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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4 22:06:50

Arcaea/스토리/Short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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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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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라베
2.1. 해금조건2.2. Scarlet Cage
3. 미르
3.1. 해금 조건3.2. Obsidian Blade
4. 아유
4.1. 해금 조건4.2. Colorful Dream
5. 비타
5.1. 해금 조건5.2. Unseeing Eyes
6. 이리스
6.1. 해금 조건6.2. Dark Ambition
7. 나미
7.1. 해금 조건7.2. Astral Sea

1. 개요

Arcaea의 Short Story를 기록한 문서.

2. 시라베

2.1. 해금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6-1 Scarlet-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Purgatorium.jpg Purgatorium 클리어
6-2 Scarlet-2 파일:Arcaea/Scarlet Cage.jpg Scarlet Cage 클리어
6-3 Scarlet-3 파일:Arcaea/VECTOЯ.jpg VECTOЯ 클리어

2.2. Scarlet Cage

====# 6-1 #====
어딘가에 사람이 있으리라 계속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녀의 시선을 메우고 있는 것은 오래되어 무너져가는 건물만이 가득찬 새하얀 황무지일 뿐이었다.
생명이라고는 본인밖에 없었다.

소녀는 아무런 기억 없이 이 세상에서 며칠 전에 깨어났다. 그 사이에 꽤 먼 거리를 걸으며 여기저기를 탐험했으나, 저 황량한 건물들에 해답은 없었다. 비어있을 뿐이었다. 건물들이 어째선지 익숙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소녀는 저것들의 이름, 형태, 목적 따위를 배운 기억은 없었다.

소녀에게 지식은 있었으나,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 세상이나 본인에 대해 더 자세히 아는 것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도피하고 있는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세계는 기묘하고 신기한 곳이라는 것이다.
소녀가 어깨에 두른 기타의 스트랩을 꽉 쥐자 의문이 다시금 찾아왔다. 이 기타는 어디서 난걸까?
대체 왜 내가 이걸 갖고 있는걸까? 소녀는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이 기타와 함께였지만 그 질문들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소녀가 아는 것이라곤 줄을 튕기고 프렛을 잡아 다양한 소리를 내는 법.
리듬과 멜로디, 코드, 화음을 내는 법이었다. 그렇게 기타를 손에 쥐고 있을 때면 소녀는... 아득함을 느꼈다.

하지만 왜일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왜 모르는걸까?

그녀가 밟은 모래는 억겁의 시간동안 바위가 물에 풍화된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곳에 물은 없다. 그 어떤 액체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모래가 있는 걸까? 소녀는 걸을 수 있었다. 어째서? 답할 수 없었다. 단 한번도 답을 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이 지식들이 “기억”이긴 한걸까? 정말로 나는 이 지식들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다른 것들은 “잊어버린” 것인가? 기억상실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 특정한 기억만 골라서 사라지는 게 기억상실이던가?
지식을 갖고 있으나, 어째서 그 지식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소녀는 굉장히 불편했다.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의 피부와 근육과 뼈를 빼내어 다른 몸에 넣어두고 중요한 장기는 빼먹은 듯한, 텅 비고, 잊혀진 느낌.

소녀는 무지(無知)가 너무나 싫었다.

소녀의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만화경의 풍경처럼 지나갔다. 그 풍경에 힘껏 집중을 해보지만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 애를 써도.

맨발로 여행하던 소녀는 (힐을 신고 걷는 것은 힘들었기에 벗어 목에 두르고 있기로 했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더 많은 것을 볼수록, 오히려 아는 것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무지가 싫었다. 소녀는 많은 것을 알았으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여태껏 보아온 것들은 대부분 말도 안되는 것들이었다. 그 중에넌,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기중에 떠다니는 유리 조각이 있었다. 그 유리 조각들은 다른 사람들, 다른 시간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광경은, 이상하게도 소녀의 마음에 울렸다. 그 광경은, 틀림없이 소녀에게 친숙했다.
하지만 그 친숙함은 말 그대로 느낌에 불과했다. 그 광경에 소녀 자신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기억이 아니다... 적어도 이 아르케아들은, 그녀의 기억이 아니다.
그 무엇도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소녀의 마음속에서 감정이 요동쳤다. 그러면서 온 몸으로 우려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소외된 느낌, 혼란, 희미한 외로움, 그리고 자신 안의 소중한 무언가가 없다는 감각. 소녀는 이 감각이 싫었다.

