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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23:28:16

해남 윤씨

해남 윤씨
(海南 尹氏)
관향 <colbgcolor=#fff,#191919>전라남도 해남군
시조 윤선도 (尹善道)
중시조 윤광전 (尹光琠)
집성촌 전라남도 해남군
전라남도 강진군
인구 66,395명(2015년 기준)
링크 해남윤씨 중앙 종친회
1. 개요2. 해남 윤씨의 시조 유래3. 발상지 및 본관 유래4. 계파도 및 각파 소개
4.1.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장파댁(長派宅)4.2. 호군공파(護軍公派)/죽사동댁(竹寺洞宅)4.3. 적순공파(迪順公派)/지석댁(支石宅)4.4. 진사공파(進士公派)/부춘택(富春宅)4.5. 참봉공파(參奉公派)/항촌댁(項村宅)4.6. 정릉참봉공파(定陵參奉公派)/용산댁(龍山宅)4.7. 어초은공파(漁梅隱公派)/연동댁(蓮洞宅)4.8. 참의공파(參議公派)/충남댁(忠南宅)
5. 해남 윤씨의 중흥6. 해남 연혁7. 집성촌8. 주요인물
8.1. 역대인물
8.1.1. 문과8.1.2. 무과8.1.3. 기타
8.2. 근대인물8.3. 현대인물
9.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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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향은 전라남도 해남군을 본관으로하는 성씨이다.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始祖)는 윤존부(尹存富)이다.

해남윤씨(海南尹氏)는 고려중엽에 이미 발상(發祥)한 고족(古族)이나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를 비롯한 선계7세(先系七世)는 관력(官歷)과 배위급묘소(配位及墓所)를 거의 실전(失傳)하였으며, 고려말(麗末)에 이르러 영동정공부군(令同正公府君) 광전(光琠)이 대호군공(大護軍公) 단봉(丹鳳)과 소윤공(小尹公) 단학(丹鶴) 두형제를 둔 후로 지금까지 6백여년 동안 자손이 번창하여 8파(八派)를 형성하고, 강(康) 해(海) 영(靈) 장(長)등 여러 고을에 집단세거(集團世居)하면서 문장도덕(文章道德)과 충효절의(忠孝節義)가 세세환혁(世世煥爀)하여 호남망족(湖南望族)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2. 해남 윤씨의 시조 유래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는 11세기인 고려 중엽 문종(재위 1046~1083년)때에 생존했던 분으로 추정된다.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부터 6세 환(桓) 까지는 생존년대(生存年代), 관직(官職), 배위(配位), 세덕(世德) 등의 기록은 없고, 다만 휘(諱)자만 전해오고 있다.

해남윤씨 족보에 보면
"불행하게도 해남윤씨는 선대(先代)의 유적과 기록이 많이 유실되었는데, 그 연유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규명해야할 역사적 과제이며, 분실된 유적과 문헌이 많다보니 시조로부터의 발상유래(發祥由來)가 짧게 기록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인 기록이 보인 것은 7세 녹화(綠和)부터입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남윤씨는 문헌상 최초의 기록인 윤단학 노비허여문기 및 입안(尹丹鶴 奴婢許與文記 및 立案, 보물 제483호)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을 지낸 8세손(八世孫) 영동정공부군(令同正公府君) 광전(光琠)이 차자인 단학에게 봉사조로 노비를 허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후손들을 번창시켰다. 이에 후손들이 광전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3. 발상지 및 본관 유래

본관 해남(海南)이 처음 사용된 시기는 1513(중종8)년 13세 귤정공 구(衢)의 생원시 시권에 본관이 기록된 것이다. 그로부터 12년전인 1501년 12세 어초은공 효정의 생원시 시권에는 본관 기록이 없었으나 과거시험을 보려면 시권에 성관(姓貫)과 사조(四祖)를 기록해야하는 사회적 상황에 의하여 아들인 귤정공의 시권에는 본관을 정하여 기록케 한 것으로 보인다.

어초은공 효정이 강진에서 해남으로 거주를 옮겨 금남 최부선생에게서 수학하고, 대부호인 초계정씨 정귀영의 따님과 결혼하여 해남에 터전을 잡은후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관계에 나갈 것을 포기하고 후학을 가르켜 해남지방을 문향, 예의지향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고 농업경영에 힘써 삼개옥문하여 적선지가로 칭송되었습니다. 이로인하여 어초은공 효정(孝貞)은 득관조(得貫祖)로 알려져 있다.

