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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04 04:47:12

한스 우르바네크

파일:Hans Urbanek.jpg
이름 요한 우르바네크
Johann Urbanek
출생 1910년 10월 10일
사망 2000년 7월 7일
국적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출신지
포지션 하프백
신체조건 172cm / 73kg
등번호 -[1]
소속팀 SC 바커 빈 (1925~1930)
니콜슨 비엔나 (1930~1931)
SK 아드미라 빈 (1931~1945)
TSV 슈바벤 아우크스부르크 (1945~1946)
SK 아드미라 빈 (1946~1947)
라피트 오버를라 (1947~1949)
레드 스타 펜칭 (1949~1953)
국가대표 15경기 0골 (오스트리아 / 1934~1936)
1경기 0골 (독일 / 1941)

1. 생애
1.1. 선수 생활1.2. 이후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3. 뒷이야기4. 수상
4.1. 클럽4.2. 국가대표

[clearfix]

1. 생애[2]

1.1. 선수 생활

1.1.1. 클럽

우르바네크는 뫼들링을 연고로 하는 SC 바커 빈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1930년, SC 니콜슨 비엔나를 거쳐 1931년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손꼽히던 강팀인 SK 아드미라 빈으로 이적했다.

우르바네크가 이적하자마자 아드미라 빈은 팀 역사상 두 번째 더블[3]을 차지했고 1934년에는 아드미라 빈의 세 번째 더블과 함께 미트로파 컵 준우승을 차지하여 우르바네크의 클럽 커리어 중 최고 성과를 거두었다. 그 최고 성과 중 우르바네크는 리그 21경기에 출전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했다.

우르바네크는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더욱 실력이 늘었고 소속팀 아드미라 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강팀의 면모를 보였지만 미트로파 컵에서는 준우승에 그친 것은 조금 아쉬웠다.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 팀들은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에 편입되었는데 1938-39년 우승으로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진출했다. 하지만 아드미라 빈은 당시 독일 챔피언 샬케에게 0대9로 학살당하고 말았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우르바네크는 에른스트 레너의 중개로 TSV 슈바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뛰기도 했고 1947년에 16년간의 아드미라 생활을 정리했다. 그 이후에는 라피트 오버들라, 레드 스타 펜칭 등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다.

1.1.2. 국가대표팀

우르바네크는 1931년 스위스를 상대로 처음 국가대표 경기를 치르기는 했지만 이 경기가 공식 A매치로 인정되는지에는 논란이 있다. 논란과는 별개로 우르바네크는 당시 대표팀의 주장이던 발터 나우슈의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했지만 그 경기 이후 3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월드컵에서야 다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활약할 수 있었다. 월드컵에서 우르바네크는 4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조국 오스트리아의 4강 진출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1936년까지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경기에서 활약하면서 오스트리아의 대 잉글랜드전 첫 승리에도 기여했다.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우르바네크는 1941년, 독일 대표팀으로 한 경기의 출전 기록을 남겼다.

1.2. 이후

선수 생활을 마친 이후 우르바네크는 시계 제조 일을 하며 여생을 보냈고, 2000년에 89세로 숨을 거두었다.

우르바네크의 무덤은 현재 의 남서부 공동 묘역에 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좋은 스피드와 피지컬을 갖고 있던 하프백. 몸을 쓰는 수비를 선호했지만 폭력까지 쓰는 트러블 메이커는 아니었다. 동료들에 대한 이해도 뛰어났고 자기 관리를 잘해서 꾸준한 기량을 펼쳤던 선수라 43세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3. 뒷이야기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첫 더블은 1926-27시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