소녀는 다시 걸었다. 걸으면 잡념을 떨쳐낼 수 있다. 걸으면 자신의 내면보다 바깥의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6-2 #====
하지만 얼마 못가 그 감각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소녀는 비교적 부드러운 바위에 앉아 불안한듯 머리를 매만졌다. 뒤로 돌아보자, 색이 바랜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이 지평선까지 긴 대열을 그리고 있었다. 어째서 모래가 이렇게 많은걸까? 모래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한 후, 소녀는 또다시 기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또다시 밀려오는 그 아늑한 감각을 느꼈다.
그 기타는 마치... 위로해주는 부모님이나 친구와 같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숨을 내뱉았다. 이거면 됐다.
이거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소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손가락으로는 기타줄을 튕겼다. 조용하게 울리는 코드의 음이 콧노래와 멋진 화음을 이루었다. 소녀는 걷는 방법도, 기타를 연주하는 방법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 두 행동만큼은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 얼굴에 잠시 미소가 찾아왔다.

얼마 못가 그 미소는 사라졌다. 소녀의 혀가, 이가, 입술이, 가사를 이 노래에 붙이고 싶어했다. 처음으로 내뱉은 그 단어들이 공기중으로 퍼지며 어떤 풍경을 그리려는 듯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붉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노래했다. 이 새하얀 세계에서, 무색의, 무한한 감옥에서.

점점, 노랫소리가 커져갔다. 마음 속에서 감정이 복받쳐올라 점점 거세졌다. 본능이 내뱉는 그 단어들은 새로운 것도 아니었으며, 과거에 잊혀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와 항상 함께해왔던 것들이다. 이제 그것들이 소녀의 가슴 속에서 기어나와 소리높이 울리고 있었다. 단순히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포효와 같은 소리로 이 죽은 세계의 가장 외진 구석까지 닿을 정도로 클게 외쳐야 했다. 소녀는 최대한 크게, 그 단어들을 외쳤다.

그렇게 해야 할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운 감정, 무지, 황량한 풍경, 조그만 유리 조각들이 찰나의 순간동안 비추다 사라지는 수많은 기억들,

그리고...

공포에 대해 외쳤다.
연주하던 도중 그 한 순간, 소녀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텅 빈 세계와, 텅 빈 자신의 기억...

그것들이 두려웠다.

나는 누굴까? 여긴 어딜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소녀는 이미 그 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는.

목소리가 음을 찾지 못하고 갈라졌지만, 억지로 폐에 있던 공기를 쥐어짜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6개의 현 사이로 미친듯이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소리가 마음 속으로 생생하게 들렸다. 강력하고 우렁찬, 마치 비명과도 같은 그 진동이.

그 가사 밑으로 흐르는 세찬 파도와 함께, 일렁이는 공포가 강력한 열을 내뿜으며 그녀의 눈에서 빛났다.
영혼과 음악이 자아낸 폭풍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소녀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조금 덜 혼란스러웠고, 조금 덜 두려웠다.
잠시 후, 그 외침의 메아리조차 잦아들고 난 후, 마지막으로 현을 몇 번 뜯은 뒤 소녀는 팔을 늘어뜨렸다.
노래는 밝은 하늘을 향해 잦아들어, 그 존재의 흔적은 이제 그녀의 텅 빈 기억 속에 밖에 남지 않았다.

소녀는 왼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 손은 덜덜 떨며, 자신의 노래를 가져간 하늘을 보길 거부했더.

그리고 웃었다. 소녀 자신도 놀라웠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한바탕 해내고 난 후의 후련한 미소.
손을 옷에 닦듯이 비비고 숨을 내뱉았다.

정말, 이 세상이 싫었다.

====# 6-3 #====
이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무섭고, 여전히 비어있고, 여전히 무자비했지만,

소녀는 이제 맞설 준비가 되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소녀는 분명 공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공포에 질리면 사람은 오금이 저리고, 도망가고 싶어지며, 판단력이 흐려지고, 제어를 잃게 된다.
미지의 공포, 실패의 공포란 그런 것이었다.

