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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법인 해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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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법인 해성학원|{{{#B82245 {{{+1 학교법인 해성학원}}}}}}]]'''
중학교 고등학교
파일:전주해성중학교 교표.jpg 전주해성중학교 파일:전주성심여자중학교 교표.jpg 전주성심여자중학교 파일:전주해성고등학교 교표.png 전주해성고등학교 파일: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 교표.jpg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

파일:해성학원.png

1. 개요2. 역대 이사장3. 역사
3.1. 여자 중·고등학교3.2. 남녀 공학 중학교 및 남자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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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학교법인 해성학원(海聖學園)은 천주교 전주교구에서 운영하는 가톨릭 사립 학교 재단이다. 현재 천주교 전주교구장인 김선태 사도요한 주교가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며 전임 이사장은 역시 전임 전주교구장이었던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다.

학교법인 해성학원의 역사는 그 이전으로 올라가나 현재와 같은 학교법인 형태로 설립된 시기는 1982년 8월이다. 학교법인 해성학원의 설립으로 인해, 기존에는 천주교 전주교구 유지재단에서 관장하던 교육사업이 학교법인 해성학원으로 이관되었다.

전주해성중·고등학교, 전주성심여자중·고등학교의 총 네 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각각의 학교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전주해성중학교, 전주해성고등학교, 전주성심여자중학교,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 문서 참고.

2. 역대 이사장

<rowcolor=#ffffff><colbgcolor=#b82245><colcolor=#ffffff> 순서 부임일 성명
초대 1960.04.11 김현배 바르톨로메오 주교
2대 1962.12.31 한공렬 베드로 주교
3대 1973.03.19 김재덕 아우구스티노 주교
4대 1982.07.14 김환철 스테파노 신부
5대 1983.01.04 박정일 미카엘 주교
6대 1989.04.10 김환철 스테파노 신부
7대 1990.05.28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8대 2017.05.23 김선태 사도요한 주교

3. 역사

3.1. 여자 중·고등학교

여자 중학교로 전주성심여자중학교, 여자 고등학교로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가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보두네(François Xavier Baudounet) 신부가 전주 전동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은 이듬해인 1890년, 전주의 몇몇 인사가 전주성 내에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인 '학방' 설립을 계획하고, 보두네 신부에게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여러가지 이유로 학방 설립은 천주교의 몫이 되었고 보두네 신부는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 후 1926년, 전주 전동성당 제2대 주임신부로서 보두네 신부의 후임자인 라크루(Marcello Lacrout) 신부[1]는 문맹 퇴치와 교리교육을 위해 최정숙(베아트릭스)을 교사로 두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성당 구내에 교리와 일반 학교의 교과목 중 일부를 가르치는 강습소를 시작하였다.

그 뒤 제5대 전주 전동성당 주임으로 부임한 김양홍 신부가 교우 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주야(晝夜) 강습소를 설립하였고, 학교를 설립할 채비를 하게 되었다. 전동성당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기본 재산을 모으는 데 전력하였고, 이에 호응한 전주의 부호 이학수는 1930년 봄 큰아들 이춘화(토마스)를 시켜 자신의 전답 100여 마지기(약 2만 평)를 학교 설립의 기본 재산으로 기증하였다. 이에 1932년 8월경 교실 4개, 직원실 1개를 갖춘 100평 규모의 벽돌 양옥 교사와 2층 연와제 수녀원이 건축되었다.

느리지만 여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노력으로 점점 구색을 갖추어 오던 전주의 가톨릭학교는 다른 모든 조선의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시련을 맞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3월 3일 제3차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에 해성학원은 1938년 5월 9일 해성 심상소학교로 개교하였다. 일제는 다시 1941년 3월 31일 교육령 일부를 개정해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도록 하면서 한국민족을 말살하려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심화를 기도하여, 당시 최민순 교장 신부[2] 대신에 일본인으로 교장을 임명하였다. 그러다 1945년 4월이 되자 일제는 아예 학교를 폐교시켜버리고 학교 건물을 저금관리국으로 징발하였다.

마침내 해방이 되자, 전동성당은 해성국민학교를 회수하였다. 그 후 전주 전동성당 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한 단계 높은 중등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심여학원이 출발하게 되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보두네 신부가 여성 교육을 시도한지 55년 만에 전주성심여자중학교,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로 숙원사업을 이루게 되었다.

