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고려의 재상으로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진 이광봉(李光逢)이다.
유래
시조 : 이광봉(李光逢)
咸豊李氏의 시조는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 휘(諱) 이광봉(李光逢)이시며, 고려의 유명한 재상이
다. 始祖公께서는 고려 충렬왕 31년에 정당문학에 오르시고, 충선왕 원년에 판전학사에 임명되었
다. 충숙왕 원년에는 상호군이 되시고 6년에 동지밀직사사에 오르시고 7년에 문하부평리에 오르
시고 11년, 즉 심왕(瀋王) 고(暠)를 위하여 원의 중서성에 글을 올린 자들을 모두 파면하는 날에
공(公)을 삼사사에 임명하였고 벽상삼한삼중대광보국좌명공신 함풍부원군(碧上三韓三重大匡輔
國 左命功臣咸豊府院君)에 훈봉하였다. 함풍이씨가 관향(貫鄕)을 함풍으로 삼게 된 것은 고려 때
휘(諱) 이광봉(李光逢)祖가 함풍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진 데에서 연유한다. 함풍은 함평의 옛 이
름이며, 함풍이씨 시조이신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7백여 년 동안 삶의 터
전으로 삼아왔으므로 가는 곳마다 始祖公의 후손들이 닦아놓은 고고한 흔적들이 살아 숨쉬고 있
다. 일부 함평이씨라고도 부르나 본래는 함풍 (咸豊 )이며 함풍이씨 (咸豊 李氏)가 맞고 같은 본관이다.
시조 묘는 전남 함평읍 만흥리 217-14번지에 영풍사 사당 옆에 유택이 모셔저 있으며, 세일제는
매년 3월 마지막주 토요일에 지낸다.
인물
시조로 부터 5대에 이르러 인좌(仁佐), 인형(仁衡), 준성(俊成)祖와 인원(仁元), 인관(仁琯),
인계(仁桂), 인검(仁檢), 인문(仁問)祖 (근거 : 무진보 손수조 방주에 광봉위 선대라고 기록됨)
이 후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여러 파로 분파 되었다.
이 긍(李兢:1389~1433) 조선 태종 5년 1405년 增廣試(증광시) 丙科에 급제한 후 1427년(세종 9년 )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교리, 공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와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지셨고, 1433년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성삼문과 같
이 접영시에 급제한 일은 유명하다
이 안(李岸), 조선시대 1455년에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못 마땅히 여기고 벼슬을
마다 하고 세태에 비분강개하신 9世 영파정公은 신말주(사육신 신숙주의 아우) 와 같이 기관
에 낙향 하였는데 신말주는 전북 순창에 귀래정을 짓고 은거 하였으며, 영파정은 향리 함평
기산 영수간에 정자를 지어 영파정이라 이름하고 두문불출 두 차례 나 세조께서 지평(사헌부
)장령으로 부르셔도 불사하신 단종의 유신으로 불사이군의 대의를 만천하에 밝혀 절의를 지
키신 백세 청풍의 고결한 충절신(忠節臣)입니다.
이만영(李萬榮), 12世 죽음공 이만영(李萬榮)은 중종33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이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을 역임하시었다.
이장영(李長榮), 12世 죽곡공 이장영(李長榮)은 명종13년 식년문과와 선조19년 중시갑과에
두 번이나 장원급제하였고, 함양군수 등을 거쳐 선공감정(繕工監正)과 통정(通政), 관직은
부사에 이르러, 사간원 대사간을 지내셨다.
