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토르 후팅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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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5대, 8대 |
이름 | 헥토르 "토르턴" 후팅크 (Hector "Torten" Goetinck) |
생년월일 | 1886년 3월 5일 |
사망년월일 | 1943년 6월 26일 |
국적 | 벨기에 |
출신지 | 브뤼헤 |
포지션 | 하프백 |
신체조건 | 불명 |
소속팀 | 클뤼프 브뤼허 KV (1903-1914) 클뤼프 브뤼허 KV (1919-1928)[1] |
감독 | 클뤼프 브뤼허 KV (1930-1933) 벨기에 대표팀 (1930-1934) AS 오스텐더 (1937-1939) 벨기에 대표팀 (1939-1940) |
국가대표 | 17경기 / 2골(1906-1923) |
1. 생애[2]
1.1. 선수 생활
1.1.1. 클럽
후팅크는 헤이스트(Heist)에서 자랐고 10살 무렵부터 축구와 접점을 가졌다. 10살부터 클뤼프 브뤼허 KV의 유스팀에 들어간 후팅크는 1902년부터 팀의 1군 로스터에 들어갔고 처음에는 레프트 하프백이었지만 전성기때는 라이트 하프백으로 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후팅크는 팀의 주축 선수로 자리매김했고 1차 대전 이전 클뤼프 브뤼허의 3차례 프리미에 디비지옹 준우승에 기여했다.세계 대전 동안에 클뤼프 브뤼허는 잉글랜드,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로 투어를 다녔고 5년의 공백 이후 다시 치러진 리그에서 클뤼프 브뤼허는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후팅크는 모두 27시즌을 클뤼프 브뤼허에서만 보냈고 15시즌을 팀의 주장으로 활약했다.
후팅크는 372경기 출전, 72골의 기록을 남겼다.
1.1.2. 국가대표
후팅크의 A매치 데뷔전은 1906년 4월 22일의 프랑스전이었고 벨기에는 프랑스를 5대0으로 대파했다.1914년 이후 전쟁으로 대표팀 커리어가 중단되었고 후팅크는 9년 후인 1923년에 마지막 대표팀 경기를 치렀다.
그는 통산 17경기 출전, 2골을 기록했다.
1.2. 감독
선수 생활을 마친 후 후팅크는 친정팀 클뤼프 브뤼허와 벨기에 대표팀 감독을 겸임했다.당시 후팅크는 혁명적인 훈련법을 도입했는데 근력과 폭발력을 기르기 위해 선수들에게 모래 언덕을 오르내리게 했다고 한다.
후팅크는 벨기에 대표팀을 이끌고 FIFA 월드컵에 2차례 참가했지만 벨기에는 단 한 차례도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다.
1.3. 사망
후팅크는 1943년, 헤이스트의 한 호텔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2. 수상
2.1. 클럽[3]
- 프리미에 디비지옹 우승 1회: 1919-20
- 프리미에 디비지옹 준우승 3회: 1905–06, 1909–10, 1910–11
- 벨지안 컵 준우승 1회: 19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