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 Die Reichspräsidentenwahl 1925 | |||||||||
후보자들의 지역별 우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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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율 | 77.0% | ||||||||
선거 결과 | |||||||||
후보 | 빌헬름 마르크스 | 에른스트 텔만 | [[무소속(정치)| 무소속 ]]파울 힌덴부르크 | ||||||
득표율 | |||||||||
45.3% | 6.4% | 48.3% | |||||||
득표수 | 13,751,605 | 1,931,151 | 14,655,641 | ||||||
당선인 | |||||||||
무소속 파울 폰 힌덴부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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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치러진 독일 역사상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 1차 대전 당시 독일 제국 참모총장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2. 후보
결선 투표에 참여한 최종 후보<rowcolor=#707070> 후보 | 정당 | 지지 정당 |
빌헬름 마르크스 | | · |
에른스트 텔만 | | |
파울 폰 힌덴부르크[A]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 · 독일 중간계급 제국당 · 독일 민족자유운동 |
- [1차 투표에만 참여한 후보 펼치기·접기]
- ||<rowcolor=#707070><rowbgcolor=#f0f0f0,#333><width=25%> 후보 ||<width=20%> 정당 ||<width=55%> 지지 정당 ||
빌리 헬파흐
에리히 루덴도르프 독일 민족자유운동
오토 브라운
카를 야레스
· 독일 중간계급 제국당 하인리히 헬트
3. 선거 결과
1925년 독일국 대통령 선거 | ||||||
<rowcolor=#707070> 후보 | 정당 | 1차 투표 | 결선 투표 | 비고 | ||
<rowcolor=#707070> 득표수 | 득표율 | 득표수 | 득표율 |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A] | 14,655,641 | 48.3% | 당선 | |
카를 야레스 | | 10,416,658 | 38.8% | [힌덴부르크] | ||
하인리히 헬트 | | 1,007,450 | 3.7% | |||
에리히 루덴도르프 | 독일 민족자유운동 | 285,793 | 1.1% | |||
빌헬름 마르크스 | | 3,887,734 | 14.5% | 13,751,605 | 45.3% | |
오토 브라운 | | 7,802,497 | 29.0% | [마르크스] | ||
빌리 헬파흐 | | 1,568,398 | 5.8% | |||
에른스트 텔만 | | 1,871,815 | 7.0% | 1,931,151 | 6.4% | |
기타 후보 | 25,761 | 0.1% | 13,416 | 0.04% |
1차 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여러 정당 사이의 단일화가 진행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을 주도했던 범 중도 3당(사회민주당, 중앙당, 민주당)은 1차 투표에서 3위를 기록한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를 단일 후보로 결정하였다. 한편 인민당, 국가인민당, 바이에른 인민당[5], 나치당 등의 범 우파 정당들은 1차 투표 당시 출마하지 않았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로 뜻을 모았다. 독일 공산당은 승리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타 당과의 연대 없이 에른스트 텔만의 출마를 강행했다.
선거 결과 90만 표, 약 3%p 차이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빌헬름 마르크스를 꺾고 승리했다. 지역별로 결과가 판이하게 달랐는데, 동부의 농업지대와 바이에른은 보수파였던 힌덴부르크를 지지한 반면, 라인란트를 포함한 서부 공업지대와 베를린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였던 마르크스를 지지했다. 에른스트 텔만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전하긴 했으나 모든 지역에서 2위나 3위에 그쳤다. 그러나 빌헬름 마르크스에게 향할 가능성이 있던 좌파 유권자들의 표를 빼앗아 힌덴부르크의 당선에 일부 기여했다.[6]
1920년대 들어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 루르 점령, 바르마트 스캔들 등으로 인해 누적된 사회민주당-중앙당-민주당에 대한 반대 정서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승리를 견인했다. 여기에다가 중앙당이 결선투표에서 사회민주당과 연대하면서 보수적인 바이에른 인민당, 중앙당 일부가 힌덴부르크에게 향한 것이 결정적이었다.[7]
[A]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1차 투표 당시 아예 입후보하지도 않았고, 1차 투표 이후에서야 출마를 선언했다. 어떤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를 채택하는 경우, 통상 1차 투표에서 상위 득표자들에 한해 결선투표를 실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도 당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결선투표 단계에서도 새로운 후보자의 입후보를 허용하고 있었다.[A] [힌덴부르크] 결선투표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후보 지지 (Reichsblock)[마르크스] 결선투표에서 빌헬름 마르크스 후보 지지 (Volksblock)[5] 바이에른 인민당은 중앙당과 자매정당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중앙당 빌헬름 마르크스 대신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6] 텔만의 득표율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만약 텔만이 마르크스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해 텔만 지지자들의 대다수가 결선투표에서 마르크스에게 투표했다면 결선투표에서 마르크스가 근소한 차이로 힌덴부르크를 앞설 수 있었다.[7] 중앙당의 자매정당인 바이에른 인민당은 당 차원에서 힌덴부르크를 지지했고, 중앙당 정치인 중에서도 프란츠 폰 파펜 등 일부 보수파는 당을 배신하고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