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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화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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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26대 |
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 ||
이름 | 한창화 韓昌華 | Han Chang-wha | |
출생 | 1922년 1월 3일 | |
함경북도 청진부 | ||
사망 | 2006년 4월 18일 (향년 84세) | |
본관 | 청주 한씨 (淸州 韓氏) | |
신체 | 163cm | 69kg | |
직업 | 축구 선수 (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육군 특무대 축구단 (?~?)[1] 조선방직 축구단 (?~?) |
감독 | 대한민국 대표팀 (1966) 대한민국 U-20 (1969) 한국자동차보험 축구단 (1970) | |
행정 | 실업축구연맹 사무국장 (1980~1981) | |
국가대표 | 1경기 (대한민국 / 1954) | |
가족관계 | 아내, 아들 한정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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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인.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했던 원로 축구인이었고 국가대표 감독도 역임했다. 배우 한정수의 아버지로 알려진 인물이다.2. 생애
2.1. 선수 경력
한창화는 어린 시절에 지린시에서 성장했고 일제강점기 시절 선수 생활을 시작해 주로 수비수를 맡았다. 그는 해방 후에 육군 특무대 축구단과 조선방직 축구단에서 뛰었으나 20대에는 국가대표급 선수가 아니었다.그러다가 한창화는 1954년, 일본과의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 나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만 32세 25일의 나이로 승선했다. 당시 한창화는 직접 경기를 뛰지는 못했으나, 한창화의 국가대표 발탁은 훗날 송정현[2]이 만 32세 131일의 나이로 대표팀에 첫 발탁되며 깨지기 전까지 역대 최고령 국가대표팀 첫 발탁으로 오랫동안 기록되었다. 2024년 기준으로 해도 이 부문 역대 3위의 기록. 대한민국은 일본을 적지에서 1승 1무로 누르고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대회 본선진출을 이뤄냈다.
한창화는 스위스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도 포함되었다. 대표팀 후보 멤버였던 한창화는 주전들이 뛰었던 1차전 헝가리와의 경기에선 결장했으나, 2차전 튀르키예와의 경기에 출전해 A매치 데뷔전이자 월드컵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한창화의 나이는 만 32세 168일로, 이 경기를 통해 2024년 3월 21일에 태국과의 2026년 월드컵 예선에서 주민규가 만 33세 343일의 기록으로 신기록을 세우기 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령 A매치 데뷔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3] 비록 결과는 좋지 못했으나, 한국축구의 역사적 현장에 있으면서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1955년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참여하면서 한창화는 여전한 노익장을 과시했고, 멜버른 올림픽 출전을 위해 뛰었으나, 일본과의 지역예선에서는 결장했고, 팀도 1승 1패 동률 속에 동전던지기 끝에 아깝게 지며 올림픽 본선 진출이 좌절되었다. 한창화는 이후 선수생활에서 은퇴했다.
2.2. 은퇴 이후
한창화는 1957년 국군축구대회에서 선심을 본 기록이 있고, 1966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 나서는 청소년대표팀의 기술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시기 대한축구협회 경기분과 위원을 지내며 행정 일도 소화한 것으로 보인다.1966년 7월 메르데카컵에 출전하는 대표팀의 코치로써 합류했고, 민병대 감독을 보좌했다. 이후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선 대표팀 사령탑에 취임했지만 팀은 1라운드에서 2전 전패·A조 꼴찌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1968년부터 실업축구연맹으로 적을 옮겨 총무직을 지내다가 1969년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8강에서 이란에게 지며 탈락해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1970년까지 대한축구협회에서 다방면의 행정직을 두루 맡았고 1970년 창단한 실업 구단 한국자동차보험 축구단의 초대 코치를 지냈다. 이 당시 실업 구단의 감독은 축구인이 아닌 회사 내부 임원이 맡는게 일반적이었고 한국자동차보험 또한 그러했다. 따라서 사실상의 감독직을 맡은 셈이다.[4]
1980년대 실업축구연맹의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행정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실업축구연맹 사무국장 자리를 그만 둔 뒤로는 언론에 노출되지 않아 기록을 찾기 어렵다.
이후 2006년 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 1981년 4월 11일, 현금을 노린 무장강도들에게 집앞에서 오후 10시에 둔기로 피습당한 뒤 현금을 갈취당한 사건을 겪었다. 당시 뉴스 보도에도 크게 실렸으며, 당시 존재했던 통금 시간이 지나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아내가 집앞에 쓰러진 한창화씨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
- 상술되어있듯, 아들 한정수는 연기자로 활약하고 있다. 한창화씨가 무려 50세에 본 늦둥이 아들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중학교 때까진 축구선수의 길을 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만두었다고 한다. 한정수는 2010년 이후에 아버지를 언급한 이후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꾸준히 아버지를 언급하곤 한다. 특히 2022년 1월 중순 방영된 SBS의 교양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대회에 출전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아버지에 대한 회고를 하러 증언자로 출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