강좌 비중을 확 줄이고 네덜란드어로 대체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네덜란드어 사용 비중이 늘어나 1930년대에는 오늘날에 가깝게 언어경계가 짜여졌다. 이 시기의 브뤼셀의 언어화자 수는 프랑스어 화자 수가 네덜란드어 화자 수를 역전한 이후기 때문에 훗날 플란데런에서는 이를 "프랑스어 화자들이 플란데런에 기름 때를 묻혔다"고 표현했다.

2차 세계대전 때도 주로 북부지역의 나치 부역자가 많았다. 이는 이후 양쪽 진영간의 나치 부역자 사면갈등으로 이어진다.

4.4. 레오폴드 3세의 귀환 여부

나치에 항복했던 국왕 레오폴드 3세의 귀환 여부를 묻는 투표를 개시했다. 대체로 플란데런, 가톨릭, 시골 주민들의 찬성비율이 높고 반대로 프랑스어권, 사회주의 자유주의 및 공산주의자들, 산업 및 도시지역 주민들이 대체로 반대했다. 투표는 57.68% 찬성이었지만 각 지역의 찬성비율은 플란데런 72%, 브뤼셀 48%, 왈롱 42%였다. 어쨌든 찬성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국왕이 돌아오긴 했으나 격렬한 반대시위를 이기지 못하고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다수결에 의한 결정을 소수의 시위에 의해 엎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플람스 운동 진영에게 큰 앙금을 남겼다.

4.5. 언어경계 설정과 뢰번 가톨릭 대학교 소요 사태

1960년대에는 남북부 지역 중 언어 사용인구가 다른 지역 몇개를 재조정하는 작업을 했다. 브뤼셀 경계가 확장되지 않아서 프랑스어 화자가 교외에 거주하는 경우 난감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언어시설로 땜빵했다. 플란데런 측은 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진 않기 때문에 이후 BHV갈등으로 이어진다. 또한 공용방송인 BRT/RTB는 RTBF와 BRT로 분리된다.

1967년에는 반프랑코폰 시위인 뢰번 가톨릭 대학교 소요사태(뢰번 플람스)가 일어났다. 이 시위 이후 KU 뢰번과 UC 루뱅이 분리된다.

4.6. 연방제와 그 이후

플람스 운동의 이념은 플란데런 정치 전반에 스며들었다. 특히 N-VA플람스의 이익 같은 민족주의 정당들이 분리주의나 극우성을 갖고 있거나 극우 이념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네덜란드어권 공영방송인 BRT가 BRTN을 거쳐 VRT가 된 것도 플람스 민족주의의 영향이다.

현재는 플람스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정당들의 지지도가 높다. 원래는 다소 온건한 성향의 N-VA가 높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극우 정당인 플람스의 이익이 약진하고 있다. 벨기에 연방정부는 플란데런의 정당들과 상의하여 구성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에 대해 특히 프랑스어권 정당들의 우려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급진화된 플람스 민족주의는 대학가에도 스며들어 각종 인종차별, 성차별 사고가 나오기도 한다.

5. 참고 자료

6. 관련 문서


[1] 플란데런 사람들은 이 깃발에 대해 민족주의라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프랑스어권 사람들은 이 깃발에 대해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한다.[2] 당시에는 지역이라는 개념 보다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의도로 Wallons(왈롱)과 Flamands(플라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프랑스어를 포함한 오일계 방언을 쓰는 사람들과 네덜란드어와 그 계열 방언을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