그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은 본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예전에도 불러본 적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지금과 같이, 공포를 이겨내고 노래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소녀는 공포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틀린 감정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었다. 이 말도 안되는 세계에서 제정신으로 있으려면, 공포를 마주하고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녀는 숨을 뱉고 앉은 자세를 가다듬은 뒤 조심스레 기타를 옆에 내려놓았다.
갑작스레 짤랑, 하고 조그마한 소리가 울렸다.

드레스의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보따리가 떨어져 모래 위에 튀어나온 돌 위로 떨어졌다. 그 안에는 바늘, 가위, 골무, 실타래, 그리고 줄자가 들어있었다. 바느질 도구다. 소녀가 깨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어, 자신의 것이라고 짐작했던 물건이다.

이 보따리를 처음 찾았을 땐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대체 왜 자기가 이걸 갖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보따리 속에 든 각 물건의 용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기타처럼... 도대체 이 보따리가 어디서 온 물건인지에 대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는 손을 뻗어 주머니를 주우려고 했다. 그렇게 자기 옷의 소매를 보는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

알고 있었다... 이 소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든 바늘땀과 재봉선을, 그것이 어떤 색의 실인지.
그 실은 저 바느질 도구 보따리 안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연결점은 찾을 수 없었다. 논리적으로 자신의 옷과 저 보따리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답답한 기분은 걷혀지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소녀의 경험과 지식은 단절되어있었다.
매우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하지만 더이상, 소녀는 그 단절이 일으키는 공포에 삼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 공포를 제대로 알고, 이용할 것이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떻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소녀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목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미래에 목표를 찾을지도 모른다.

다시 걸어가는 소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보따리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여정 도중에 옷이 망가지면 고칠 방도가 있다는 것은 꽤 편리했다. 그녀의 옷은 절대로 편하거나 실용적이진 않았지만, 자신의 것이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자신의 것이었다.

옷, 기타, 바느질 도구, 이 기억의 황무지에서, 그것들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더 나아졌다.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는 힘이 났다.
몇 걸음을 걷자, 땅에 있는 무언가가 소녀의 눈에 띄었다.

모래에 새겨진 발자국...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나아간 그 발자국은 분명, 크기가 달았다.
그 발자국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작은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또다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 새겨졌다.

흠...

어쩌면, 누군가 내 음악을 들은 걸지도...

3. 미르

3.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8-1 Obsidian-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GIMME DA BLOOD.png GIMME DA BLOOD 클리어
8-2 Obsidian-2 파일:Arcaea/Bookmaker (2D Version).jpg Bookmaker (2D Version) 클리어
8-3 Obsidian-3 파일:Arcaea/堕楽の園.jpg Illegal Paradise 클리어

3.2. Obsidian Blade

====# 8-1 #====
달도 비추지 않는 밤이 숲에 내려앉았다.
푸른 숲과 그 안의 마을을 향해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불길을 덮으려는 듯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 끔찍한 형체가 내지르는 끔찍한 소리,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화염. 사람들이 자욱한 연기 속에서 공포에 질려 죽을 힘을 향해 달아났다.

하지만 소녀는 친숙한 느낌에 휩싸여 있었다. 전투의 순수한 황홀감.

흑요석과 같은 검은 광택을 두른 미르의 검이 그림자를 가를 때마다 반짝였다. 그림자는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일그러진 짐승의 형상을 했지만 싸울 때는 교묘하게 뒷다리로 서서 움직였다. 그녀가 쥔 검의 날이 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의 어깨를 베어내자 떨어진 신체가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그 몸은 소멸하여 연기가 되듯 흩날렸다.
숲에 번진 불길에서 일어난 연기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는 그 짐승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서로 구분할 수 있는 점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한 마리를 쓰러뜨리면 그 정수가 다시 연기 속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돌아온다는 것 뿐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검의 날을 그림자 짐승에게 찔러 넣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숲속을 거의 빠져나가, 전진하는 군대의 전열 속으로 피난했다.

미르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다. 이 황홀감이 끝을 보도록.

그녀가 몸을 날리자 한 번의 도약만으로도 거의 들판에 가까운 길이를 긴 머리를 흩날리며 뛰어넘었고, 도망치는 농부에게 연기로 된 발톱을 세운 또 다른 짐승의 목을 날려벼렸다.

