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후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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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숭덕제의 후궁 민혜공화원비 | 敏惠恭和元妃 | ||||
시호 | <colbgcolor=#fff,#1f2023>민혜공화원비(敏惠恭和元妃) | |||
통칭 | 관저궁 신비(關雎宮 宸妃) | |||
지위 | 동관저궁복진⇒동관저궁대복진(동관저궁신비) | |||
이름 | 보르지기트 하이란주(博爾濟吉特 海蘭珠)[1] | |||
가계 | 부친 코르친부 버일러 화석충친왕 자이상(科爾沁部貝勒 和碩忠親王 寨桑) 모친 현비 박례(賢妃 博禮) | |||
부군 | 숭덕제 | |||
자녀 | 황8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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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의 후궁. 몽골 코르친부 좌익 중기 출신으로 성은 보르지기트이고 이름은 하이란주이다.코르친부 버이러 자이상의 딸로 홍타이지의 정후 효단문황후의 조카이자 순치제의 모후 효장문황후[2]의 언니이다.
2. 생애
청나라가 건국되기 전 후금과 몽골 코르친 부족은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후금의 한인 누르하치의 8남 홍타이지와 코르친 버일러[3] 채상 노얀의 여동생을 혼인시켰다. 이 노얀의 여동생이 훗날 효단문황후이다. 그러나 제1복진 효단문황후가 시집온지 11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고, 당시 코르친부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우라부 출신의 복진인 우라나라씨가 홍타이지의 장남 호오거와 2남 로거, 다른 복진인 니오후루씨가 3남 로보호이를 출산하게 되면서 효단문황후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유력 후계자로 지목되기에 이르자 효단문황후와 그녀의 오빠 자이상은 논의끝에 1625년 자이상의 딸 붐부타이[4]를 홍타이지의 복진으로 시집을 보낸다. 시집을 온 붐부타이는 곧 회임을 하였지만 효단문황후와 마찬가지로 딸을 낳았다.1626년,누르하치가 사망하자 여러 부족의 버일러들과 연합한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암바 푸진[5] 아바하이[6]를 압박해 자진토록 하고 칸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서복진[7] 얀자(顔扎)씨가 홍타이지의 4남 예부슈를 낳았고, 제2복진 예허나라씨는 5남 슈사이를 낳았으며, 칸이 된 홍타이지에겐 점점 더 처첩이 늘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차하르의 링단 칸이 사망하면서 링단 칸의 복진들이 홍타이지에게 귀부했는데[8], 그 중 한 명인 파특마조가 홍타이지의 복진이 되었다. 불안해진 효단문황후와 코르친부의 새 버일러 오극선[9]은 붐부타이를 포기하고 코르친부의 세 번째 여인을 보내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붐부타이의 친언니 하이란주이다. 이때 당시의 하이란주는 26세로 이미 한번 혼인을 했던 상태였다.[10]
3. 입궁
코르친부의 위치와 아들을 낳지 못한 효단문황후가 암바 푸진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홍타이지의 복진[11]이 된 하이란주는 그의 총애를 얻는데 성공하고, 이내 홍타이지의 모든 처첩들을 통틀어서 가장 사랑받으며 그의 총애를 완전히 독차지하게 되었다. 숭덕원년 이전엔 동관저궁복진으로 칭해졌다.4. 숭덕오궁의 2인자
1636년 황제로 등극한 홍타이지는 한족 왕조의 후비 제도를 참고해 천총 6년의 동서궁복진 제도를 고치고 가장 지위가 높은 복진들의 작위를 수정하며 오궁복진을 책봉한다.[12] 이 숭덕오궁이라 불리는 오궁복진 중 효단문황후 외의 복진은 한어로 비(妃)라고 칭해지나 이때까지 만주족은 일부다처제 풍습이 강하게 남아있어 이들은 측실이 아니라 정실 취급 받았다. 하이란주의 고모인 두림바이 암바 푸진을 중청녕궁국군복진(中淸寧宫國君福晉)[13]로 삼고, 하이란주를 동관저궁대복진[14]으로, 그녀의 여동생 붐부타이를 서영복궁측복진[15]으로 삼았다.하이란주의 봉호 신(宸)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한자였으며 주어진 관저궁의 궁호와 거처할 궁명은 아래의 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저궁 현판.
게다가 홍타이지는 이 관저궁의 현판을 직접 친필로 썼다고 한다. 이것만 봐도 하이란주를 향한 홍타이지의 어마무시한 사랑을 알 수 있다.
