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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41:30

후장(동음이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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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厚葬(장례)2. 後場(주식 용어)3. 後章(글)4. 後場(시장)5. 後裝(총기 용어)6.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이여수스의 멸칭

1. 厚葬(장례)

후하게 장례를 치른다는 표현. 연맹왕국 시대의 부여, 고구려의 풍습이다. 후하게 장례를 치러 내세를 도모하기 위하여 서너달간 시체가 썩지 않도록 얼음도 가져다가 오랫동안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고고학/역사고고학에서는 삼국시대의 고분 문화 전반을 대표하는 여러 특징 중의 하나를 후장이라고 하며, 위의 역사학에서 용어보다는 포괄적으로 사용한다. 한국과 유사한 장례문화를 영유하였던 일본의 경우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를 아예 고분시대라고 표현하는데, 시대를 대표하는 개념으로써 '고분'이라는 것을 설정한 것은 바로 해당 시기의 사람들이 고분을 축조하는 데에 많은 공력을 들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무덤을 만듦으로써 무덤에 묻히는 사람의 위세, 그리고 그 장례를 주관하는 사람, 가족들의 위엄을 현세에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이 그 이유이다.[1] 그러한 이유 속에서 장례를 함에 있어 많은 금공품과 장식품, 다량의 부장품을 매납함으로써 위신을 뽐냈고 이러한 현상을 후장이라고 표현한다. 순장도 사람을 일종의 부장품으로 보는 것으로 후장에 해당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후장의 풍습은 위처럼 내세사상에 기반한 현상으로써 한반도 기준 5~6세기를 거치면서 불교라는 사상이 국가적 종교로 자리잡기 시작함과 동시에 기존의 내세사상을 불교적인 사상이 대체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굳이 무덤을 크고 화려한 부장품들을 묻을 필요성이 사라진 것으로 이 시점의 고분문화, 장례문화는 간소해지는데, 이 시점에는 반의어로써 굳이 직역하면 박하게 장례를 치른다는 의미로 박장(薄葬)이라고 표현한다.[2]

명칭이야 다르지만 많은 값진 부장품을 후하게 묻어 장례를 치른다는 부분에서 유사한 풍습은 아시아권 뿐만이 아니라 서구권 쪽에서도 존재했다. 그리고 후장의 풍습으로 장례를 치른 이들의 무덤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도굴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3] 또한 단순히 무덤에 뭘 많이 넣는 것은 물론, 무덤 그 자체에도 엄청나게 공을 쏟아 대규모로 만드는게 후장에 따라오게 되자 무덤을 만드는데도 필연적으로 인력과 돈이 많이 들어가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만력제의 명십삼릉이 대표적.[4]

2. 後場(주식 용어)

증권거래소에서 하루 매매거래가 이루어지는 입회의 구분명칭. 오전 거래를 전장이라고 하고 오후 거래를 후장이라고 한다. 2000년까지도 점심시간엔 주식시장을 잠시 쉬었던 적이 있었으며, 점심시간 앞이면 전장이고 뒤면 후장이라고 했다.

일본, 홍콩 주식시장에서는 아직 점심시간을 두고 있다. 11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가 점심시간이다.

3. 後章(글)

글을 장으로 나눌 시에 뒤에 나오는 장

4. 後場(시장)

다음에 서는 장.

5. 後裝(총기 용어)

총기의 장전 방식 중 하나. 후장식 문서 참고

6.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이여수스의 멸칭

WHO(후)의 사무총장(장)을 줄인 것으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친중 발언과 미흡한 대처로 인해 한국에서 만든 멸칭이다. 후장의 의미를 노린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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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고 이러한 대형의 왕릉들은 단적으로 통일신라시대, 남북국시대 이후로 살펴보면 삼국시대의 그것에 비해서 현격하게 규모가 작아진 것을 볼 수 있다.[2] 후장이 흔하던 시절에도 박장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조조. 박장을 하던 이들 중에선 후장을 했다가 도굴당할걸 염려해서 박장을 하던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 중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여러 곳에 가짜 장례를 치르게 해서 도굴꾼이 무덤 위치를 가늠하지 못하게 꼼수부리던 지배자도 있었다고.[3] 이 과정에서 고인능욕을 물론 문화유산 훼손이 일어나기도 했다. 심지어 학자들 중에서도 도굴을 자행한 이들이 실제로 있었다.[4] 만력제는 통치시기에 낭비를 크게 일삼았는데 이 무덤 만드는데 돈 퍼붓던 것이 그 대표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