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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2 17:41:52

하희옥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0년 9월 24일
평안도 용강현 산북방 국안리[1]
(현 평안남도 온천군 용월리)
사망 1978년 12월 7일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485호
본관 진주 하씨
부모 아버지 하동식, 어머니 김씨 부인
형제자매 5남 7녀 중 차남
자녀 아들 하문덕, 하현덕[2]
딸 하현자
친인척 손자 헨리 하[3], 외손녀 베이다 킴[4]
소속 흥사단
서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3. 사후
3.1. 불법이장 논란
4. 여담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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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독립자금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0년 9월 24일 평안도 용강현 산북방 국안리(현 평안남도 온천군 용월리)의 농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하동식과 어머니 김씨 사이의 5남 7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세까지 고향 서당을 다니다가 1908년 광동학교, 의명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그후 도산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1912년 북간도로 건너가 간민회 등 독립운동단체 결사대로 활약하였다.

1915년에는 만주 무관학교[5]에 입교하였으나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아 그만두고 친구의 권유로 1916년 5월 한병선, 백낙준 등과 동행하여 상해에서 배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다. 일본인 농장에서 콩밭 매는 일과 포도농장 품팔이에 종사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상항지방회에 신입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917년 7월 로스엔젤레스에서 장이욱과 도산 안창호와 재회한 후 흥사단에 입단을 권유받아[6] 같은 해 12월 7일 입단하였다. 한편, 그해 9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은행채 보상 발기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18년 10월에는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 식자기계 청장을 위한 동맹자 모집책으로 활동했다.

1919년에는 오하이오주 애크런으로 이주하여 그해 1월 15일 대한인국민회 애크런지방회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구제원으로 취임했으며, 1921년에는 뉴욕으로 이주하여 뉴욕지방회 서기에 취임했다. 1924년부터는 시카고로 이주하여 그해 12월 재설치된 시카고지방회 재무에 취임하여 1928년 시카고지방회 구제원, 1933년 시카고지방회 부회장, 1934년 시카고지방회 법무,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시카고지방회 총무, 1939년 재차 구제원을 맡아 1940년까지 역임했으며,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시카고지방회 실업위원을 역임했다.

사업에 소질이 있었던 하희옥은 뉴욕과 시카고 등지에서 1925년부터 1947년 사업을 접을 때까지 약 20년간 향료공장 경영을 하며 수 차례에 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1949년 12월에 흥사단 서무원 및 총무로 뽑힌 후 1950년 1월부터 1963년까지 흥사단 미주위원부의 자금관리를 도맡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내에 있는 동포를 위해 수 차례 모금활동을 하여 구제금과 구호품[7]을 보내기도 했다.

여생을 그리운 고국이서 보내기 위해 1967년 6월 12일 귀국하여 사위인 김영찬(전산은 총재)의 집에 거주하며 스승인 도산 안창호의 유훈을 계승하고 전파하는 활동을 하였다.[8]

3. 사후

201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3.1. 불법이장 논란

2020년 10월 7일 보배드림 커뮤니티(아이디:묘원지기)에 공원에서 고급묘지로 사용하기 위한 리모델링을 하면서 하희옥 지사의 묘를 불법이장하고 비석을 파괴했다는 폭로글이 올라왔다. 특히 이장한 곳이 산비탈에 봉분은 물론이고 아무런 표지석도, 잔디조차 깔지 않은 공터에 공익제보자가 사비로 비석을 세워놓지 않았다면 아무도 묘지인지 모를 정도로 황폐한 곳이였기에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고, 해당 사실을 취재한 것이 MBC 실화탐사대에 2020년 10월 24일[9] 방영되었다.

공원측에서는 반박자료를 공원 홈페이지에 올리고, 공익제보자를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고발하였다. 이에 공익제보자는 보훈처 등 관계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공익제보자를 도와 하희옥 지사의 현충원 안장작업을 진행하던 독립유공자 강제희 지사의 손자가 공익제보자 보호를 각계각층에 호소하였다.

