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콘신 주지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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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986><colcolor=#fff> 제27·29대 위스콘신 주지사 필립 라폴레트 Philip La Follette | |
본명 | 필립 폭스 라폴레트 Philip Fox La Follette |
출생 | 1897년 5월 8일 |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 | |
사망 | 1965년 8월 18일 (향년 68세) |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 | |
재임기간 | 위스콘신 주지사 |
1931년 1월 5일 ~ 1933년 1월 2일 | |
1935년 1월 7일 ~ 1939년 1월 2일 | |
선수 | 3 |
대수 | 27, 29 |
정당 | |
학력 | 위스콘신 대학교 (문학사·법학사) |
가족 | 로버트 M. 라폴레트 (아버지)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 (형) |
배우자 | 이자벨 베이컨[1] |
자녀 | 로버트 라폴레트 (외아들) 주디스 라폴레트 (장녀) 셰리 라폴레트 (차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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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라폴레트 가문의 일원으로 제27대 및 29대 위스콘신 주지사직을 역임하면서 1930년대 위스콘신 정계를 주도했다.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위스콘신 주 매디슨에서 로버트 M. 라폴레트와 벨 케이스 라폴레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로버트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법조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후 아버지, 형과 마찬가지로 위스콘신 대학교 법학과에 다녔지만 병 때문에 대학교를 중퇴한 형과 달리 문학과 법학을 복수전공하면서 1919년엔 문학사, 1922년엔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정작 아버지처럼 공부엔 별 관심이 없고 정계 진출을 위한 다른 것들에 관심이 많으며 훗날 아내가 될 동급생 여자친구인 이자벨 베이컨과 매일같이 연애편지나 주고받는 한량 생활을 했다고 한다.[2]아버지와 형이 1차대전 참전 반대 운동으로 불명예를 떠안자, 가족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 판단한 그는 다른 가족들이 모두 뜯어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1917년 11월 육군 단기사관으로 자원입대를 신청한다. 이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1년만에 소령으로 현지임관한 뒤 전역하며, 귀국한 뒤 라폴레트 가문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상황 속에서 학업을 마치고 정계 진출을 위한 여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아버지를 돕기 위해 주로 미네소타에서 연설을 통한 지지율 확대를 시도했던 그는 이후 귀중한 정치적 자산이 되어줄 농민노동당과의 연줄을 마련했으며, 비록 아버지는 대선에서 낙선했지만 본인은 라폴레트 가문의 근거지인 데인 카운티에서 지방 검사직에 당선되는 데 성공한다.
1925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인 벨 케이스가 위스콘신 연방상원의원직을 물려받으라는 제안을 거절하자, 상원의원직 후보는 필립과 그의 형인 라폴레트 주니어로 좁혀졌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자 필립은 미련 없이 상원의원직을 형에게 넘겨주었으며, 대신 자력으로 정계에 입성하기 위해 실력을 키워나갔다.
라폴레트 주니어가 가뿐히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한 1928년,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위스콘신에선 로버트 라폴레트의 오른팔이었던 허먼 이컨(Herman Ekern)과 같은 진보당 구파 인사들이 현역으로 활동하기엔 슬슬 늙지 않았냐며 인적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었고, 필립은 이러한 사회적 흐름과 형의 정치적 성공이라는 자산에 힘입어 자신을 새로운 피로 포장, 당시 위스콘신 정계에 얼마 남지 않은 공화당 강건파(Stalwarts) 소속 정치인이자 현직 주지사인 월터 J. 콜러 시니어를 문자 그대로 압살하고 자력으로 정계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2.2. 주지사
주지사에 당선된 그는 미국 최초로 실업수당을 지급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농업, 제조업을 비롯한 여러 산업 분야에 긴급 구호를 실시하는 기금을 조성하는 등 훗날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민간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 CCC)을 비롯한 여러 뉴딜 정책의 내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고 평가한 다양한 정책을 실시해 지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산업계에서도 필립은 아버지 로버트에 비해 비교적 고른 지지를 받았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정책이 공산주의에 유화적인 것이 아니라 상류층부터 하류층까지 다양한 계층을 동시에 구호하기 위한 긴급 조치라고 홍보한 것이 잘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버트 라폴레트가 철도계 트러스트 혁파를 위해 창설했던 철도위원회를 다양한 산업 분야 전반으로 확장하기 위해 준비한 그의 야심찬 계획인 공공서비스위원회(Public Service Commission, PSC) 법안이 산업계 및 기성 정치인들의 반발로 부결되자, 역풍을 우려한 그는 1932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포기하고 비록 민주당원이지만 자신과 성향이 비슷해 정책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앨버트 G. 슈메데만에게 순순히 주지사직을 넘겨준 뒤 아내와 함께 1933년 유럽으로 외유를 떠났다. 당시 그 대신 선거에 출마한 월터 콜러는 슈메데만에게 탈탈 털리고 이후 다시는 정계에 진출하지 못했기에, 이는 옳은 판단이었음이 드러났다.