해남윤씨 선대조고부군(先代祖考府君)의 묘소(墓所)가 모두 강진(康津), 해남(海南)관내에 모셔져 있음에 비추어 선대조고부군(先代祖考府君)의 세거지(世居地)가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임을 말하는 것이며, 중시조(中始祖) 광전(光琠)에 관한 탐진(耽津:전남 강진의 옛 명칭) 감무(監務)의 증명서류가 이를 입증하기에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발상지(發祥地)는 곧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인 것이다.

* 해남(海南)
해남은 옛날에는 색금현(塞琴縣) 또는 침명(浸溟)이라고도 하였다.
<옛날에는 당악(棠岳)이라고도 불렀으며, 당악(棠岳)은 지금의 전남 해남군 현산면(縣山面) 고현리(古縣里) 앞에 있는 작은 산등성이로 이 산을 당산(棠山)이라 했는데 당악(棠岳)은 여기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

* 강진(康津)
강진은 본래 도강(道康) 탐진(耽津)의 2현(二縣)이었다. 도강은 백제때는 도무군(道武郡) 신라때는 양무군(陽武郡) 고려때는 도강(道康)이다. 탐진(耽津)은 백제때는 동음현(冬音縣) 신라때는 탐진(耽津)이라 했다.

* <탐진 개칭 사유 - 신라 문무왕(文武王)때 탐라국(耽羅國: 지금의 제주)왕자가 신라국에 래조(來朝)했을 때 강진 구강포(九江浦)에 정박하였다 하여 탐진으로 개칭(改稱)하고 양무군에 예속시킴. 강진이라 개칭 - 이조 태종 십칠년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을 둠<지금 병영면> 도강, 탐진을 합하여 강진이라 하고 치소(治所)는 탐진에 두었다.
세종 십일 년에 치소를 송계(松溪:지금의 성전면 수양리 땅골)로 옮기고 고읍면(古邑面)이라 함. 성종6년(成宗六年)에 치소를 다시 옛 탐진으로 옮겼다. 강진의 또다른 지명은 금릉(金陵) 또는 오산(鰲山)이다.

4. 계파도 및 각파 소개

4.1.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장파댁(長派宅)

파조: 9세 대호군공(大護軍公) 諱 단봉(丹鳳)
주요세거지 : 해남군 계곡면 황죽(篁竹)마을

황죽리는 마을에 들어서면 몇 백년의 마을역사를 간직한 아치형 팽나무가 반갑게 맞이하는 산수 좋고 인심좋은 마을로 1500년경 밀양박씨가 살기 시작하였고 이어 해남윤씨가 입향하게 되었다. 동쪽으로 강진군에 접해있고 서기산이 인접해 있으며 깊은 산골 마을로 농토가 적어 생활이 어려웠던 지역이다. 모시 길쌈을 많이 하여 모시골이라고도 하였고 못이 있어서 모수골 또는 모동이라 부르기도 했다. 황죽리라는 지명은 마을을 형성 할 때 심었던 대나무가 마을 뒷산과 주변에 무성하게 자라서 부르게 된 지명이라는 말도 전해온다
본래 영암군 비곡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廢合)에 따라 황죽리라 하여 계곡면에 편입되었다. 장파댁 제각 영모제가 황죽리에 있었으나 1990년에 강진 성전 호암동에 신축하였다.

4.2. 호군공파(護軍公派)/죽사동댁(竹寺洞宅)

파조: 11세 호군공(護軍公) 諱 종(種)
주요세거지 : 강진군 도암면 만년, 회룡, 강성마을

만년리는 대절골 이라고도 부르며 조선 선조 때 안산김씨가 설촌(設村)하면서 마을고개를 동서로 하여 대치라고 하다가 칠은정(七恩亭)이라고 부른 후 영원불멸 행복하라는 뜻으로 만년이라 개칭하였다. 회룡마을은 조선시대 해남윤씨가 강성리에서 분가(分家)하여 마을을 이루면서 큰 냇가가 있어 대천이라고 부르다 용이 승천하기 위해 마을을 휘감고 있는 형국으로 회룡이라 개칭하였다. 강성(江城)마을은 해남윤씨가 터를 잡으면서 마을 앞에 많은 물이 흘러 강생(江生)이라고 하다가 고산이 마을 앞까지 해수가 들어와 강수를 본다하여 강성으로 개칭하였다.

