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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pin Karlmann | ||
출생 | 777년 4월 | |
아헨 | ||
사망지 | 810년 7월 8일 (향년 33세) | |
밀라노 | ||
재위 기간 | 781년 - 8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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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왕조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이탈리아 방면 대리 통치자 겸 군사 지도자로 활동했다.2. 생애
777년 4월 아헨에서 카롤루스 대제와 앙글라크가우 백작 게롤트의 딸 힐데가르트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초기에는 카를로만(Karlmann)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지만, 781년 4월 15일 로마에서 교황 하드리아노 1세에게 세례를 받고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피핀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는 생애 초기에 파비아에 거주하면서 코르비 수도원의 수도사인 아달하르트의 교육을 받았다.15살 때인 791년, 아바르족과의 전쟁을 단행한 아버지의 곁을 따르다가 분견대를 맡아 드라우 계곡으로 진입해 판노니아를 초토화했다. 그러나 원정은 색슨인들의 반란으로 인해 도중에 중단되었다. 이후 피핀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복종하지 않는 베네벤토 공국의 대공 그리말트 3세를 굴복시키기 위해 베네벤토로 쳐들어가 각지를 약탈했지만 베네벤토 공략에 실패했다.
795년 프리울리 변경백 하인리히와 슬라비치 공작 보이노미르를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파견해 반지 모양으로 지어진 아바르 요새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게 했다. 이듬해 피핀이 친정하여 두번째 '반지' 요새를 정복하고 아바르족을 확실히 제압했다. 이때 챙긴 막대한 전리품을 아헨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냈고, 머시아의 오파 왕을 포함해 프랑크 왕국에 우호적인 외국 군주들에게도 배포되었다. 익명의 중세 시인은 그가 아바르족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시 <De Pippini Regis Victoria Avarica(피핀 왕의 아바르 승리에 대한 시)>를 지었다.
797년, 피핀은 바이에른, 롬바르드 부족과 힘을 합쳐 슬라브인의 영역을 황폐화했다. 뒤이어 799년에는 아버지의 색슨 원정에 동행했다. 800년, 피핀은 아버지로부터 베네벤토 공략을 재차 지시받았지만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말트 3세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실패했다. 802년 카롤루스 1세의 결혼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던 동로마 여제 이리니가 폐위되고 니키포로스 1세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 이에 카롤루스 대제는 806년 전쟁을 선포하고 아들 피핀에게 전쟁을 맡겼다. 그러나 동로마 함대 지휘관 니키나스가 북부 아드리아 해에 나타났을 때, 해군이 없었던 그는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다. 니키타스는 달마티아를 순조롭게 통제한 뒤 베네치아 석호를 연이어 확보하고 그 지역의 최고 관료인 오벨레리우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피핀은 니키타스와 평화 협약을 맺고 그들이 807년 여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니키포로스 1세와 카롤루스 대제 모두 승인을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809년 케팔로니아 공작 파울로스가 또다른 함대를 베네치아 해역으로 이끌었다. 이에 코마키오의 프랑크군이 항전했고, 동로마군은 다소의 피해를 입고 새로운 합의를 시도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하자 물러났다.
베네치아측 사료에 따르면, 피핀은 이 시점에서 베네치아 주민들이 동로마 제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여기고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베네치아를 급습했다. 주민들이 석호로 피신하자, 그는 넓은 바다에서 남쪽 석호로 진입하여 석호를 보호하는 긴 모래톱을 건너 펠레스티나의 알비올라까지 진입했지만 물 수위가 너무 낮아서 수많은 배가 좌초된 데다 주민들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결국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고 한다.
반면 프랑크 왕국 측 연대기에 따르면, 피핀은 성공적으로 베네치아를 공략했지만 아드리아 해 상류에 나타난 동로마 함대가 압박해오자 철수했다고 한다. 베네치아 공략전을 치른 직후인 810년 7월 8일, 피핀은 돌연 밀라노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 샤를마뉴는 806년 디덴호펜에서 사후를 대비한 제국 분할안을 작성했는데, 이에 따르면 피핀은 바이에른과 이탈리아, 남부 알레마니아, 라에티아를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으면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의 사이에서 적장자 또는 사생아인[1] 베른하르트를 낳았다. 베른하르트는 풀다 수도원에 있다가 15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뒤 812년 할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이탈리아로 보내진 후 이탈리아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4년 1월 28일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적자 루도비쿠스 1세가 제국을 온전히 물려받고 베른하르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은연중에 내비치자 베른하르트가 이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프랑크 제국은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 기록이 부족해서 정식 결혼을 통해 얻은 아들인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