유럽을 여행하며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등등 다양한 파시즘 지도자들을 만나본 그는 그들의 독재적이고 군국주의적인 대의에는 별로 공감하지 못했지만, 대신 포퓰리즘적이고 강력한 행정부 권한과 리더십을 주장하는 내용에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3개월만에 위스콘신으로 돌아온 필립은 미국을 떠날 때에 비해 더욱 급진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고, 1934년 주지사 선거에선 민주당의 '특별한 양해'를 얻어 공화당을 몰아낸다는 기치를 앞세운 채 재선에 성공했다.
권좌를 되찾은 후, 필립은 1기 임기에 비해 더욱 급진적이고 일부는 독재적이라 비판할 정도로 강경한 태도로 여러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 지역 법조인들이 통과시킨 법안이 너무나도 적음을 꼬집으면서 주지사나 대통령 같은 행정부 요직에 앉은 이들은 자신들의 강력한 권한을 바로 이럴 때 사용해야 한다 주장해 주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으며, 뉴딜 정책에 대한 호평을 등에 업고 다양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필립은 전직 위스콘신 연방하원의원인 톰 암리(Tom Amlie)가 지역 노동단체, 농민, 사회주의자, 기타 다양한 진보 성향 단체들을 연합해 조직한 농민노동진보연맹(Farmer Labor Progressive League, FLPL)과 협력 관계를 맺고 곧 그들을 위스콘신 진보당으로 재조직, 공화당에 잔존해 있던 진보파 인사들과 지역 진보당 인사들을 끌어들여 강력한 지도력과 대중 동원능력을 손에 넣었으며, 그 외에도 아버지처럼 보수 정치인들이 담당하는 지역구에서 투표 명부를 공개적으로 낭독해 망신을 주는 방식으로 반대파를 제압하고 여러 개혁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등 경력을 계속해서 쌓아올렸다.
한편, 필립과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겉으로는 뉴딜 정책의 적극적 시행을 위해 협력하는 화목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물밑에선 계속해서 충돌을 벌이고 있었다. 비록 필립은 FDR 행정부에 대한 압박 수위를 조절하면서 자신이 얻어낼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의 구호 예산을 순순히 받아내고 '소 와그너 법안'이라 불리는 위스콘신 노동관계법이나 '소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법'이라 불리는 위스콘신 개발공사법 통과에서 민주당의 협력을 확보하는 등 여전히 중앙정부와 협력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가 위스콘신에서 잘 집행되는 정책에 행정부가 굳이 개입을 시도하거나 수정을 요구하는 등 간섭이 지나치고 자신에게 수동적 태도를 강요한다고 불만을 품은 반면 루스벨트는 루스벨트대로 필립이 너무 많은 재량권을 요구한다면서 꺼렸기 때문에 서서히 양자 간의 균열이 확대되었다.