해방 이후 성심여학원은 1946년 8월 1일 인가를 받고, 그해 10월 3일 개교식을 가졌다. 초대 원장은 전동성당 주임 이상화 신부, 부원장은 전동성당 보좌 강윤식 신부였다. 학생 수는 37명이었다. 1947년 2월, 학교 봉헌식을 갖고 주보 성인을 '예수성심'으로 정하였다.

그해 2대 학원장에 이약슬 신부가, 부원장에 김이환 신부가 취임하였다. 성심여학원을 정식 중학교로 인가받게 하기 위한 김이환 신부의 노력으로, 1948년 7월 29일 성심여자초급중학교는 3학급 150명으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김영구 신부가 1948년 9월 1일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9월 16일 개교하였다. 더욱이, 지난 2년간의 여학원 학력이 소급 인가됨으로써 전주성심여자중학교는 개교하자마자 1949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1951년 3월 20일 교육법이 개정되어, 6년의 중학교 과정이 3년 과정으로 학제가 개편되었다. 이에 그해 8월 31일 성심여학원은 성심여자중학교로 개명되었다. 이에 따라 4학년 이상의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해졌다. 이에 재단에서는 고등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1952년 4월 13일 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그해 4월 30일 15명의 학생으로 첫 입학식을 가졌다. 초대 교장은 중학교 교장인 김규승 선생이 겸임하였다.[3] 한편, 성심여자중학교는 1960년 1월 14일 18학급으로 학급이 증가한 후 21학급(1963. 12. 5), 24학급(1966. 11. 17)으로 학급이 계속 증가하여 성장하였다.

성심학교의 교육 이념 가운데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가톨릭 학교답게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존엄성의 고양과 공동선의 추구'이며, 이에 성심학교는 당연하게도 종교 교육에 힘써왔다. 이 종교 교육은 특정 종교의 교리를 강제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교양과목의 성격을 띤 교육이었다. 한편으로 희망자에 한해서 따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4]

전주성심여자중학교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3.2. 남녀 공학 중학교 및 남자 고등학교

남녀 공학 중학교 및 남자 고등학교로 전주해성중학교전주해성고등학교가 있다.

1950년대 말 기준으로 전주교구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은 여성 교육기관인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뿐이었다. 자연히 남매 격의 남성 교육기관 설립이 구상되기 시작하였고, 성심여중고의 전신인 '해성'학교의 명칭을 살려 같은 전통을 잇는다는 계획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학교들이 전주해성중학교전주해성고등학교이다.

처음 해성학교 설립 추진은 SAM회 회원으로 1959년 전주교구에 파견된 벨기에 출신 고마르 신부가 담당하였다. 고마르 신부는 전동 성당 강당을 이용하여 해성학교를 설립하도록 하고, 벨기에에서 후원회원을 모아 학교를 시작할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후, 해성학교 설립 책임자는 고마르 신부에서 후술할 하재홍 신부로 바뀌었다.

당시 제3대 전주교구장 김현배 주교(재임 1847~1960)는 순교 성지인 숲정이에 남자 교육기관 신설을 추진하여 1960년 2월 19일 해성중학교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해, 1학년 70명 2학급으로 개교식과 함께 입학식을 가졌다. 이후, 오스트리아 출신 신부이자 전주해성중학교 제2대 교장이기도 한 하재홍 신부에 의해 중학교에 이은 공업고등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하재홍 신부는 한국의 미래를 생각할 때 인문계 학교보다 기술계 학교를 세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하재홍 신부는 모국 오스트리아에서 모금할 때에도 한국에 기술학교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이후 하재홍 신부가 귀국하게 되고 공업고등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이 부족하게 되자 전주해성고등학교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변경되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전주해성중학교, 전주해성고등학교 문서 참고.


[1] 전동성당 제4대 주임신부이기도 하다. 요즘에서야 한 신부가 같은 성당에 두 번 주임신부로 발령받는 일은 없겠지만, 이 때 한국에는 신부가 흔치 않아서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2] 문학가와 번역자로 유명한 그 분 맞다. 신학을 깊이 공부하지는 않는 평신도더라도 가톨릭 성가 책을 펼쳐보면 여러 곡들의 작사자로 그의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3] 성심여중과 성심여고는 모두 상술한 바와 같은 역사가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김규승 선생을 초대 교장으로 간주한다.[4] 이렇듯 종교 교육에 힘쓰면서도 교리와 신앙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 한국 가톨릭 학교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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