다만 만주어원문은 그 정도로 대단한 의미는 아니며, 만주어를 한어로 번역하면서 생긴 해프닝에 가깝다. 당시 만주족이 한문 학식이 깊지 않은데다 당연히 자기네 말인 만주어 기록을 더욱 중시하기에 청사 연구자들은 한어 기록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하이란주가 받은 대우에 있어서 파격적인 점은 한어로 칭해지는 지위가 아니라 링단 칸의 제1대복진이자 차하르의 태후였던 인지궁귀비와 링단 칸의 복진이었던 연경궁숙비를 제치고 오궁복진의 차석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5. 이름없는 아들
1637년 마침내 첫 회임을 하였다. 하이란주가 아들을 낳으면 황후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낀 군국복진 보르지기트씨가 조카인 붐부타이와 연합하여 홍타이지에게 "하이란주가 회임을 해서 시중을 못 드니 붐부타이가 들게 하라."고 청했고 붐부타이는 언니에게서 홍타이지의 총애를 뺏는데 실패하였지만 이 기회로 회임을 하게 되었다고 알려져있으나 출처가 없다. 다만 아패해부 출신이자 링단 칸의 복진들보다 먼저 하이란주가 회임을 하고 뒤를 이어 붐부타이도 아이를 가지면서 군국복진 보르지기트씨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1637년 음력 7월 8일(양력 8월 27일) 하이란주가 홍타이지의 8남을 출산하게 되자 홍타이지는 크게 기뻐하며 "황제의 자리에 올라 처음으로 태어난 아들이니 진정한 황제의 장자다."라며 전국에 대사면을 선포하였다.[16]
사실 홍타이지가 하이란주의 아들의 탄생을 기뻐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각주에서 설명했다시피 당시 홍타이지에겐 5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서장자 호오거는 적장자여야 했으나 생모 우라나라씨가 누르하치에 의해 폐출되어 적장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외 다른 아들들도 적자가 아니었다.[17] 더군다나 9년동안 황자가 태어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오궁복진,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하이란주가 아들을 낳았으니 진정한 적장자라고 할 만했다. 홍타이지는 이런 소중한 아들의 이름을 다른 아들처럼 가볍게 지을 수 없다며 학식이 뛰어난 유학자들을 모아놓고 아들의 이름을 논의하였다.[18]
그러나 불행히도 다음 해인 1638년 음력 1월 28일(양력 3월 13일) 동생 붐부타이가 훗날 순치제가 되는 홍타이지의 9남을 출산하기 불과 이틀 전에 하이란주의 아들은 한 살도 되기 전에 돌연 급사하였다.
6. 사망
아들이 세상을 떠난 3년 후 하이란주는 급병을 얻게 되어 1641년에 돌연 세상을 떠났다.당시 홍타이지는 명나라 금주성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하이란주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뒤로한 채 5일 밤낮으로 달려 궁에 도착하지만[19] 그녀는 이미 죽은 뒤였다. 홍타이지는 대성통곡을 하다가 하루 동안 실신하였다. 이를 본 문무백관들은 황제가 울다가 죽은 줄 알았다고 전한다.
홍타이지는 실신한지 하루가 지난 뒤 약 6시간 동안 가까스로 차도를 보이다가 깨어났고 이렇게 탄식하였다.
"태조께서 붕어하셨을 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한 여인 때문에 이렇게 무너졌다. 하늘이 짐을 낳아 세상을 돌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는데, 어찌 한 부인만을 위하랴? 짐이 자제하지 못하니 천지와 조종께서 특별히 꾸짖으셨도다."
하지만 이후로도 홍타이지는 자신을 추스리지 못했다. 하이란주를 잃은 홍타이지의 슬픔은 거의 병적으로 되어 그녀의 장례를 국상으로 치렀으며 그 기간에 음악을 연주하며 경의를 표하지 않은 황족 두 명을 처벌하기도 했다.
또한 홍타이지는 하이란주의 시호를 민혜공화원비(敏惠恭和元妃)로 정했다.[20] 하이란주의 죽음 이후 홍타이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이란주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았다면서 공신을 위해 개최한 연회에서도 참석하지 않으며 슬픔에 잠겼다.
하이란주가 죽고 건강이 나빠진 홍타이지는 2년 뒤 효단문황후의 궁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21]
7. 여담
- 위에서 서술된 것처럼 하이란주를 향한 홍타이지의 순애보는 현비 동고씨(賢妃 棟鄂氏)를 향한 순치제의[22] 순애보[23]와 함께 청사(淸史)를 대표하는 3대 로맨스로 꼽힌다.