이덕일(李德一), 13世 칠실공 이덕일(李德一) 장군은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그는 화살하나로 두명의 적을 쓰러트릴 만큼 활솜씨가 뛰어나 이같은 용
맹이 알려져 이순신장군의 참모로 등용되어 임진왜란을 종결시키는데 크게 공을 세워 절충
(折衝)장군 정3품에 올랐으나 나라의 위기 때에도 당파싸움만 일삼는 대신들에 환멸을 느끼
고 고향에 돌아와 움막 칠실(漆室)에 들어앉아 ‘우국 충절가 28 수’를 남기셨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춘령(李春齡:1499 己未生) 문과(文科) 중종29년(1534) 갑오 식년시 을과(乙科)급제
이의번(李依蕃) 문과(文科) 중종32년(1537) 정유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만영(李萬榮:1510 庚午生) 문과(文科)중종33년(1538) 무술 별시 갑과(甲科)장원급제
이장영(李長榮:1521 辛巳生) 문과(文科) 명종13년(1558) 무오 식년시 을과(乙科)급제
이장영(李長榮:1521 辛巳生) 문과(文科) 선조19년(1586) 병술 중시 갑과(甲科)장원급제
이 경(李 璥:1538 戊戌生) 문과(文科) 명종19년(1564) 갑자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경화(李景華:1656 丙申生) 문과(文科) 숙종13년(1687) 정묘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경운(李景蕓:1666 丙午生) 문과(文科) 숙종19년(1693) 계유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의장(李宜章:1642 壬午生) 문과(文科) 숙종28년(1702) 임오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휘진(李彙晋:1680 庚申生) 문과(文科) 숙종34년(1708) 무자 식년시 을과(乙科)급제
이휘항(李彙恒:1695 乙亥生) 문과(文科) 영조2년(1726) 병오식년 갑과(甲科)장원급제
이중권(李中權:1737 丁巳生) 문과(文科) 영조35년(1759) 기묘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형필(李衡弼:1714 甲午生) 문과(文科) 영조35년(1759) 기묘 식년시 병과(丙科)급제
이동식(李東埴:1745 乙丑生) 문과(文科) 정조7년(1783) 계묘 증광시 을과(乙科)급제
이영식(李英埴:1749 己巳生) 문과(文科) 순조3년(1803) 계해 증광시 병과(丙科)장원급제
이순범(李舜範:1841 辛丑生) 문과(文科) 고종1년(1864) 갑자 정시 병과(丙科)급제
이운봉(李雲鳳, 1673 癸丑生) : 사마시(司馬試) 숙종34년(1708) 식년시 이등(二等)
이운룡( 李雲龍,1678 己亥生) : 사마시(司馬試) 숙종 45년(1719) 증광시 3등(三等)
※ 과거 급제자가 288명 ( 문과 : 73, 무과 : 14, 사마시 : 199, 의과 : 2 )에 이르는 명문 문인 집안이며 또
한 무인도 많았으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우국지사가 많이 배출되어 역사적으로 함풍이씨는 학문과 충
절과 효행을 생명처럼 여기며 인륜의 가치를 추구해온 명문가 집안이다.
고서 기록
"함풍족보보함풍이씨지족야 (咸豊族譜譜咸豊李氏之族也)" . ”원본의 표지 역시 “咸豊李氏族
譜 "라고 되어있음. 이는 최초로 작성된 1633년 계유초보 (癸酉草譜 ) 서문임. 장양공 후손
운( 澐 )조가 작성. 즉 '함풍족보는 함풍이씨 종족을 기록한 책'의 뜻 입니다.
운( 澐 )조가 작성. 즉 '함풍족보는 함풍이씨 종족을 기록한 책'의 뜻 입니다.
"咸平李氏는 고려 密直司事 李光逢으로부터 示顯되었다" ( 此其細可略也咸平之李自高麗密
直司事光逢始顯 ). 이는 조선조에서 領相을 역임한 鄭澔대감( 송강 정철의 현손 )의 유집
인 장암집(丈巖集)에 서술 됨. 또한 정호대감께서 이덕일장군 묘비에 " 咸李高麗密直司事
光逢始顯無非府院君之後孫也 "라고 기록 됨. 즉 함평이씨는 광봉조로 시현되었고 부원군
자손이 아닌 자가 없다. 즉 함평이씨는 모두 휘 이광봉조의 후손이라는 뜻 입니다.