4.3. 적순공파(迪順公派)/지석댁(支石宅)

파조: 12세 적순공(迪順公) 諱 효인(孝仁)
주요세거지 : 강진군 도암면 지석 마을

마을 설촌 당시 마을 입구에 커다란 고인돌이 있어서 괸돌이라고 하였으며, 마을내에 청동기시대 묘제(墓制)인 고인돌군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후에는 지석리라 부르게 되었다. 해남윤씨는 1580년대에 입향(入鄕)하였으며 강,약,윤,신 4형제가 동령마을의 복과동에서 생활하였다.

4.4. 진사공파(進士公派)/부춘택(富春宅)

파조: 12세 진사공(進士公) 諱 효의(孝義)
주요세거지 : 강진읍 부춘(富春)마을

부춘리는 매봉산과 서기산의 정기를 받은 길지로 좌로는 매가 알을 품고 꿩을 공격하는 형국의 매좌등과 우로는 백호등이 있고 100여년전에 신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될 만큼 오래전부터 형성된 촌락이다. 진사리에 지위사(知爲寺) 절터가 있고 16세기 말에는 강진현 지품전사(知品田社)이 있었다가 17세기에 지품면으로 변경되어 부춘마을이 면 소재지 였으며 죽산안씨가 세거할 때 안정리(安汀里)라 부르다가 점차적으로 떠나고 뒷등과 기와골에 살던 해남윤씨가 입촌하면서 부춘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해남윤씨가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4.5. 참봉공파(參奉公派)/항촌댁(項村宅)

파조: 12세 참봉공(參奉公) 諱 효례(孝禮)
주요세거지 : 강진군 도암면 항촌마을

항촌은 고려말에 해남윤씨가 설촌하면서 목촌(牧村)이라 하였으며, 지형이 목처럼 생겨서 목마을·목말, 목냉기 또는 목리라 하다가 어느 날 도승(道僧)이 길을 가다가 오랫동안 깨지지 않을 만세의 땅 만년불파지지(萬年不破之地)라 하여 항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강진군 칠량면 벽송마을:
조선 초기에 해남윤씨가 터를 잡았고 마을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 사시사철 영원토록 푸르름에 연유하여 벽송(碧松)이라 하였다. 그러나 예전에는 마을 지형이 배의 형국이라 함능이라 하였고 많은 가구가 거주하고 있어 큰목(큰마을)이라고도 하였다.

4.6. 정릉참봉공파(定陵參奉公派)/용산댁(龍山宅)

파조: 12세 정릉참봉공(定陵參奉公) 諱 효원(孝元)
주요세거지 : 해남군 옥천면 용산마을

용산리는 농경지가 많은 평야지대로 예부터 부유한 마을이었다. 용태산아래 마을이 형성되어 용산(龍山)이라 하였으며 원래 영암군 옥천시면 이었으나 1906년에 해남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주변 일부 지역과 병합(倂合)하여 용산리라 하고 옥천면에 속하게 되었다.

4.7. 어초은공파(漁梅隱公派)/연동댁(蓮洞宅)

파조: 12세 어초은공(漁梅隱公) 諱 효정(孝貞)
주요세거지 : 해남읍 연동마을

연동(蓮洞)은 500여년전 어초은공이 입향하면서 해남윤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으며 마을 앞에 연지(蓮池)를 만들고 뒷산에는 비자나무 숲을 조성하였다. 녹우당 뒤편의 덕음산을 진산으로 하고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며 크고 작은 산들이 병풍(屏風)처럼 둘러져있다. 설촌 당시에는 백련동이라 하였고 연못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본래 해남군 군일면 연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주변 지역을 병합(併合)하여 남송과 연동을 이름을 합쳐서 남연리라 하여 해남읍에 편입하였으며 1949년 연동리로 개칭되었다.

4.8. 참의공파(參議公派)/충남댁(忠南宅)

파조: 10세 참의공(參議公) 諱 사서(思瑞)
주요세거지 : 충남 합덕읍 도곡마을

도곡리는 사방이 임산병풍(林山屏風)을 이루어 힘찬 기백과 함께 자애로운 어머니 품속 같은 만세낙토(萬歲樂土) 지형으로 합덕에서 면천방향으로 가는 길에 자리 잡고 있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일찍부터 세거하고 있었으며 병자호란 후부터 해남윤씨(海南尹氏), 서주이씨(仝州李氏) 등이 세거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둔군봉은 도곡리와 소소리 경계에 있는 낮은 산으로 고종 31년(1895년) 갑오 동학란(東學亂)때 관군이 이 곳에 주둔했기에 둔군봉이라 한다. 둔군봉 뒤에 위치하므로 뒷골 즉 도곡리 (道谷里)라 했다. 도곡리 주요지명으로는 군량이(軍糧伊), 칼바위, 절골, 원절골, 불당골, 영당말. 재마을 등이 있다.
강진군 마량변 산동마을: 조선조 중종대 1500년경 해남윤씨 13세 윤곡이 산세 좋고 물 맑은 곳 큰 터에 자리를 잡았다. 마을 주변이 홑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이라서 산동(山東)으로 불리다가 해방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동(永東)으로 개칭되었다가 1986년 옛 이름 찾기 일환으로 다시 산동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 때는 마도진(마량면) 동령재에서 큰터를 바라보는 마을의 전경이 아름답게 보여서 완경리(翫景里)로 불리어 지기도 했다.