2.3. 국민진보당 운동
1930년대 후반 미국에선 휴이 롱의 사망 이후 흐지부지된 포퓰리즘 제3당 운동을 재건하자는 목소리가 중서부 진보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커져가고 있었고, 필립 또한 1937년 주의회 특별 회기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이 자신을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독재적이라며 몰아붙여 여러 개혁 법안의 통과가 거의 실패 직전까지 몰린 상태에서 양당 체제의 전면 개편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또한, FDR 행정부의 친개입주의, 재정보수주의적인 성향도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필립과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제3당 수립에 대한 공감대가 계속해서 커졌다.||<tablewidth=66%> ||
국민진보당 당대회에서 연설하는 필립 라폴레트의 모습. |
1938년 3월 28일, 필립은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큰 업적을 세울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반FDR, 반개입주의, 반공적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국민진보당(National Progressive Party)을 창당했다. 하지만 제2의 휴이 롱을 생각나게 하는 필립의 급진적, 어쩌면 반민주적이라 보일 수 있는 정책 집행 방식은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찬반 양론을 형성시켰고, 특히 당 로고가 하켄크로이츠를 연상시킨다는 주장[3] 때문에 혹시 필립이 제2의 히틀러가 되려는 것이 아니냐는 루머가 돌면서 여론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국민진보당 운동이 다른 가족들에게도 '싸우는 밥의 이상을 더럽히지 말라'며 반대당하면서 필립은 크나큰 좌절을 겪게 되었다.
결국 1938년 중간선거에서 어떤 자유파 및 진보파 소속 유력 정치인에게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 국민진보당은 단 한 명의 후보도 당선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 당수인 필립 자신마저도 공화당의 정치인인 줄리어스 P. 헤일에게 낙선하면서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어야만 했으며, 이후 필립은 다시는 중앙 정계에 재진출하는 것을 노리지 않게 되었다.
2.4. 이후
정계 은퇴 이후 미국우선위원회에 가입하고 반루스벨트, 반개입주의 라디오 선전을 실시하는 등 필립은 강경 반전주의 운동에 참여했지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태도를 바꿔 미국우선위원회를 즉시 탈퇴한 것은 물론 나이가 많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재입대를 관철했으며, 필리핀 철수 이후 남태평양으로 파견될 더글러스 맥아더의 휘하에 들어가 중령 계급으로 그의 부관직을 역임했다. 맥아더의 리더십에 감명을 받은 그는 죽을 때까지 그와 정치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으며, 중서부의 여러 진보 정치인들을 맥아더에게 소개시켜주는 역할 또한 맡았다.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고립주의적 성향을 유지한 라폴레트 주니어와 대다수의 진보주의 정치인들에게 기회주의적인 배신 행위로 받아들여졌고, 형제 간의 관계는 라폴레트 주니어가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다시는 온전히 복구되지 못했다. 두 사람은 1943년 3월 가족농장을 매각해 수익을 나눠가지는 것으로 관계를 청산했으며, 이후 라폴레트 주니어의 장례식 날까지 필립이 그를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1946년 위스콘신 연방상원의원 공화당 경선에서 필립은 형에게 선거유세 지원을 제안하면서 자신이 형제 관계를 회복할 의사가 있음을 드러냈지만, 깊이 상심한 상태였던 라폴레트 주니어는 이를 거절했고 두 사람의 화해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위해 맥아더가 GHQ에서 일하는 동안 국내에서 열심히 선거 준비를 도왔으며, 맥아더를 '단 한 명의 진정한 지도자'라고 지칭하는 등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파시즘 지지자에 가까운 언행을 보여 갈수록 점점 더 주류 진보주의자들에게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맥아더는 대권에 도전하기는커녕 경선 후보로 지명되지도 못한 채 끝났고, 1953년 라폴레트 주니어가 자살하자 더욱 상심한 그는 대외활동을 삼가고 두문불출하다가 1965년 자연사했고 매디슨 포레스트힐에 위치한 가족묘지에 묻혔다.
3. 여담
- 형인 라폴레트 주니어에 비해 아버지의 성격을 더 많이 물려받아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웅변 실력을 보유했으며, 학창 시절엔 여러 차례 웅변 대회에서 상을 탄 적도 있다. 이 때문에 전성기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국구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기에 형보다 더 적합한 인재로 여겨졌다.
또한, 형수인 레이첼이 순종적이고 정치엔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던 것과 달리, 그는 어머니처럼 정치에 관심이 매우 많고 진취적이었던 대학교 동급생인 이자벨 베이컨과 결혼했다는 점에서도 아버지를 닮은 면모가 나타난다. 전기에 의하면 이자벨은 '천부적인 정치적 수완가'로서의 능력을 보유했으며, 필립의 정책 결정에 상당한 관여를 했고 벨 케이스가 죽은 이후엔 그녀의 자리를 물려받아 라폴레트 위클리의 편집장직을 역임했다.
