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청주 한씨[1] |
출생 | 1868년 10월 13일 |
함경도 장진도호부 신흥사 신하리[2] (現 함경남도 장진군 만풍노동자구) | |
사망 | 미상 |
사망지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68년 10월 13일 함경도 장진도호부 신흥사 신하리(現 함경남도 장진군 만풍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1919년 3월 14일 한계유·한면각·한영태·한창혁·박두국(朴斗國)·이우승(李愚昇) 등 주민 200명과 함께 장진군 신남면 고토리(現 장진군 황초노동자구)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시가 행진을 하다 일본군 헌병주재소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주재소장 시마모토 신하치(島本新八)가 해산을 명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유치 중인 노석규(盧錫奎)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일본군 헌병들은 시위대에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마구 폭행을 가했고, 격분한 군중들도 이에 맞서 돌과 장작을 던지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 큰 충돌이 벌어졌다. 헌병들은 군중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자, 군중들은 곧 헌병대 안으로 쇄도해 들어가 전신 시설을 파괴하여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고, 주재소장 시마모토 신하치를 응징했다.
이때 헌병보조원 1명이 탈출하여 함흥군 하기천면 하통리(現 영광군 상통리)에 주둔하던 헌병대로 달려가서 시위대가 헌병을 무참히 살해했다고 거짓 보고했다. 이에 하통리 헌병대는 즉시 장진군 신남면 하갈우리에 주둔하던 헌병대의 지원 아래 신남면 고토리에 와서 군중을 짓밟고 해산시켰는데, 이때 체포된 이는 100여 명에 달했다. 이때 한승풍 또한 체포돼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이에 공소하여 8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했으나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