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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7 06:01:55

흐웨이/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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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어스름한 빛에 담긴 그림

1. 장문 배경

아이오니아 북서부의 코이엔섬은 아름답고 평온한 곳이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사장과 계절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시장, 고즈넉한 산골 마을 사이로 코이엔 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코이엔 사원은 예술가의 요람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루카이 흐웨이는 코이엔 사원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태어났다.

흐웨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럽고 사려 깊었다. 주변 세상을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관점에서 보면서, 날것 그대로의 몽상을 화폭에 담아내는 데 몰두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물론 흐웨이 역시 환상이 현실과는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흐웨이는 이런 환상을 통해 인생 그 자체를 예술로 보게 되었다. 이렇게 세상의 명암에 깊이 동화된 흐웨이는 마음 상태나 분위기에 따라 눈 색깔이 변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다.

흐웨이는 작품을 감상하는 이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한편, 생동감 넘치는 상상력을 표출할 수단으로 그림 마법을 택했다. 다만 폭주했다간 정신적 자각과 육체적 감각을 허물어뜨릴 위험도 존재했기에, 철저한 통제와 수양이 필요했다. 그림 마법 수련자 중에서도 자신의 예술가적 기질을 통제하지 못하거나, 그러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는 물론이요 공동체에도 위협이 되었기에 코이엔섬에서 추방되었다.

어린 흐웨이는 엄격한 계율 아래에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길 주저하지 않았다. 사원 스승들 앞에서 실기 시험을 치를 때, 흐웨이는 코이엔의 바다를 재현해 내었다. 물감이 화폭에 흐르는 찰나, 흐웨이의 통제력이 흐려졌다. 순간, 감정이 거친 파도처럼 몰아쳤다. 드넓은 대양처럼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흐웨이는 그 아름다움에 굴복하고 말았다. 곧이어 흐웨이의 시선이 암전되었다. 흐웨이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경악한 스승들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었다.

흐웨이는 며칠 후 의식을 찾았다. 스승들은 무사했지만, 격분한 표정으로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사원의 후계자를 추방할 순 없었지만, 스승들은 책임감을 거듭 강조했다. 흐웨이는 자신의 힘이 두려우면서도 그 깊이에 매료되었다. 흐웨이는 자신의 힘을 조금 더 탐구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흐웨이는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사원의 계율을 따랐지만, 밤에 혼자 남았을 때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했다. 이 힘이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알고 싶었다. 이 수련은 흐웨이의 상상력을 더욱더 강렬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마법 물감이 가득한 팔레트를 실체화할 경지에 올랐다.

성인이 된 흐웨이는 어엿한 한 명의 거장이 되어 있었다. 흐웨이는 열정과 겸허함을 바탕으로 사원을 물려받을 준비를 했고, 동기들은 존경과 애정이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흐웨이의 마음 한구석은 영원토록 물러가지 않을 땅거미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던 중 어떤 예술가가 사원을 찾아왔다. 바로 카다 진이었다.

금빛으로 찬연하게 빛나는 여름이었다. 흐웨이는 진과 동행하며 코이엔섬을 두루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자주 창의적 관점을 교류했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했다. 진의 재능을 알아본 흐웨이 역시 진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진은 떠나기 전날 밤, 흐웨이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진은 이미 흐웨이가 타인들에게 내보이는 모습이 꾸며낸 허울임을 간파해냈던 것이다. 진은 흐웨이의 본모습을 보기 원했다. 흐웨이는 한사코 부정했지만,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무의미한 작품을 만들며 허송세월하지 않았던가. 흐웨이의 창의력은 카타르시스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흐웨이는 붓을 들었다.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실력이 붓에 녹아들었다. 찬란하고 무한한 흐웨이의 정신에 물든 밤은 마치 생명을 얻은 듯이 춤췄다. 조화롭고 생생한 감정이 쏟아져 들어왔다. 흐웨이는 두 팔을 벌린 채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금단의 환영을 타인과 나누는 경험은 황홀경 그 자체였다. 그리고 흐웨이의 작품에 담긴 힘, 바로 유대와 영감, 자유분방한 창의성까지 돋보이게 했다.

진은 이 모든 광경을 두 눈에 담았다. 곧이어 그는 알기 어려운 눈빛과 어조로 작별을 고했다. 내일 '연꽃의 개화를 감상하러 떠난다'는 말과 함께.

이튿날 동이 텄을 때, 비극이 흐웨이와 동료 화가들에게 연이어 찾아왔다.

첫 번째 비극은 역사적인 그림 4점이 파괴된 것이었다.

두 번째 비극은 가지런히 나열된 4구의 시신이었다. 흐웨이가 어린 시절 목숨을 앗아갈 뻔한 스승들이었다.

세 번째 비극은 사원 최하층 4곳에서 시작된 맹렬한 불길이었다.