키가 작은 근육질의 여성이 도망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미르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어떠한 손짓을 보인 후 다시 바삐 달아났다. 감사의 표시였을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이 세계의 기술이 얼마나 진보했는지, 그 사람들의 철학이 어떤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언제나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죽이고, 도륙하고, 끝내 버리는 것. 모든 적이 사라졌으리라 짐작될 때까지.

마침내 마을의 마지막 난민이 창을 든 군인들의 열에 도달했다. 미르는 군인들의 눈썹에 맺힌 땀과 눈에 어린 공포를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의 자세에서 보이는 결연한 의지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내 검을 내려놓고 숨을 내쉰 그녀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난번보다 더욱 일찍.

그리고는 마치 유리로 만들어져 투영된 이미지처럼 그녀를 둘러싼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엷은 빛이 그녀를 완전히 에워싸게 두었고...

그녀는 다시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 8-2 #====
미르는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죽어버린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지니고 있던 기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에 미르를 불러낸 유리 조각은 멀리 날아가기 전에 잠시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잇따른 경험을 통해 그녀는 다시는 그 조각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조각의 이름은 아르케아. 깨어났을 때부터 어째선지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아르케아는 ‘상황’에 놓인 다른 세계의 모습을 미르에게 보여주었다.

미르는 조각을 만질 수는 없었지만, 조각은 미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수없이도 조각은 미로를 불러내어, 다양한 상황에 놓인 다양한 세계로 데려가주었다. 하지만 미르의 목적은 언제나 같았다. 적을 쓰러뜨리는 것.
철저하게 부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하는 것.

언제나 필연적으로 미르의 뒤에는 스스로는 싸울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피를 끓게 하는 전투의 황홀감 앞에서는 무색해졌지만.
언제부터 지니고 있었는 지는 몰랐으나, 미르는 눈을 떴을 때부터 함께했던 이 검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어쩌면, 너무 지나칠정도로 능숙하게. 미르는 여러 세계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아주 간단하게 해낼 수 있었다.
적들을 쓰러뜨리는 것조차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사람들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투를 마주하면 그러한 걱정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맹렬한 폭력의 기쁨이 온 몸에 흐르도록 하며 전투를 즐겼다.

그러나 그런 황홀감이 사라지는 순간은 점점 더 빨리 찾아왔다. 공허함과 피로감만이 미르를 채웠고, 그로부터 회복하기 까지는 몇 시간, 며칠이 걸렸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되기까지는 더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차분해졌을 때엔, 미르는 그 세계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세계들이 이 곳과는 다른 세계라는, 여태껏 굳게 믿어왔던 ‘사실’조차 이제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장소들은 마치 세계가 아니라… 어째선지 안에 들어가 행동할 수 있는 ‘동영상’처럼 느껴졌다.

답이 뻔한 의문이다. 미르는 그렇게 느끼면서도 도저히 해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지쳐버린 미르는 검을 어깨에 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풍경은 온통 흰 모래뿐. 색이 쭉 빠진 사막은 마치 탈진한 미르의 모습과 같았다. 미르가 조각에게 ‘잡혀가기’ 전 모래 위에 새겼던 발자국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바람조차 없는 이 세계에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기 힘들었다.

시간이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또 다른 부름. 사방이 또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타올라 갈색으로 변해버린 들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 급조한 울타리와 참호.

미르는 갑작스레 피곤해졌다. 이렇게 짧은 주기로 ‘부름’을 받은 적은 없었다. 거기에, 미르가 지켜야 할 약자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각이 자신을 부르는 이유는 그들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보다, 미르의 적은 어디에 있는 걸까?

미르의 싸움은, 어디에 있는 걸까?

====# 8-3 #====
전쟁.

미르는 전투는 몇 번이고 경험했지만, 전쟁은 경험해 본 바가 없다.

그녀는 사람들이 끔찍할 정도로 효율적인 방법으로 타인을 죽이고, 공포에 질려 살기 위해 달아나고, 영웅적인 업적을 이뤄내고, 지독하게 불명예스러운 추태를 보이는 모습을 보았다.

어디를 돌아보든 미르보다 약한 자들만이 존재했다. 공포에 질린 순박한 얼굴,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미르를 볼 수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마치 환영인 것처럼, 빛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처럼. 그럼에도 미르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그 덕에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어디를 돌아보든, 적들만이 존재했다. 군인들은 무장을 해제한 적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가공할 만한 무기, 인간성이라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다가오는 죽음. 미르는 그 무기들을 파괴했고, 그럴수록 더 많은 적이 다른 편에서 몰려왔다.
푸른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붉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다. 미르는 재빨리 결단을 내리고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붉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미르의 등 뒤에서, 방금 전 지켜낸 사람들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연기처럼.