- 실제 기록을 토대로 하면 같은 홍타이지의 후궁이자 여동생인 효장문황후와는 동복자매인데, 창작물에서는 홍타이지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갈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인지 대부분 이복자매로 묘사된다. 게다가 대부분의 창작물에서 해란주는 남편 홍타이지 관련으로 자매인 효장문황후와 사이가 나쁘다 못해 철천지 원수 지간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두 자매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고 고모이자 홍타이지의 정실인 효단문황후도 그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잘 해주었다. 효장문황후 역시 장비 시절부터 태후가 된 뒤에도 자기 언니에 대해 나쁘게 말한 기록이 단 하나도 없다.
8. 미디어
- 《효장비사((孝庄秘史)》제작:중국 후난TV 배우: 하세비(何赛飞)
아련하고 요염한 모습으로 일찍 출가하지만, 이혼의 아픔을 겪으면서 자존감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후 홍타이지의 환심을 사게 되어 총애를 받게 되면서 점차 교만한 성격으로 변한다. 극단적으로 정신이 쇠약해지다가 이성을 잃고 자매인 대옥아를 괴롭히지만, 죽기 직전이 돼서야 대옥아에게 용서를 빌며 세상을 떠난다.
- 《산하련((山河恋·美人无泪)》제작:중국 강소TV 배우: 장몽(张檬)[24]
정인을 죽인 홍타이지와 혼인하게 되는 비운의 여인이자 대옥아의 이복 언니.[25] 홍타이지가 평생 사랑한 여인이지만 첫사랑 탁림만을[26]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홍타이지와 혼인하였고, 이후 그가 탁림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깊은 혼란에 빠지다가 결국 자살한다. 처음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도 참고 견디는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면서 흑화된 인물.
- 《대옥아전기(大玉儿传奇)》제작:중국 스촨위성TV 배우: 하화(何花)
대옥아의 이복언니이자 친밀한 자매 사이였지만 첩실 소생이였던지라, 정실인 대옥아의 어머니에게 미움을 받아 코르친에서의 성장 과정이 매우 험난했다. 이후 호숫가에서 자살하려다 홍타이지에 의해 실패하면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지만 겁이 많은 탓에 도망친다.
대옥아만을 원하는 에제이와 강제로 혼인을 해서 온갖 시련과 고초를 겪지만 홍타이지에게 구해진다. 처음에는 홍타이지의 명으로 자신의 자살을 막고 구해준 롱거를 좋아지만 거절당하고 도르곤에게 시집가겠다고 했지만, 홍타이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다가오게 되며 천천히 마음을 열어갔다. 사실 홍타이지가 자신이 아닌 도르곤을 사랑하는 대옥아에게 상처받고, 다시 만난 시점이라 일종의 상실감에 대한 위로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도 홍타이지의 큰 안식처가 되어주며 그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 홍타이지는 그간 현모양처로 자신을 물심양면 도와줬던 황후 저르저르를 내치고, 하이란주를 그 자리에 올릴 마음까지 먹었으나 하이란주는 "자신의 그릇은 잘 알고 있으며 조용히 폐하의 아내로 살고 싶다."며 거절한다. 홍타이지가 대옥아에게 국사의 문제를 함께 논의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질투를 느끼긴 했지만, 이 드라마에서도 청순가련하며 홍타이지의 총애를 많이 받는 역할로 나온다.
- 《독보천하(独步天下)》제작:중국 텐센트TV 배우: 당예흔(唐艺昕)
두 번의 생이[27] 끝나고 되살아나서 처음 본 사람이 도르곤이었고, 도르곤의 여자가 될 뻔하다가 빠져나와 여종이 되어 치르하랑 집에 숨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원하던 홍타이지와 재회를 하면서 오극선을 압박하여 오극선의 누이인 코르친부 보르지기트 하이란주가 되어 홍타이지의 복진이 되었다가 홍타이지가 황제가 되면서 관저궁 신비가 되고 둘이 해피엔딩을 맞는 걸로 끝을 맺는다.
- 《소말아전기(苏茉儿传奇)》제작:iQiyi 배우: 마단이(马丹旎)
코르친에 지내다 고모 저르저르와 동생 대옥아를 보러 궁에 잠시 놀라갔다가 홍타이지의 눈에 들게 된다. 저르저르가 아들을 낳지 못해 울면서 대옥아를 홍타이지에게 시집보냈지만 대옥아도 똑같은 처지가 되자, 놀러온 해란주도 홍타이지에게 시집보내려고 한다. 대옥아가 이를 눈치채서 "고모의 말이 되는 것은 나로 족한다."며 언니를 궁에서 내보내기 위하여 소말아와 함께 나가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하이란주는 고향으로 돌아갈지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홍타이지가 자신을 붙잡으며 "앞으로 여기에 지내면 되는거지."라고 하자 그의 후궁이 되어 궁에서 지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시녀가 대옥아를 모함하기 시작하고 이를 믿지 않으려다가, 상황이 우연히 맞아 떨어지면서 여동생을 경계하며 철천지 원수가 된다. 홍타이지에게 계속 어리광을 부리거나 궁에서 나갈 수 있었을 때 소리를 지르는 등, 순한 성격은 아닌 듯 하다. 끝에 가서 자신이 총애를 많이 받으니 "황후의 자리는 내가 오르게 될 것이야."라고 독백하면서 회임한 대옥아와 서로 모른척 지나간다.
