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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4 13:26:09

플레벤 공방전

1. 개요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벌어진 전투 중 하나로 플레벤 행진곡이 만들어진 배경으로 유명하다.

2. 발단

오스만 제국 영토 내 발칸 반도에서 반란이 심해지자 서양 열강은 자치권을 주는 것을 권고했으나 오스만은 요구를 거절했고 발칸 반도 내 영향력 확대를 원한 러시아 제국이 전쟁을 선포해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 제국은 1877년 4월 루마니아에 돌입해 해방시켰고, 이에 오스만은 다뉴브 강변에 병력을 골고루 배치해 방어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시스토바에서 4개 군단을 상륙시켜 강을 건너버렸다.

다뉴브 강을 돌파한 러시아군은 코스탄티니예를 향해 무섭게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오스만 누리 파샤는 6일간의 강행군 끝에 11,000명의 군대와 54개의 포를 이끌고 러시아군의 진격루트 중 하나인 플레벤이라는 작은 마을에 참호를 파고 수비에 들어갔다.

플레벤은 6개도로가 통하는 교통전략거점이었고 이곳이 뚫리면 발칸 산맥을 그대로 통과, 콘스탄티노플까지 직통으로 열리기에 반드시 지켜야 했다.

3. 전투 과정

7월 20일 8600명의 러시아 제국군 1개 사단이 플레벤에 당도해 공격해 3000명의 병사를 잃는 손상을 입었다.[1] 이후 오스만군은 지원병력이 도착해 22,000명과 59문으로 증원됐다. 이후 니코폴리스 요새를 돌파한 크루데네르 장군이 35,000명의 병력과 176문의 포를 끌고 도착해 7월 30일 공세를 가했지만 오스만군 2,000명을 죽이는 대신 7,300명을 잃고 플레벤엔 당도하지 못했다.

러시아군의 공세가 실패한 이유는 오스만 제국은 크림 전쟁 이후 서방에서 무기를 들여와 연발소총형태의 영국제인 피바디-마티니,미국제인 윈체스터1866로 무장했고, 이 무기들은 당시 러시아 제국군의 무기인 베르당, 크므카 등의 소총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1.6km 밖에서 목표물을 맞출수 있으면서 장전과 발사속도도 빨랐다. 게다가 러시아군이 현대식 전술을 무시하고 전통적인 착검돌격을 선호한 점도 공성전의 특징을 고려하면 큰 피해가 나올수 밖에 없었다.

두 차례 공세에서 물러난 러시아 제국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이곳을 우회하면 쉬프카 협로를 통해 코스탄티니예로 진군하는 러시아군에 측면공격을 허용하게되고, 본토에서 루마니아를 거쳐 공급받는 보급에도 악영향을 줄수 있었다. 재빨리 플레벤을 함락시켜야만 했다.

이후 러시아의 차르인 알렉산드르 2세가 당도했고, 8월과 9월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증원군이 계속 들어왔지만, 반면 오스만은 다른 전선에서 상황이 나빠지면서 당분간 자체병력으로 버텨야만했다.

1877년 9월 11일 러시아군은 알렉산드르 2세의 세례기념일에 맞춰 84,000의 병력으로 세 방면에 걸쳐 공격했으나 15000명을 잃는 참패로 이어졌다. 그나마 좌익에서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그뿐이었고 결국 퇴각해야만했다.

세 번의 공격이 실패로 끝난 러시아군은 작전을 바꿔 플레벤을 포위했고 모든 보급,통신망을 차단시켰다. 11월 중순 러시아-루마니아군은 오스만군과 5일간 산발적인 전투를 펼쳤고 보급을 받지못한 오스만군은 피해가 늘어가고 있었다. 11월 13일 러시아군의 니콜라스대공이 항복을 권했으나 거절했다. 플레벤을 지원할려는 오스만군의 시도도 무산되며 더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변해갔다. 결국 오스만군은 항복과 탈출 중 후자를 선택해 소피아 방면으로 탈출을 시도하나 1차 방어선만 돌파했을뿐 6000명의 병사를 잃으며 돌파에 실패하고 결정적으로 오스만 파샤가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단 루머가 퍼지며 사기가 떨어졌다. 결국 12월 10일 오스만 누리 파샤는 자신의 검을 러시아군에 건네며 항복했고 플레벤은 정복당했다.

4. 전투 이후

오스만 누리 파샤는 러시아 차르를 접견한뒤 러시아로 호송됐고 병사들은 수용소로 보내져 15000명만 살아남고 나머진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 곳을 돌파한 러시아는 1878년 2월 코스탄티니예 근방까지 도달했고 산 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승리했지만 조약이 가혹했단 유럽 열강의 개입으로 베를린 회의가 열리며 전쟁에서 흘린 피를 대비해 이득을 얻진 못했다.[2] 결국 원래 목적이던 오스만 제국 붕괴는 실패했고, 일부 슬라브족 국가들이 독립한 것에만 만족해야했다.


[1] 반면 오스만은 50명의 사상자를 냈다.[2] 오히려 전쟁을 안한 영국이 키프로스를 먹고 오스트리아도 보스니아를 자기들 세력권으로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