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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0 00:32:13

한상기

1. 자동차 기자2. 육종학자3. 정치인4.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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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동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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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종학자

1933년 8월 12일 ~

충청남도 청양군 출생.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다 1971년에 나이지리아로 건너갔다.

70년대에 나이지리아의 주식인 카사바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으로 생산량이 80% 가까이 감소해서 당시 현지 신문의 1면에 실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는데[1] 이때 한국에서 나이지리아로 건너간 한상기 박사가 브라질까지 직접 가서 카사바 원종의 씨앗을 가져와서 이를 통해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도 높은 슈퍼카사바[2] 개발에 성공했다. 현지 연구소에서는 개발은 성공했지만 보급은 자기들이 할 일이 아니라 여겨 무관심했는데 한상기 박사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직접 보급에 성공했으며[3] 나이지리아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41개국에 슈퍼카사바를 보급했다. 이 뿐만 아니라 , 바나나 같은 작물도 개량하였으며, 아프리카의 농업기술이 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제자도 길러냈다[4]

이 공을 인정받아 1983년에 외국인 최초로 현지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요루바족의 대왕에게 정식 추장으로 봉작되기도 했다. 여기서 추장이라는 건 그냥 마을 이장 정도가 아니라 수만명을 다스리는 군수나 시장에 더 가까운 존재이며 한상기 박사가 분봉받은 이키레(Ikire)도 2022년 기준으로 인구가 22만 명[5]에 달한다.[6] 같이 받은 칭호는 '세리키 아그베(Seriki Agbe)'로, 농민의 왕이라는 뜻이다. (#1, #2, #3) 국립낙동강자원생물관 설명

1998년 미국 조지아 대학교의 원예학과 명예교수로 임명되었다.

대학교 졸업여행 때 자신을 농과대학으로 이끌어준 까마득한 학계 대선배 우장춘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우장춘은 한상기 박사가 대학원을 졸업한 해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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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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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수

IT 전문가이자 전직 교수다. 삼성전자,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근무하였으며 벤처포트, 오피니티 등을 설립하였다. KAIST 문화기술대학원 및 세종대학교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 센터 교수를 역임한 후 현재 테크프론티어 대표로 근무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KAIST 교수 재직 중 제자를 상습 성희롱을 일삼다가 사임하였다. 미투데이 및 트위터에서 인플루언서로 알려져 있으며(출처: '유명 트위터러' 카이스트 교수님이 성희롱?) 과거 트위터에서 다수 해당 사실실명으로 언급되어 있다.


[1] 여기에 카사바를 재배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줄기를 잘라 심는 도삽법이라서 병충해에 취약한 탓도 있기 때문에 피해가 더욱 컸다.[2] 이름답게 크기도 일반 카사바보다 매우 크다.[3] 품종 보급 체계가 없다시피 하던 나라였으니 한상기 박사과 연구소 직원들이 직접 나서서 뿌리거나, 병든 카사바 밭에 들어가 소매넣기를 하거나 했다고 한다.[4] 제자 중에 적지 않은 수가 르완다 내전, 콩고 내전 중으로 사망해서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5] 한상기가 분봉받았을 때는 약 10만 명 정도[6] 전근대적 관습이 남아 있는 사회 특성상 그 권력은 민주주의 사회의 군수를 뛰어넘는다. 일례로 이때 한 교수의 아내는 한상기 교수가 추장에 봉해지는 걸 반기지 않았는데 나이지리아의 추장들은 대개 막강한 권력을 통해 젊은 후처를 여럿 거느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상기 교수는 아내를 설득해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했고 이로 인해 아내의 허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