머리 위로 치솟은 전함이 대지에 순수한 파괴의 비를 뿌렸다. 푸른 군복에 달린 것과 같은 휘장이 그려진 전함이었다.
전함의 일격은 한순간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저들이 진정한 적인 걸까?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미르는 팔을 뒤로 빼고서, 조준을 위해 잠시 멈춘 후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허공에 던졌다.
칼날은 함대를 향해 위로 날아올랐고, 전함을 갈가리 찢으며 창공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전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미르의 눈에 비쳤다. 새하얀 천이 그들의 위로 솟아올랐다. 낙하산인가?
붉은 군인들이 노리기 아주 좋은 속도로, 그들은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황홀감은 사라졌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허탈함이 다시 몰려왔다.

이번에는 절망도 함께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

망설임. 잘못된 판단을 내린 후의 망설임과, 쓰러뜨릴 적을 확실히 정하지 못한 망설임.

공포, 자신의 결정이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공포.

황홀감은 사라졌다.

믿고 있던 동료가 자신을 배신한 기분이었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자신을 남겨두고 간 듯한 느낌. 미르는 손을 뻗어 없는 것을 찾으려 애썼다. 여기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데. 다시 한 걸음 내딛을 힘조차 없는데.

그래도 그 황홀감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미르는, 마치 저기 부상입은 군인들처럼, 무릎을 꿇었다.
몇 시간이 지났다.

격렬했던 전투는 점점 잦아들었고, 전쟁의 공포만이 대지를 잠식했다.

미르는 손으로 귀를 막아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을 듣지 않으려 애썼다. 눈을 꼭 감아 그 무엇도 보지 않으려 했고, 냄새조차 맡지 않으려 했다.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이 아니야.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명백히 이 모든건 미르의 탓이었다. 뭔가 방법이, 이 상황을 바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미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 따위는 없었다. 이를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일련의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신경 그 자체가 닳아빠져 공황이 몸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

마침내 주변의 광경이 다시 하얗게 변하며, 미르는 언제나 그랬듯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즉시, 미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땅으로 무너져내렸다. 몇 시간 전 하늘로 날렸던 검이 건조한 소리를 내며 모래 위로 떨어졌다.

미르는 가만히 제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저 망할 하늘의 지독한 하얀 빛이 자신을 잠식하지 않도록.

난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 세계가 나에게서 원하는 게 뭘가?

이 세계에서 깨어난 이후로, 미르에게는 ‘소환’에 대해 생각하거나 잠을 자는 데에만 시간을 썼다. 하지만 자신에게 기억이 없다는 사실은, 마치 유령처럼 미르의 머리를 맴돌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지?

미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길게 뻗은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가는 길에 목적지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미르도 모르는 사이에, 멀리 떨어진 곳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은 다른 사람의 발자국과 겹쳐있었다.

미르는 기도할 뿐.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그럼에도 기도했다. 언젠가 이 공허한 모래구덩이에서, 조금이라도 안식을 찾을 수 있기를 빌며.

4. 아유

4.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11-1 Colorful-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Oblivia.jpg Oblivia 클리어
11-2 Colorful-2 파일:Arcaea/Rugie.jpg Rugie 클리어
11-3 Colorful-3 파일:Arcaea/init().jpg init() 클리어
11-4 Colorful-4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11-5 Colorful-5
11-6 Colorful-6
11-7 Colorful-7
11-8 Colorful-8 파일:Arcaea/Désive.jpg Désive 클리어

4.2. Colorful Dream

====# 11-1 #====
이 사이로 느껴지는 평평하고 단단한 감촉. 딱 원하던 느낌이다.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모서리 때문에 혀가 간지럽다.

상실의 기억. 절박함과 실패로 이루어진 고통의 기억.
하지만 소녀는 이 기억을 그렇게 묘사하지 않고 단 한마디, “슬픈 기억”으로 정리해버릴 것이다.
어찌나 기대되는지,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안 먹어봐도 알 수 있다. 이건 아주 고소한 맛이 날 거라는 걸.