5. 해남 윤씨의 중흥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을 지낸 8세손(八世孫) 영동정공부군(令同正公府君) 광전(光琠)은 강진에 터전을 마련하였다.

족보에서 중시조(中始祖) 광전(光琠)의 아들은 단봉(丹鳳)과 단학(丹鶴)이나, 노비허여문서에 보면 단학(丹鶴)은 차자(次子)인데 부친 광전(光琠)으로부터 봉사조(奉祀條)의 노비(奴婢)를 받은 것으로 보아 제사(祭祀)가 차자(次子)인 단학(丹鶴)에게 물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해남윤씨는 신흥무장세력으로 성장하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단봉(丹鳳)은 천우(天祐)와 천길(天吉) 두 아들을 두었으며, 단학(丹鶴)은 다시 사보(思甫)와 사서(思瑞) 두 아들을 두었다. 사보(思甫)는 종(種), 경(耕)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후 경(耕)은 강진 덕정동에 살며 효인(孝仁), 효의(孝義), 효례(孝禮), 효지(孝智), 효상(孝常), 효원(孝元), 효정(孝貞)의 일곱 아들을 두게 되었다.

그중 막내아들인 어초은(漁樵隱) 효정(孝貞:1476-1543)이 당시 해남의 강력한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가졌던 대부호 정귀영(鄭貴瑛)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어 해남으로 옮겨 살게 되었고, 과거에 합격함으로써, 효정(孝貞)은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가문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어초은(漁樵隱)이란 호처럼 물외한정(物外閑情) 탈속의 경지에서, 번거로운 세속에 쫓김이 없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자연을 벗할 뿐, 자신을 보다 깊고 넓은 세계로 인도하여 국가에 세금을 못내고 옥에 갇혀 신음하며 죽어가는 팔도(八道)의 불쌍한 백성들을 국가에 막대한 세금을 세 번이나 대납하여 구제(救濟:三開獄門)하였던 관인후덕(寬仁厚德)한 적덕(積德)의 유교적 덕치(德治), 인정주의(仁政主義)를 펼침으로 인해 조선 팔도 민간 속에 적선지가(積善之家) 해남(海南) 윤가(尹家)라는 인식의 틀을 구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효정(孝貞)은 학문적으로는 자신의 처사촌 동서인 영남 사림파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 최부(崔溥 : 1454 - 1504)와 사승(師承) 관계를 맺으면서 사림으로서 입지를 넓혀 양반가로서 정계 당파성을 확보함과 아울러 해남(海南) 윤가(尹家)라는 본관(本貫)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효정(孝貞)의 자손들은 사림의 주류를 이루는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로부터-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굉필-조광조-이황으로 이어지는 문적계통을 확보함으로서 양반 가로서의 맥을 확실하게 이루게 되었으며, 효정(孝貞)의 장자 구(衢:귤정공)와 복(復:행당공), 손자 홍중(弘中), 의중(毅中)과 증손자 유기(唯幾), 유심(唯深), 그리고 고손자 선도(善道)로 이어지는 자손들이 학문과 벼슬이 출중해짐으로 인해 그의 선대에까지 나라에서 벼슬이 추증되는 영광을 입게 되었으며 아울러 재지사족 호남 명문가로서의 해남(海南) 윤가(尹家)의 입지가 이루어 졌다.

