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우옌 왕조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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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 응우옌 왕조 제12대 황제 카이딘 황제 啓定帝 | Khải Địn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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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85년 10월 8일 | ||
| 프랑스령 안남 보호령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 |||
| 사망 | 1925년 11월 6일 (향년 40세) | ||
| 프랑스령 안남 보호령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 |||
| 능묘 | 응릉(應陵) | ||
| 재위기간 | 제12대 황제 | ||
| 1916년 5월 18일 ~ 1925년 11월 6일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 성씨 | 응우옌(Nguyễn, 阮/완) | |
| 휘 | 푹브우다오(Phúc Bửu Đảo, 福寶嶹/복보도) → 푹뚜언(Phúc Tuấn, 福昶/복창) | ||
| 부모 | 부황 경종 순황제 모후 우천순황후 | ||
| 형제자매 | 6남 4녀 중 장남 | ||
| 배우자 | 단휘황태후 외 | ||
| 자녀 | 1남 | ||
| 묘호 | 홍종(弘宗) | ||
| 시호 | 사천가운성명신지인효성경이모승열선황제 (嗣天嘉運聖明神智仁孝誠敬貽謨承烈宣皇帝) | ||
| 연호 | 카이딘(Khải Định, 啓定/계정, 1916년 ~ 1925년) | ||
1. 소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제12대 황제. 묘호는 홍종(弘宗), 시호는 사천가운성명신지인효성경이모승열선황제(嗣天嘉運聖明神智仁孝誠敬貽謨承烈宣皇帝). 즉위 전 이름은 완복보도(阮福寶嶹)이었으나, 즉위 후에 이름을 완복창(阮福昶)으로 고쳤다. 경종 동경제(景宗 同慶帝)의 아들. 유신제(維新帝)의 숙부. (Nguyễn Phúc Cường 응웬 푹 끄엉 / 완복창의 베트남어 표기이다.)2. 생애
1916년, 유신제가 폐위되자, 그 뒤를 이어서 황제로 즉위했다. 계정제는 베트남 제국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프랑스의 도움과 협력을 받지 않았다 라고 스스로는 생각했지만, 전세계는 베트남을 프랑스의 식민지로 인정하고 있었다.1919년, 계정제는 베트남의 문자로 한자(쯔놈) 대신 오늘날의 쯔꾸옥응으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해의 시험을 끝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었다.
1922년 '자발적으로' 프랑스로 출국하여 마르세유에서 열린 박람회를 둘러보았다. 베트남 사상 군주가 자의로 해외로 나간 것은 그때가 최초였다. 프랑스의 요구가 없음에도 '알아서 기는' 황제의 행보에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은 크게 분노했고, 급기야 판쩌우찐(Phan Châu Trinh, 潘周楨, 반주정, 1872~1926)[1] 사치와 도박을 좋아하는 것을 포함한 황제의 7가지 결점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편지를 적었을 정도이다.
1924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후 자신의 탄신일 행사를 토지세까지 30% 인상해 가며 매우 성대하게 치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행사 규모가 컸는지 황실 재정이 모두 바닥날 지경이었다. 이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에게 엄청나게 까였다.
1925년, 40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하였는데, 그가 묻혔던 응릉([ruby(Ứng lăng, ruby= 應 陵)])은 계정제가 사망하기 5년 전인 1920년부터 만들기 시작하였고, 1931년에 완성된 황릉이다. 이 황릉은 베트남 황릉 및 다른 국가의 황릉과는 다른 모습인데, 그 이유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로 인하여 서양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외아들인 보대제 완복전이 황제가 되었다.
3. 가족
- 황귀비[2] 張如氏靜(Trương Như Thị Tịnh) - 1889~1968
- 1급 은비(恩妃) 胡氏芷(Hồ Thị Chỉ) - 1902~1985
- 1급 후비(厚妃)→단휘황태후(端徽皇太后) 黃氏菊(Hoàng Thị Cúc) - 1890~1980
어느 후궁이 계정제가 "성에 흥미없어 한다"는 글을 남겼을 정도로 많은 여자를 두지 않았고, 자녀들도 많지 않았다.
[1] 판쭈찐(Phan Chu Trinh)이라고도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근왕운동에 참여했다가 왕을 배반했다는 혐의로 부당하게 처형된 과거와 후에 에서 경험한 조정 내 부패 때문에 베트남의 군주정을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는 인물이었다. (이 점 때문에 입헌군주제를 추구하던 판보이쩌우가 그와 토론해 보고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지만 그의 자신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독립하면 다른 세력에게 주권을 잃을 것을 우려해서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근대화를 이룬 후 독립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2] 응우옌 왕조의 후궁 제도에는 대부분 황후가 없이 황귀비가 사실상 황후 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