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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29 10:55:04

한병택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한병필(韓秉畢)[1]
본관 청주 한씨[2]
출생 1869년 3월 24일[3]
함경도 북청도호부 성대사 조양리
(現 함경남도 덕성군 동중리)
사망 미상
사망지 미상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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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69년 3월 24일 함경도 북청도호부 성대사 조양리(現 함경남도 덕성군 동중리)에서 아버지 한면류(韓冕瑬, 1836 ~ ?)와 어머니 정선 전씨(1833 ~ ?)[4]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 4대 독자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9일 함경남도 북청군 노덕면에서 김용원(金溶沅)으로부터 이원군에서 입수한 기미독립선언서 100매 중 50매를 건네 받으면서 다른 지방에서는 이미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므로 3월 11일 북청군 천도교 교구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권고받았다. 이후 기미독립선언서를 보관하고 있다가 거사 당일인 3월 11일 북청군 노덕면 도로 위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가 끝난 뒤 체포되었고, 1919년 5월 13일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1919년 6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이에 상고하였으나 9월 4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행적 및 사망년월일, 사망지 등은 자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1919년 9월 4일 고등법원 형사부 판결문[2] 예빈윤공파(禮賓尹公派) 21세 병(秉) 항렬.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예빈윤공파 상권 1592쪽에는 한병필(韓秉)로 등재돼 있다.[3] 1919년 6월 27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4] 전광호(全廣浩)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