불길 속에서 흐웨이는 형형색색의 빛깔로 물든 세상을 떠올렸다. 흐웨이의 내면에 담긴 세계가 세상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리도록 섬뜩했다. 또한 아름다웠으며, 가히... 예술적이었다. 파멸. 황폐. 고통. 흐웨이는 자신의 힘에 담긴 음험한 잠재력을 인지했고, 어렸을 때 느꼈던 공포와 미혹을 다시금 느꼈다.

사원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붕괴했고, 폐허 속에서 흐웨이만이 홀로 살아남았다.

흐웨이는 피로와 죄책감에 찌든 채 깊은 비탄에 잠겼다. 그 와중에도 상상력은 폭주하고 있었고, 참사가 일어나던 모든 순간을 되풀이했다.

흐웨이와 시골 마을 주민들은 낮에 사망자들의 시신을 묻어 주었다. 흐웨이는 밤이면 밤마다 잿빛으로 물든 폐허를 다시 찾아 붓을 들었다. 흐웨이의 팔레트는 가슴을 꾸민 장식처럼 코이엔 문장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잔해 밑에 웬 함정 잔재가 있었다. 연꽃을 연상케 하는 형태였다.

흐웨이는 이 참극을 일으킨 범인의 정체를 깨달았고, 쏟아지는 감정에 삼켜졌다. 공포. 슬픔. 배신감... 경외.

내면에서 한 가지 의문이 타올랐다. 대체, 왜?

내가 원하는 건 해답이 맞을까? 이 욕망을 억누르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코이엔섬에 남아 후계자로서 동료들과 재건에 힘써도 될 일이다. 아니면...

흐웨이는 붓과 팔레트만을 챙겼고, 동료들을 뒤로한 채 섬을 떠났다.

그 이후로 흐웨이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타인에게 완연히 드러냈을 때 비로소 해답을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흐웨이는 아이오니아 암흑가에서 극악무도한 자들을 뒤쫓아 고통이 만연하는 세계를 선사한다. 자신의 깊은 고통을 이해하고 싶은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흐웨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이오니아가 낳은 희생자들에게, 자신과 같은 목격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함께 평온과 성찰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말이다.

잿더미를 딛고 일어난 가차 없는 화가. 평화로운 섬에서 온 마음씨 고운 사람. 두 가지 면모를 모두 갖춘 흐웨이는 아이오니아와 자신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색채의 충돌을 직시했다. 그렇게 흐웨이는 더욱더 깊은 그림자로 걸음을 내디디면서도 가능성이 넘쳐나는 마음으로 길을 밝혀나가고 있다.

어느 면모가 최후의 승리를 거머쥘지는 두고 볼 일이다.

2. 어스름한 빛에 담긴 그림

환상이 쏟아진다.

오늘 밤 내 마음에 자비는 없다.

숲에 선 나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잠기는 그곳의 모습을 상상한다. 풀이 녹는다. 바위가 소용돌이치며 일그러진 얼굴로 변한다. 액체가 된 잎은 가지를 타고 피처럼 뚝뚝 떨어지며 웅덩이를 만든다.

달은 감긴 눈이다.

붓을 손에 쥐자 나의 영묘한 팔레트가 나타난다.

다시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다시 그리며 다시 경험한다...

파일:Image_1_Burning.jpg

내 앞의 한 남자가 자신의 무기고에서 불탔다.

우리 주위로 동이 틀 무렵의 색상을 품은 그림 화염이 맹렬히 이글거렸다. 그 황금빛 중심이 고통과 함께, 남자의 무기가 만든 모든 상처와 함께 고동쳤다. 불길은 벽을 타고 올랐지만 불붙지 않았다. 재도 연기도 내지 않고 그저 나의 의지만큼만 번질 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타오르는 그 어떤 불보다 강렬하고 격렬했다.

남자가 몸부림쳤다. 남자의 감각은 뼛속까지 타올랐다. 남자는 톱날 달린 칼이 늘어선 무기 걸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녹서스 강철로 만든 카슈리의 작품이었다.

카슈리, 생각이 떠오른다. 코이엔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여기 있는 칼은 도륙에 쓰인 것이었다. 남자는 고통을 가했으니 고통을 받아야 마땅했다.

나는 대장간의 불꽃을 일으키며 그에게서 대답을 끌어냈다. 누구와 함께 일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숨을 헐떡일 때마다 남자의 분노가 팽팽해졌다. 그림이 남자의 눈 속에서 요동치며 분노를 고스란히 비추었다.

그는 고통을 멈추기 위해 무엇이든 주겠다고 했다. 돈. 무기. 자신의 손으로 하는 복수. 하지만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사이의 이 순간이었다. 내가 짊어졌던 모든 환상이 그의 짐이 되었다. 나의 상상에서 치솟은 불이 그의 상상으로 옮아가며 내 마음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나는 내 예술이 남자를 파괴하지 않게 막았다. 이제 우리 둘 다 이 흔적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지옥불 속에서 질식해 가는 남자와 달리 난 그 안에서 살아남는다.

