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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20:53:56

효단문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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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청 숭덕제의 황후
孝端文皇后 | 효단문황후
청 순치제조 황태후
파일:효단문황후.jpg
시호 효단정경인의철순자희장민보천협성문황후
(孝端正敬仁懿哲純慈僖莊敏輔天協聖文皇后)
통칭 효단문황후 (孝端文皇后)
지위 대복진⇒중궁대복진⇒황후(중청녕궁국군복진)⇒황태후[1]
이름 보르지기트 저저 (博爾濟吉特 哲哲)
출생 1599년
사망 1649년 (향년 49~50세)
재위 청나라의 황후
1636년 ~ 1643년
청나라의 황태후
1643년 ~ 1649년
배우자 홍타이지 (皇太極)
자녀 황2녀, 황3녀, 황8녀
1. 개요2. 생애 및 가계3. 황태후가 되지 못한 황후4. 자녀들5.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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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의 황후. 몽골 코르친부 출신으로 성은 보르지기트(몽골 제국의 황성 보르지긴)씨이다. 이름은 저저라고 알려져 있다. 저저는 만주어 거거와 마찬가지로 손윗누이를 부르는 호칭이자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에 대한 경칭이다.[2] 건륭제가 초창기 만주어 기록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조종의 이름을 사서에 함부로 기재하지 못하게 되어서 원래 이름이 기록되어 있던 부분은 경칭으로 다시 쓰여졌다는 설이 있다. 홍타이지도 같은 이유로 본명이 홍이냐, 홍타이지냐는 논란이 있다.

2. 생애 및 가계

코르친부 버일러 만고사와 코르친 대비(암바 마마)의 딸이다. 만력 42년(1614년) 홍타이지에게 복진으로 출가하였다. 홍타이지의 원비(元妃) 니오후루씨[3]는 이미 죽었고, 1623년 계비 우라나라씨가 누르하치의 명으로 폐출[4]되어 효단문황후가 가장 서열이 높은 복진이 되었다. 홍타이지와의 사이에서는 만 셋을 두었다.

1626년 홍타이지가 제위에 오르면서 대복진이 되고, 천총 6년(1632년) 중궁과 동서궁 복진을 책봉할 때 중궁대복진(두림바이 암바 푸진)으로 봉해진다.[5]

효단문황후의 어머니인 코르친 대비는 만고사의 손자인 소노무와 수계혼을 하여 두 딸과 치타트라는 아들을 두었다. 효단문황후의 이부여동생들은 각각 도르곤과 도도의 적복진이 되었고, 치타트는 효단문황후의 딸 다르저와 결혼했다. 도도는 코르친 대비의 딸 다르저와 자청해서 결혼했는데, 다르저는 친정이 고귀하고 대복진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형제와 자매 간의 교차 결혼은 좋지 않다는 다이샨의 반대가 있었으나 홍타이지는 이 혼사를 승인했다. 하지만 홍타이지에게 골치가 아픈 문제가 있었으니, 다르저는 소문난 추녀였다.[6] 홍타이지는 도도가 혼인할 때 신부 얼굴을 보고 파토내는 불상사를 피하고자 코르친 대비에게 딸을 데리고 와서 도도와 은밀하게 만나게 하고, 만약 도도가 혼사를 취소하고 싶다고 하면 은밀히 파혼시키려고 했는데, 도도는 다르저의 얼굴을 보고도 혼사를 취소하려 하지 않았다.
효단문황후의 동생들이 도르곤과 도도의 적복진이 되면서 홍타이지가 죽기 전까지 도르곤과 도도는 홍타이지의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숭덕 원년(1636년) 중궁국군복진(중궁황후)에 책봉되었다. 홍타이지에게 사랑받은 해란주(민혜공화원비)와[7] 순치제의 생모인 붐부타이(효장문황후)는 저저의 조카이며, 저저는 혈연상으로 순치제의 대고모에 해당한다. 꼬인 족보.

3. 황태후가 되지 못한 황후

而取考癸未年謄錄, 則進賀方物, 只封於御前·中宮兩處。所謂御前, 則乃新皇帝, 所謂中宮, 則乃前皇帝之中宮也。前皇帝之中宮, 新皇帝登極之後, 當爲皇太后, 而其時未有尊崇之號, 故仍以中宮稱之。
계미년(순치 즉위년) 등록을 취고해보니, 어전과 중궁에게만 방물을 보냈습니다. 소위 어전은 새 황제(순치제)요, 중궁은 전황제의 중궁을 말합니다. 전황제의 중궁은 새황제 등극 후 응당 황태후가 되나, 그때까지 존숭의 호가 없던 고로 중궁으로 칭해졌습니다. -승정원일기 현종 2년 12일 기사

순치제 푸린이 즉위한 후 원칙적으로는 적모로서 모후황태후가 되어야 하나 이를 뚜렷하게 증명하는 기록이 없다. 모후황태후든 성모황태후든, 정식으로 황태후가 됐다면 존호가 있어야 하는데 효단문황후는 황태후로서 존호가 없다. 청조실록에는 효단문황후를 황태후라고 기술하고 당대 조선의 승정원일기에도 효단문황후를 황태후로 기재하고 있으니 황태후 대우를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8]

이때는 도르곤이 섭정왕으로서 군림했던 상황이다. 비록 도르곤과 정백기가 황실 최측근 세력(양황기와 정황기)를 명백하게 압도하지 못하는 형국이었으나 [9] 엄연히 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청초기엔 아직 후비제도가 완비되지 못했다. 그탓에 효단문황후가 홍타이지의 황후이자 순치제의 적모인데도 황태후의 존호가 없는 것이다. 살아서 황태후에 책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후대 황제들도 효단문황후를 청태종의 황후로 존숭했지만 황태후의 존호를 바치지 못했다.

1649년(순치 6년) 자금성에서 서거하였다.

4. 자녀들

5. 미디어



[1] 황태후 존호는 없다. 이유는 아래에 후술.[2] 누르하치의 복진 중 아민저저, 홍타이지의 어머니 몽고저저가 그 예다.[3] 어이두의 딸이다.[4] 우라나라씨는 1623년에 시아버지 누르하치와 시동생인 아지거를 보고도 가마에서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누르하치의 노여움을 사 쫓겨났다.[5] 하지만 이후에도 대복진이라고 불린다.[6] 사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홍타이지가 대놓고 못생겼고 얼굴에 살이 쪘다고 말한다.[7] 홍타이지가 해란주한테 너무 빠져서, 사실상 본인이 데려온 조카임에도 견제했다는 설이 있다.[8] 그러나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문황후는 그마저도 없고 도르곤 사후부터 성모황태후로서 존호를 받았다.[9] 세간의 인식과 달리 도르곤은 절대권력을 휘두르지 못했다. 도르곤과 대립했던 황기 대신들 오보이, 색니 등은 도르곤 섭정 하에서도 무사했다. 도르곤의 정백기가 확고한 권력을 다졌다면 도르곤이 죽은 직후 한순간에 무너질 수가 없다.[10] 옹정황제의 여인의 황후 역으로 알려진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