6. 해남 연혁


▶ 선사시대
- 신석기시대 후기에 즐문토기인이 현산면 두모리에 출현
- 삼한시대에 마한 54국중 소위건국등 4~5개의 마한소국세력 성립

▶ 삼국시대
- 백제성왕 16년(538년) 새금현(塞琴縣),고서이현,황술현 설치

▶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16년(757년) 3현의 이름이 침명(浸溟),고안,황원으로 개칭됨

▶ 고려시대
- 태조 23년(940년) 침명현을 해남현, 고안현을 죽산현으로 개칭하고 황원현은 황원군으로 승격

▶ 조선시대
- 태종 9년(1409) 진도와 해남을 합하여 해진군으로 함
- 태종 12년(1412) 읍의 치소를 지금의 현산면 고현리의 당악에서 영암으로 옮김.
- 세종 19년(1437) 진도와 해남을 나누어 해남현을 복설하고 치읍을 현재의 해남읍으로 옮김
- 1448년(세종 30), 황원현, 옥산현, 죽산현과 병합, 당악(棠岳)으로 개칭, 다시 해남현으로 개칭.
- 고종 32년(1895) 전국 행정개편되고 따라 해남현이 나주부 해남군으로 승격
- 1896년 다시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개편하고 부근도서를 완도군으로 이속 현재
- 1914년 해남 인접지역을 병합하여 13개면으로 개편
- 1955년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1읍 12면)
- 1983년 북평면을 나누어 북일면 신설 1읍 13면으로 편제 - 1992년 현재 1읍 13면 513리로 편제

☞ 해남윤씨가 지리지 성씨조에 최초로 나타나는 때는 1760년(英祖 36)에 만들어진 「여지도서(與地圖書):下, 全羅道 海南郡 姓氏條 」입니다. 1702년 대동보가 편찬된 이후이다.

☞ 해남군 연혁에 의하면 해남(海南)은 1448년(세종 30) 황원현, 옥산현, 죽산현과 병합, 당악(棠岳)으로 개칭하여 잠시 사용하다가, 다시 해남현(海南縣)으로 개칭하였다.

<해남군청 자료 참조>

7. 집성촌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전남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
전남 강진군 강진읍 춘전리
전남 해남군 해남읍 평동리
전남 해남군 북일면 금당리
전남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
전남 강진군 도암면 덕정동, 지석리, 만덕리, 계라리, 항촌리
전남 강진군 군동면 화산리

8. 주요인물

8.1. 역대인물

윤도원

8.1.1. 문과

윤구(尹衢)
윤행(尹行)
윤복(尹復)
윤홍중(尹弘中)
윤의중(尹毅中)
윤유기(尹惟幾) - 윤유기(尹唯幾)
윤광계(尹光啓)
윤선도(尹善道) - 시인, 정치인
윤인미(尹仁美)
윤이후(尹爾厚)
윤필(尹珌)
윤지범(尹持範) - 윤규범(尹奎範)
윤효관(尹孝寬)
윤지눌(尹持訥) - 윤규응(尹奎應)
윤덕우(尹德雨)
윤지승(尹持昇)
윤규백(尹奎白)
윤서유(尹書有)
윤주선(尹柱善)

8.1.2. 무과

윤웅(尹雄)
윤택(尹宅)
윤희공(尹恭)
윤인갑(尹仁甲)
윤존경(尹存敬)
윤정의(尹廷義)
윤효국(尹孝國)
윤승업(尹承業)
윤승국(尹承國)
윤인철(尹仁哲)
윤충원(忠元)
윤지상(尹之商)
윤징미(尹徵美)
윤상은(尹相殷)
윤덕상(尹德相)
윤진미(尹晉美)

8.1.3. 기타

윤두서(尹斗緖) - 화가[1]
윤덕희(尹德熙) - 화가
윤동로(尹東老)
윤동철(尹東喆)
윤선술(尹善述)
윤윤(尹綸)
윤신(尹紳)
윤용(尹愹) - 화가
윤유겸(尹唯謙)
윤이경(尹履慶)
윤익경(尹益慶)
윤정기(尹廷琦)
윤종서(尹宗緖)
윤취서(尹就緒)
윤치경(尹致敬)

8.2. 근대인물

윤영선(1904)(정치인) - 전 국회의원

8.3. 현대인물

윤경호
윤관(법조인) - 전 대법원장
윤근환 - 전 농림수산부장관
윤난실
윤보미
윤소하
윤영수(정치인)
윤영일
윤옥윤
윤유현 - 서대문구의회 의원
윤일영
윤재갑
윤재걸
윤재명
윤재순
윤재식(법조인)
윤전(법조인)
윤준(법조인)
윤중현(KIA 타이거즈 투수)
윤철하(법조인, 정치인)
윤태현(기업인) - 크라운제과 창업주
윤한덕
윤한봉
윤웅걸(법조인)
윤귀하(참전유공자) - 대한민국 육군 장성
윤채은(ADYA)

9. 참고자료

해남윤씨 대동보
해남윤씨 대종회보
해남윤씨 중앙종친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1] 윤두서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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