소녀는 유리 조각을 깨물었다.
“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같은 생물이 소녀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날갯짓 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이 생물의 이름은 팬즈다.

“배고팠어?”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같은 생물이 소녀의 왼쪽 어깨 위에서 날갯짓 하고 있었다.

“배고플 땐 언제든지 말해.”

이 생물의 이름은 드렘이다.

“음~!”

그녀는 행복에 가득 차 뺨에 손을 올리고 감탄했다. 이 사이로 유리 조각이 부서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산산조각난 유리와 그 가루가 혀를 덮었다. 따뜻한 느낌. 멋진 저녁식사... 이를테면 소금기를 머금은 진한 육즙으로 가득 찬 고기와 같은 맛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녀의 어휘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입에서 침을 흘리며 그녀가 내뱉은 감상은... “맛있어” 뿐이었다.
“잘됐네!” 신난 듯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팬즈가 말했다.

“마시쪙!” 유리 조각을 삼키며 아유가 말했다.

“맛있어, 라... 정확히 어떻게 맛있니?”

아유의 등 뒤에서 드렘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응... 스테이크 같아!”

그렇게 말하며 아유는 앞으로 힘차게 걸어나갔다. ‘박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스테이크는 어떤 맛이니?”

“에휴, 드렘아…”

길 잃은 아이를 대하는 듯한 억양으로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넌 아는 게 없구나!”

“스테이크가 무슨 맛인지 모를 뿐인걸.”

드렘은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정말 어떤 맛인데?”
“고기 맛이지!” 아유가 그렇게 말하고선, 무언가 특이한 걸 발견했는지 공기중에 떠다니던 유리 조각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럼... 짠 맛인가?” 드렘이 물었다.

“짜고 맛있는 맛!”

맛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 아유는 방금 전에 움켜쥔 유리 조각을 입으로 털어넣었다. 웃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삶과 성취와 축하의 기억이다. 아유의 언어로는 “행복한 기억”이다.

“그래! 짠거 다음엔 단 걸 먹어야지!” 팬즈가 소리쳤다.

“봐, 팬즈가 드렘 너보다 똑똑하네!” 코로 웃음 소리를 내며 아유가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어.” 드렘이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다고...”
새로 찾은 유리 조각을 쪽쪽 빨며, 드렘의 말을 흘려듣듯 아유는 “응 그래”라고 대답한 후 콧노래를 부르면서 팔을 흔들었다. 유리 조각에선 설탕과 같은 맛과 감촉이 느껴졌다.

그들의 앞으로는 백색의 세계가, 등 뒤로는 폐허로 가득 찬 대지가 펼쳐져 있다. 그 두 풍경은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온 세상에는, 유리 조각이 흩뿌려져있다.

온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이 소녀를 기다리고 있다.

아유가 어금니로 기억을 깨물어 부쉈다. 그 기억에 담긴 역사가 사라졌다.

먹을 것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 눈을 떴을 때부터 끊임없이 배고픈 소녀가 있다.

====# 11-2 #====
파일:Arcaea/Story/11-2.jpg
아유도 박쥐들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드렘은 아유의 머리 위에 앉아있었다.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탓에 날개가 아유의 얼굴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팬즈가 소리쳤다.

“어... 하얀색이네! 하얀색 유리 조각이 잔뜩 보여, 아유!”

“단 거야?” 얼굴을 두드리는 날개 사이로 아유의 말이 새어나왔다.

“오른쪽으로 가! 오! 른! 쪽!” 계속해서 아유의 코와 입을 두드리며, 드렘이 대답했다.

“그래, 오른쪽이야!” 팬즈가 동의했다.
“또 단 거야?” 아유가 불평했다.

“단 거...”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드렘은 아직도 날개로 아유의 이마를 부드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 있잖아... 좀... 그 뭐야... 다양하게 먹고 싶은데... 너희도 알잖아... 난 다양하게 먹는 게 좋다구…”

“그렇게는 안돼.” 팬즈가 말했다.

“뭐가 안되는데?” 아유가 물었다.

드렘이 드디어 아유의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아유...” 드렘이 아유의 얼굴 앞에서 날갯짓하며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배고프잖아?”

“항상 배고프지.”

아유가 대답했다. 그리고 부탁하듯 눈을 한 번 굴리고선 말했다.