" 咸平宗人草譜則仁問以光逢爲先代以孫秀爲子而無蘘三言~ ” 이는 1688년 우리성씨 최초
의 대동보인 “咸豊李氏族譜 " (2012년 광주 종가에서 발견) 坤(권지 2) 131면 諱 孫秀祖의
방주 기록입니다. 즉 휘 인문조는 휘 광봉조가 선대라는 뜻 입니다..
족보상의 4세 휘 順之조의 방주에 ‘官至檢校興威衛大將軍配開州王氏有蔭光君忠翼之女’라 했
고, 개성왕씨 종족별기에 왕충익의 사위가 ‘咸豊人檢校興威衛大將軍順之’라 했으니 동일 인
임. 개성왕씨 종족별기 끝머리 부기에 " 공족의 세계가 전하지 못한 것을 종족별기라고 이
르며 고려가 망한뒤에 그의 자손들이 한조사람이 된 것을 아울러 기재하였으니 ~ " 라고
기록됨. 조선조에서 왕씨로 살아남을 수가 없어 성을 바꾼 사람이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
족보는 고려 충숙왕시대 휘 이광봉조의 부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평이씨 족보사실록"과 "죽곡집"에 의하면 ‘이광봉조의 후손 숙의 아드님에 이르러 형제가 7
인(인좌, 인형, 인원, 인관, 인계, 인검, 인문 )이다’고 기록됨. 이후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으나
그 중 다섯 문중이 부원군 손에서 빠져나가 현재는 인좌, 인형 두 분만 부원군의 후손으로 남
아 있습니다.
집성촌
전남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전남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
전남 나주시 봉황면 용전리
전남 무안군 해제면 덕산리
전남 장성군,광주광역시 전역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경기 평택 포승면,현덕면 ,여주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전북고창군 성내면, 흥덕면, 해리면, 고수면
전북 정읍시 송산동
충남 부여군 석성면
충남 논산군 연산면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
충남 당진군 신평면 초대리
충남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항 렬 표
일가(一家)의 항렬(行列)은 대저 나름대로의 원리(原理)를 좇아 옛 선조(先祖)로부터 30年을 주기로 이를 정
하였으며, 휘(衛) 광봉(光逢)으로부터 18世의 상계는 생략하고 그 이후 유자(儒字)로부터 38世까지의 항렬
표(行列表)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유(儒)○
○서(緖)
민(敏)○
돈(敦)○
○모(模)
○헌(憲)
○환(煥)
계(啓)○
○기(基)
○범(範)
종(鍾)○
○열(烈)
재(載)○
○수(洙)
교(敎)○
○행(行)
근(根)○
건(建)○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훈(勳)
○성(聖)
○현(賢)
기(起)○
규(奎)○
○회(會)
○선(善)
원(源)○
태(泰)○
○식(植)
현(炫)○
희(熙)○
○균(均)
○기(基)
석(錫)○
진(鎭)○
호(鎬)○
○수(洙)
37세
38세
병(秉)○
○열(烈)
○유(裕)
※ 世와 世孫은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世孫이 된다. (예: 20世는 19世孫, 또는 20代는 19代孫 )
※ 世와 代는 같은 말이며 시조로 부터 순서을 뜻한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함풍현( 현 함평군 )
함풍(咸豊)은 전라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함풍(咸豊)과 모평(牟平) 두개 현이 합쳐진 함평(咸平)의 옛
지명이다. 선사시대에는 진국,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다. 백제 때 굴내현(屈乃縣: 또는 屈奈縣)· 다지현
(多只縣)에 속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굴내현은 함풍현(咸豊縣)으로, 다지현은 다기현(多岐縣)으로
개칭되어 무안군에 이속되었다. 고려 태조 때 다기현을 모평현(牟平縣)으로 바꾸었고, 1018년(현종 9) 영광군
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다. 1409년(태종 9) 모평현(牟平縣)과 합하여 함평현으
로 개편하였다. 기성(箕城)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함평군이 되
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 함평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10개 면으로 줄었으며, 1932년 식지면과
평릉면을 합병하여 나산면으로 신설, 9개 면이 되었다. 1963년 함평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