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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촬영된 헌릉의 모습[1] |
2020년 촬영된 헌릉의 모습 |
憲陵
북한 개성시 삼거리에 위치한 고려 제4대 국왕 광종과 왕비 대목왕후 황보씨가 안장된 왕릉. 인터넷상에 퍼진 사진이나 위성지도로 봤을 때 관리 상태는 매우 좋지 못해 보인다.
975년(경종 즉위년) 5월 23일 광종이 승하하자 송악산의 북쪽 기슭에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헌릉(憲陵)이라 하였다. 관련된 기록이 고려사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고려사 기사
26년(975) 여름 5월 왕이 편찮아 갑오에 정침(正寢)에서 훙서하니, 왕위에 있은 지 26년이며 나이는 51세였다. 왕이 즉위한 처음에는 신하를 예절로 대우하고 정사 처리에 밝았으며,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보고 선비들을 존중하였다.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으니 거의 치평(治平)에 이르렀다. 중반 이후로는 참소(讒訴)를 믿어 사람들을 많이 죽였고 지나치게 불법(佛法)을 믿었으며 절제함이 없이 사치하였다. 시호(諡號)를 일러 대성(大成)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광종(光宗)이라 하였으며, 송악산(松嶽山)의 북쪽 기슭에 장사 지내고 능호(陵號)를 헌릉(憲陵)이라 하였다. 목종(穆宗) 5년(1002)에 시호에 선열(宣烈)을 덧붙이고, 현종(顯宗) 5년(1014)에 평세(平世)를 더하였으며, 〈같은 왕〉 18년(1027)에 숙헌(肅憲)을 더하고, 문종(文宗) 10년(1056)에 의효(懿孝)를 덧붙였으며, 고종(高宗) 40년(1253)에 강혜(康惠)를 더하였다.
광종의 왕비인 대목왕후는 정확한 생몰년이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2] 헌릉에 합장되었는지도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훙서하고 나서 시호(諡號)를 대목왕후라 하고 광종과 함께 부묘(祔廟)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1910년대에 찍은 사진을 보면 능 구역은 3단면으로 이루어져 그 좌 ·우 ·후방의 3면에 돌담장(곡장)을 둘렀던 흔적이 있다. 1단은 1.65m 높이의 토류석벽(土留石壁)으로 2단과 구별했고, 여기에 능과 돌난간, 돌짐승(石獸)이 남아 있었다. 높이 70cm의 12각형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이 밖에 망주석과 석상(石床)이 남아 있었다. 2단에는 장명등(長明燈)과 석인(石人) 한 쌍이 좌우에 있고, 3단면에는 조선 후기에 세운 능비가 있었다. 정자각은 터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원래 위치를 알려준다. 그러나 2017년에 촬영된 헌릉 사진을 보면 묘역 주변의 울창했던 산림은 훼손됐고, 돌담장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2단 양쪽에 설치돼 있던 너비 1.8m의 계단도 완전히 없어졌고, 묘비도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의 보고서에 보면 4구의 석수가 남아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진 듯하다. 과거 학계에서는 헌릉의 석물들이 훼손된 데 비해 축대나 초석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능 구역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평가했지만, 최근 입수된 사진으로 보면 1단과 2단 사이의 축댓돌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정자각 터에 있던 돌들을 모아 보수해 놓았다. 원형이 아예 사라진 것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이 뉴시스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헌릉에서 동북쪽으로 13km 거리에 박연폭포가 나오고, 박연폭포 남쪽에 광종 21년(970년)에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한 관음사가 있지만 2007년 개성관광 시작되었을 때도 박연폭포와 관음사만 관광코스에 포함되었지 헌릉은 포함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헌릉이 위치한 곳이 개성에서도 외지에 해당하는 곳이다보니 북쪽 사람들도 박연폭포나 관음사를 찾지 가까운 곳에 헌릉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고... 광종이 생전에 휘둘렀던 철혈의 절대왕권을 생각하면 새삼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