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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29 09:49:00

황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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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黃世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북한의 정치인, 법조인.

2. 생애

일제시대 감시카드에 따르면 1909년 9월 5일, 함경남도 영흥군(오늘날의 금야군) 인흥면 송현리에서 태어났다. 1933년 6월 30일, 농민운동을 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무려 10년이나 투옥되었다.

해방 후 1948년 9월, 최고재판소가 구성되자 최고재판소 판사에 선거되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최고재판소 민사부의장에 선출, 이후 최고재판소 부소장까지 승진하였다. 1956년 3월 13일, 조성모의 뒤를 이어 최고재판소장으로 선거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9월, 사법성에서 열린 당회의에서 반혁명혐의로 체포된 가톨릭 사제들의 형기가 만료되기 전에 석방해준 혐의로 비판을 받고 1957년 9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최고재판소장에서 해임, 도시경영성 부상 김하운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조성모, 박용숙 등 다른 함경도 공산주의자 출신 법조인들과 함께 김일성에게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지난날에 혁명을 좀 했다거나 감옥생활을 좀 했다고 하면 무조건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어떤 사람들은 혁명을 했다는것은 오래전 일이고 오래동안 혁명사업에서 떨어져 장사도 하고 술집도 경영하였으며 혁명을 하는 동안에도 옳은 당적지도를 받지 못하여 무엇이 종파주의이고 무엇이 지방주의이고 무엇이 가족주의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몇십년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끼리 찾아다니면서 나쁜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잘 알아보지 않고 등용배치한 결과 당에 커다란 손해를 끼쳤습니다. 실례로 전 사법성 부상 박용숙이나 전 검사총장 조성모같은 자들은 확실히 잘못 등용하였습니다. 최고재판소 소장 황세환 같은자도 지난날 영흥농조에선가 무엇을 좀 했다고 하여 올려놓았는데 사법부문 사업에 많은 해독을 끼쳤습니다.

1958년 3월 전원회의에서 철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비참하게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