파도가 나를 끌어당긴다. 나는 다시 그리며 다시 경험한다...

파일:Image_2_Drowning.jpg

한 여자가 나를 태우고 거친 물을 건넜다.

우리 주위로 황금빛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등불에 이끌린 벌레 떼의 움직임에 빛이 얼룩덜룩했다.

우린 서로 마주 앉았다. 파도에서 올라온 해초가 노를 붙들었다. 내 마음의 샘에서 수련이 자라났다. 공물이다. 나는 그것을 형상화했다. 해초가 그림 꽃을 대신 가져가 떼어 내어 버렸다.

여자의 손이 리듬을 찾았다. 여자는 이 물길이 항상 이런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여자는 약탈자와 무기 밀수업자, 암살자를 태우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닌 어두운 의도가 스며든 수로는 점차 탁하게 병들어 갔다.

여자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팔레트에서 색을 모으고 여자가 젓는 노의 움직임에 맞춰 수련과 새로운 생명을 만들었다. 노을빛 자두색과 주황색을 지닌 잉어였다. 나는 여자가 고통의 이면에서 다정한 기억을 떠올리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 여자가 짊어졌던 모든 것이 나의 짐이 되었다.

자신의 안에 있는 작품들을 채찍질하던 운하가 그것들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여자의 눈가에 잡힌 주름이 온화한 기쁨으로 접혔다.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서 새가 지저귀었다.

안정을 되찾은 생각과 손이 우리를 더 안전한 기슭으로 데려다주었다.

내 마음속에는 빛이 있다. 나는 그것을 선택해 그릴 수 있다. 하지만... 빛은 언제나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는 다시 그리며 다시 경험한다...

파일:00Header.jpg

코이엔의 작업실에서 한 예술가가 내 옆에 서 있다.

우리 주위로 촛불이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열린 창문 아래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이빨 같은 바다 거품과 함께 아가리를 벌리는 보라색 협곡이 스스로를 계속해서 먹어 치웠다. 코이엔 사원의 마지막이 될 밤이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야." 진이 말했다.

그는 타오르는 양초를 바라봤다. 나는 파도를 응시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즐거웠길 바라지." 내가 말했다.

그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파도가 자신이 부딪치는 바위에 어떤 감정을 느낄까?"

난 온갖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감정적이다. 변덕스러우면서 조화롭다.

"아무것도 못 느끼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코이엔에 대한 감정이 고작 그 정도는 아니겠지?"

"이곳은 내가 보고자 했던 모든 걸 보여 줬어. 마지막 한 작품만 빼고 말이야."

그는 나를 돌아봤다. 나도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게 뭔데?"

"흐웨이, 네... 그림이야. 진정한 그림 말이지. 난 강요된 예술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어. 넌 항상 무언가를 숨기더군. 그게 뭔지 알고 싶어."

눈이 번쩍 뜨였다. 그때 내 눈이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안에서 휘몰아치던, 진이 발견한 것이 두려웠다.

"무슨 말이지? 난 늘 진심이야."

눈을 뜬 캔버스가 진에게서 뭔가를 찾아 헤맨다. 시기, 분개, 열정, 슬픔... 그를 설명할 그 어떤 감정이라도 찾으려고 한다.

우리가 다시 만나면 전과 같이 그를 맞이하리라. 함께 밥을 먹으리라. 새로운 시야에서 그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리라. 왜 코이엔이냐고, 왜 나냐고 물어보리라. 그리고 내가 아는 그를 그리며 그의 살인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 고통에 찬 얼굴에 색을 돌려주리라. 그것은 우리를 아주 밝은 어둠으로 감싸 눈이 부시게 할 것이다. 눈이 부시다 못해 마침내 자유로워지리라.

예술은 나를 살리지만 나를 부술 수도 있다. 어떨 때는 내가 이미 길을 잃은 것 같다.

진이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는 내 예술을 드러내라며 날 설득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과거의 나를 저지하기 위해 팔을 그린다. 노려보기 위해 눈을 그린다.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그린다. 그와 동시에 팔은 밀어 내고 눈은 주시하며 입은 부추긴다.

과거와 현재에서, 나는 붓을 들어 올린다...

파일:Image_4_Crying.jpg

오늘 밤의 그림을 마무리했다.

검은색과 금색이 내 주위를 감쌌다. 땅의 균열, 그 틈에서 나오는 빛, 금을 입힌 우리 안의 꾀꼬리, 핏발이 잔뜩 선 눈의 무한함.

달이 목격한다. 코이엔, 진, 그 밑에 있는 모든 것을 덮는다. 나는 여전히 홀로 남아 있다.

환상이 폭발한다. 그 자리에 숲이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팔레트가 사라진다.

깨어난 나는 다음 작품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