공원측 주장이 모두 맞다 하더라도 현충원에 안장되아야할 독립유공자의 묘비를 부수고 산비탈에 표지석도 없이 아무렇게나 이장해버린 점, 공원측에서 조금만 신경썼어도 불법파묘 논란 없이 해결할 수 있었던 점,[10] 도산의 유훈을 잇는다는 사업이념을 강조하면서 도산의 애재자 중 한 명이며 도산의 뜻을 잇기위해 평생을 바친 하희옥 지사의 묘를 묘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에 이장해버린 점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11][12]

해당 사건이 2020년 10월 15일과 22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장에서 거론된 이후 MBC실화탐사대에서 찾아낸 하희옥 지사의 손녀와 DNA 검사 후 하희옥 지사의 묘가 맞다면 유족의 동의를 얻어 현충원으로 이장을 하려는 작업이 추진 중이다.

2021년 1월 20일 현충원 이장이 승인 되었다.

2021년 3월 3일 묘 개장을 시작으로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5묘역에 안장되었다.#@ 국내유족을 찾아 지사님의 묘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준 독립유공자 강제희 지사님의 손자의 요청으로 국내유족분들이 안장식을 이날로 결정하게 되었다.

한편, 보훈처는 대통령표창이 추서된 독립유공자의 사망일이나 묘의 위치같은 기본적인 정보조차 모르고 있다가 공익제보자가 공원측으로부터 고발당하면서까지 하희옥지사 묘 불법파묘사건을 알리고, 언론에서 하희옥지사의 후손을 찾고, 유동수 국회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질타한 후에야 겨우 움직여놓고는 홍보글에는 그런 전후 사정을 다 빼놓고 자신들의 활동 결과인것처럼 써서 비판을 받았다.[13]

공익제보자의 희생으로 외로이 버려진 독립유공자 하희옥 지사를 무사히 대한민국 대전국립현충원에 모실 수 있었다.

4. 여담

5. 가족 관계



[1] 진주 하씨 집성촌이다.[2] 1979년 하희옥 선생 추모좌담회#에는 장녀 인덕, 장남 순덕, 차녀 현덕, 차남 문덕 으로 표기되어있다.[3] 장남 하문덕의 아들.[4] 현재 미국에 거주 중.[5] 이동휘가 있는 무관학교에서 약 일년 정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동휘가 설립한 동림무관학교로 추측된다.[6] 약법과 주의와 강령을 말씀하시며 입단을 권유했다고 밝혔다.#[7] 헌 옷 등[8] 미국시민권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영주권자로 살았다.[9] 101화[10] 공원측 주장 중에 하희옥지사의 유족이 파묘 동의했다며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있는데, 하희옥지사의 묘를 현충원 이장하는데 가장 큰 애로사항이 유족을 찾는 일이였다. 공원측 주장에 나오는 유족이 파묘를 동의할 수 있는 관계라면 현충원 이장도 결정내릴 수 있었다.[11] 해당 공원은 흥사단이 1978년 1월 공원을 인수한 후 정부정책의 문제로 1980년 9월 8일 현 공원 운영자에게 무상양도한 곳으로 도산의 뜻을 잇는다는 것을 공원의 가장 큰 홍보문구로 사용하고 있다.[12] 보배드림 커뮤니티에서 친일행위와함께 친일게시글을 반복 게시하여 공분을 사던 회원이 해당 공원의 중간관리직 직원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련의 사건들이 단순히 개발논리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독립투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반달행위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공원측의 횡포에 맞서 하희옥지사의 묘를 지키고 현충원 안장을 위해 노력한 사람도 해당 공원에서 일했던 보배드림회원이라는 점[13] 공익제보자는 독립유공자 하희옥 지사님의 파묘사건을 국가보훈처에 수차례 전화와 문서로 알렸으나 국가보훈처 해당담당자는 이를 묵과하여 결국 공익재보자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게시할 수 밖에 없었다.[14] 작자미상의 애국가를 오랜기간, 여러사람이 개사한 것이기에 안창호 단독 창작이라 할 순 없지만 지금 불려지는 애국가는 안창호 버전이다.[15] 현재 미국에 거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