- 라폴레트 주니어와의 형제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다. 일단 라폴레트 주니어를 형으로서 존중하긴 했고 정책 수행에서도 뛰어난 협력을 보였지만 정치적 성향이 달라 부모님이 모두 사망한 이후 자주 다퉜으며, 1934년의 위스콘신 진보당 창당 당시엔 공동 당수직을 맡는 것으로 합의하긴 했지만 라폴레트 주니어가 창당 자체를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필립이 그를 언쟁 끝에 '굴복'시켜야 했다.
- 죽을 때까지 더글러스 맥아더와 매우 긴밀한 사이였다. 맥아더의 강렬한 리더십에 감명받아 그를 '미국의 진정한 일등시민'으로 추켜세우기까지 했으며, 개인적인 우상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후 맥아더를 대선 후보로 추대하려 했지만 1948년엔 듀이, 1952년엔 아이젠하워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되면서 실패했다.
- 아버지 로버트가 베니토 무솔리니를 독재적이고 언론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과 달리, 그를 좋은 정치인이라고 칭찬했으며 둘이서 사진을 찍고 사인까지 받은 적이 있다. 다만, 무솔리니가 대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쟁취한 이후에도 강압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게 보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전체주의적 지도자들을 낭만화하고 개혁을 위해 입법 절차를 우회하는 강경 수단도 불사해 같은 진보주의자들로부터 '우익 극단주의자'라는 비판까지 받는 등 그가 파시즘에 대해 불호를 표했음과는 별개로 뒤가 구린 면이 많은 인물이다. 이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굉장히 중시했던 라폴레트 가문 내에서 이단아적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가족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겉도는 편이었다.
- 라폴레트 주니어는 반영주의자였지만, 그는 친영주의자였다. 1933년에 유럽 여행을 시작할 때 영국을 첫 방문 국가로 선택했는데, 당시 영국에서 집권중이던 램지 맥도널드 내각의 노동당 정치인들이 자신을 위대한 진보주의자인 로버트의 아들로서 오히려 미국인들보다 더 잘 대우해준 것이 특별히 좋은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영국 정부가 그를 왕립학회에 초대해 진행한 연설을 통해 월도프 애스토어(Waldorf Astor), 조시아 스탬프(Josiah Stamp)와 같은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지닌 의원들과 친분을 쌓았다.
- 승마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그가 여덟 살 때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졸랐던 선물도 자신이 탈 조랑말이었으며, 어릴 적부터 승마 실력으로 정평이 나 위스콘신의 지역 신문에 승마 신동 특집 기사로 실릴 정도였다.
- 라폴레트 주니어가 조숙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폴라와 잘 어울린 것과 달리, 필립은 막내 여동생인 메리와 더 잘 어울렸다고 한다. 서로 활달한 성격과 승마 취미가 잘 맞았다는 모양.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30 | 미국 주지사 선거 | 위스콘신 | | 392,958 (64.76%) | 당선 (1위) | 초선 |
1934 | 미국 주지사 선거 | | 373,093 (39.12%) | 재선 | ||
1936 | 미국 주지사 선거 | 573,724 (46.38%) | 3선 | |||
1938 | 미국 주지사 선거 | 353,381 (36.00%) | 낙선 (2위) |
[1] 1923년 결혼, 1963년 이혼.[2] 다만, 이는 그의 학창시절에 아버지 로버트가 전국적으로 증오를 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1차대전 참전 회의론이 퍼지면서 대규모 재평가가 일어날 훗날과 달리 이 시기의 로버트는 '미국에서 가장 증오받는 사내'로 불릴 정도로 비판받고 있었고, 이는 아들인 필립 또한 피해갈 수 없었다. 필립은 동급생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교수들로부터 외면받은 것은 물론 심지어 성난 군중이 대학교 캠퍼스 안으로 들어와 그의 모형을 불태우는 시위까지 하는 등등 온갖 험한 꼴을 당했으며,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학창시절을 보내지 못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한다.[3] 실제로는 X는 부를 곱셈으로 늘리는 것을, 푸른 원은 정치적 및 경제적 평등을 의미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는 하켄크로이츠를 베낀 것으로 보였고, 훗날 필립은 이러한 로고를 채택한 것을 '자신의 생애 최대 실수'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