[1] Hairanju. 몽골어로 비취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의미는 불명이다. 현재 학자들은 만주어로 '아끼는'이라는 의미인 하이란(hairan), '몹시 아끼는'이라는 의미인 하이란담비(hairandambi)에서 따온 이름으로 추측한다. 만주어 이름이기에 홍타이지가 신비에게 하사한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2] 본명은 보르지기트 붐부타이.[3] 부족장[4] 훗날의 효장문황후[5] 한의 대복진. 후금 시기에는 황후에 해당한다.[6] 도르곤의 생모로 훗날의 효열무황후.[7] 비첩, 호적에 실리지 못하는 첩.[8] 이들이 후금의 황족들과 재혼하면서 기존 황족의 복진들과 친정이 위기감을 느끼고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9] 붐부타이의 오빠이자 효단문황후의 조카.[10] 당시 42세였던 홍타이지보다 16살이나 어렸다. 홍타이지는 1592년생, 하이란주는 1609년생.[11] 하이란주가 계복진으로 알려져 있고 붐부타이가 측복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서에서는 둘 다 복진이다. 붐부타이는 천총 6년 동서궁복진을 책봉할 때 서궁복진에 책봉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12] 이 동서궁복진 제도는 순치제까지 유지됐고, 옹정제부터 황제 등극 시 책봉된 초봉귀비가 이 제도를 상당부분 계승한다.[13] 중궁황후[14] 동관저궁신비(東關雎宮宸妃)[15] 서측영복궁장비(西側永福宮莊妃)[16] 홍타이지에게는 이미 7명의 아들이 있으나 2명은 요절하고 5명이 살아있는 상황이었다.[17] 원비 니오후루씨는 정실부인이었으나 그녀가 낳은 아이들은 일찍 죽었고, 다른 정실 부인인 예허나씨와 동궁복진 보르지기트씨는 폐출되어 그들의 소생은 적출의 지위를 잃고 측생자로 여겨졌다.[18] 이는 이례적인 경우였는데, 만주족은 원래 이름을 의미있게 짓지 않았다.[19] 만주어 기록과 심양일기에서는 말 다섯 필이 달려오다가 지쳐 죽었다고 전한다.[20] 만주어로는 mergen fulehun hūwaliyasun gungnecuke hanciki amba fujin으로 본래 신비에 해당하는 부분인 hanciki amba fujin은 변하지 않았다. 중궁인 효단문황후를 무시하고 하이란주를 원비로 승격했다는 이야기는 한어 기록만 살핀 데서 생긴 오해다.[21] 홍타이지는 본래 만성 두통을 앓고 있었고 하이란주가 죽기 전에도 건강 이상 증세가 있었다. 하이란주의 죽음 때문에 건강이 악화된 것이다.[22] 아이러니하게도 순치제는 하이란주의 여동생 효장문황후가 홍타이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하이란주에게는 조카 겸 의붓아들이 된다. 따라서 순치제를 시작으로 청나라의 역대 황제들은 전부 하이란주의 방계 후손인 셈이다.[23] 순치제 또한 외가인 코르친부의 딸과 정략결혼을 했지만, 후궁인 현비를 유난히 사랑하여 아직 자녀도 없는 그녀를 황귀비로 봉할 정도였다. 하지만 현비도 하이란주처럼 어렵게 낳은 아들이 반년도 살지 못한 채 요절하고 본인도 병사했으며, 이에 극도로 상심한 순치제도 현비를 따라가듯 얼마 가지 않아 서거하였다. 현비 동고씨는 효헌단경황후로 추존되었다. 오죽하면 이에 대해 민간에선 순치제가 정인을 죽인 황궁을 떠나 승려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전설을 배경으로 홍콩의 유명 작가 김용이 대하소설 녹정기를 지었다.[24] 과도한 성형으로 인해 하이란주 시절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25] 이 드라마에서는 이복자매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 효장문황후와 동복자매다.[26] 작중 해란주의 첫사랑이자 가상의 인물이다.[27] 첫 번째는 예허나라 푸이야마라(동가). 두 번째는 보르지기트 부유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