“그래도 좀... 드렘...”
“배가 고프면 배부르게 잔뜩 먹어야겠지!”

드렘이 날개를 퍼덕이며 소리쳤다. 눈 앞에 박쥐의 날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힘이 쭉 빠진 아유는 눈을 굴렸다.

“세상에 유리가 이렇게 많으니까... 그럼 좀 더... 있잖아...”

아유는 드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저 멀리 자리잡은 두 가지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두 집과, 그 사이에 난 길 위로 떠다니는 유리의 무리로 시선을 옮겼다. 한 눈에 행복과 고통의 기억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드렘과 한 번 눈을 마주치고는 길을 향해 걸어갔다.

“으으응?” 등 뒤에서 날아온 박쥐의 질문에, 올라간 말꼬리만이 귀에 들어온 아유는 적당히 대답했다.

“그래, 맞아! 그러니까...!” 드렘이 소리쳤다.

아랑곳 않고 아유는 계속 걸어가 이상한 유리 조각의 무리가 떠다니는 길에 다다랐다. 유리 조각에는 옛 시절의 풍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유는 한 쌍의 유리 조각을 집어들었다.

한 손에는 빛, 다른 손에는 대립, 아유는 두 조각을 동시에 입으로 가져가 깨물었다.'

두 맛의 조합은 황홀했다.

“이런… 또 시작됐군.” 마침내 아유가 전혀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드렘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게 아니잖아!” 팬즈가 말했다.

“우리가 계속 말했잖아, 네가 먹어야 하는 건 여기 있는 유리가 아니라… 저 쪽에 아주 난리가 났다니깐... 하아...”

팬즈는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뭐... 행복해보이긴 하네...”

“음.”

드렘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그래. 행복해보이긴 하지.”
아유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 의미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이 두 유리 조각을 동시에 먹으면 훨씬 맛있어진다는 사실이다. 상반되는 기억이 같이 있는 경우는 드물기에, 아유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유리 조각의 무리는 보물더미다. 미소가 멈추질 않았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한순간. 박쥐들이 다시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에는 말을 들어야지. 유리를 깨물어 먹을 때처럼, 아유는 때때로 박쥐들이 말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고 느껴졌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은 기분이 좋다. 기분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삶의 목적이었다. 아유의 모든 행동은 기분 좋은 일을 위함이었다.
존재의 의미 치고는 아주 단순했지만, 여기서 더 복잡해져야 할 필요가 있긴 할까?

박쥐들의 말을 듣는 것이 만족으로 이어진다면, 아유가 조용히 있는 것이 때때로 만족을 안겨 준다면...

그렇다면 소녀는 잠시나마 귀를 열고 입을 닫아줄 것이다.

====# 11-3 #====
아윽고 그들의 시야에서 달달한 유리 조각의 무리는 사라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랗고 어두우며, 아주 맛있을 것 같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유와 박쥐들은 검은 유리로 가득 찬 구덩이의 모서리에 서서 밑을 바라보았다. 요동치는 검은 유리의 무리에 아주 조그마한 빛줄기라도 닿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유리 조각들이 서로를 긁어대며 내는 소리는 통곡과도 같았다. 끝과 상실의 기억들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 했다. 아유는 그 모습을 호기심에 찬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세상을 채우는 듯 했다.

“아유.” 드렘이 눈짓으로 구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뛰어들어봐.”

“엉.” 아유는 대답하고서는 바로 뛰어내렸다.
아유가 팔을 쭉 뻗자 추락하는 속도가 즉시 느려졌다. 아유의 주변을 마구잡이로 쏘다니는 유리 조각들.
아유가 손을 뻗자 기억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아유는 그 곳에서 조각을 몇 개 불러냈다.

그리고 그대로 그 조각들을 입으로 털어넣었다.

“잘했어, 아유!”

“좋았어! 아유!”

아유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표정을 찡그렸다.

이 허기는 진실로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유리 조각과 파편과 가루. 그 모든 것이 목으로 넘기는 순간 무(無)가 되어 사라져버리는 느낌.

