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현득남(玄得男) |
본관 | 연주 현씨[1] |
출생 | 1891년 11월 17일 |
함경도 명천현 하가사 원향리 (현 함경북도 화대군 화대읍) | |
사망 | 미상 |
상훈 | 건국포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1년 11월 17일 함경도 명천현 하가사 원향리(현 함경북도 화대군 화대읍)에서 아버지 현준섭(玄俊燮)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한철(金漢哲)의 딸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9년 3월 14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시장에서 김성련(金成鍊)·김상훈(金相勛)·최우용·김익련(金益鍊) 등과 이튿날인 15일에 화대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15일 아침 큰 기를 들고 군중들과 함께 상가면 조당리(潮塘里)에 모여서, 함께 시장으로 가서 만세를 불렀다. 그를 비롯한 1,000여 명의 시위군중들은 하가면사무소에 이르러 하가면장 동필한(董弼漢)에 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였으나 면장이 이를 거부하자 현용묵이 면장의 목을 졸랐다. 동필한 면장이 헌병분견대로 도망가자 시위군중들은 다시 헌병분견대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장을 내 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길주헌병대에서 온 제27연대 소속 기마 헌병 13명이 경찰과 함께 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4명이 죽고 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때 면장이 군대를 요청했다는 말이 나돌자 성난 군중들은 하가면사무소로 몰려가 불을 지르고 동필한의 집과 면사무소 회계원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이후 체포된 그는 1919년 7월 9일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및 벌금 30원, 30일간의 노역을 선고받아 공소했으며#, 같은 해 8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 중 일부가 취소되고 소요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어 일부 감형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했으나 그해 11월 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면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7일 출옥하였으나 출옥 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 판윤공파 28세 용(龍)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