그렇기에 아유는 맛을 중요시한다. 우리 조각을 일부러 깨물어 부수는 이유도 오로지 맛을 느끼기 위함이다.
자신의 배 속에는 위장이 아니라, 계속해서 먹이를 주어야 하는 공허가 들어있는 게 아닐까 하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고통을 느끼기 위해. 그리고 물론, 맛을 느끼기 위해. 아유는 유리 조각을 깨물어 먹는다.
그럴 때만은, 아주 천천히, 빛이 돌아오기에.

그녀를 채우던 호기심과 함께 여태껏 느껴지던 기묘한 감각도 사라졌다. 머지 않아 검은 유리의 소용돌이는 사라지고, 혀로 입술을 닦는 아유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유가 밝게 미소지었다.

“엄청 맛있었어!” 소녀가 외쳤다.

“그래!” 팬즈가 동의했다.

“맛있어 보이더라.” 드렘도 따라서 긍정했다.

아유는 박쥐들이 싫지 않았다. 박쥐들은 아유가 웃으며 지내길 바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박쥐들은 아유의 배가 항상 비어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유는 땅에 발을 디딘 후 즐겁게 뛰쳐나가며 박쥐들과 색과 하늘과 음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이 그들의 세상이다. 이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저게 뭐지?” 드렘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음..? 뭐가?” 팬즈가 드렘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며 덧붙였다.

아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리 조각 하나가 홀로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비추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먹어 봐, 아유.” 팬즈가 말했다.

“어서.” 드렘이 말했다.
아유는 힘차고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쥐들과 함께 소녀가 날아올랐다. 얼굴에 번진 미소와 함께 소녀는 그 기묘한 조각을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잖아.” 조각으로 다가가며 아유가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배가 채워질지.”

====# 11-4 #====
뱉을 말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배에 들어찬 것도 없이

새하얀 세계에서 깨어난 소녀의 이름은 아유였다.
옛날 옛적부터 시작된 이야기.

하늘이 비틀리기 전에, 하늘이 부서지기 전에,
하늘이 눈부신 빛으로 뒤덮이기 전에, 낮이 밤을 만나기 전에…

한 소녀가 무너져내리는 탑과 미궁으로부터 떨어진 후에…

아유는 안에 든 것 없이 깨어났다.
아유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펴보았다. 빛의 세계. 유리와 기억의 세계가 펼쳐져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아유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배가, 배가 비어있었으니까.

입을 열어봐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뱉을 말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었으니…

아유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잠시 걷다가 아유는 또다시 털썩, 하고 쓰려졌다. 일어나려고, 다시 일어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그대로 땅 위를 기었다. 어쩌면 며칠, 어쩌면 몇 주가 지났을때 쯤, 흙투성이가 된 아유는 쓰러진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팔을 움직여 배를 움켜잡아보려 했지만 손까지 덮는 긴 소매 때문에 무엇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뱉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기어오는 도중 단 하나의 유리조각도 아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빛이 내리쬤지만, 조금도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 앞에 펼쳐진 황량한 대지와 무너져내린 도시를 바라보았다.

안에서부터 자신을 좀먹는 듯한 공허감…

아유는 울었다.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아르케아는 잘못된 마음이 서툴게 만들어낸, 잘못되고 서툰 세계.

그런 곳에서 아유는 태어났다.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 한들…

무엇을 원하는 지도 모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유는 고통을 곱씹으며 소매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달랠 수 없는 아픔과 굶주림이 온 몸을 파고들었다.

이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반쪽자리 '마음'에 후회의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그와 함께 두 쌍의 날개가 날아올랐다.

유리의 심장을 지닌 그들이 향하는 곳은 명확했다.

두 개의 조각, 두 개의 심장.

날갯짓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도 전에 아유는 그들을 느낄 수 있었다.

등을 감싸안는 날개의 감촉, 마치 담요처럼 따뜻한 그 감촉…



그렇게 아유는 평생의 친구와 만났다.
====# 11-5 #====
"잘한다, 아유!"

"그렇지, 천천히. 아주 잘하고 있어."

아유가 비틀거리는 다리로 두 박쥐를 향해 걸어갔다. 쓰러져있던 아유를 찾아낸 두 마리의 조그마한 박쥐들.
아유가 걷는 연습을 하다 쓰러질 때마다 잽싸게 날아와서 다시 일으켜주었다.

박쥐들은 소녀의 곁을 지키며, 길을 앞장섰고…
곧, 아유는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아유야! 이거 좀 먹어봐라!"

"이것도!"

박쥐들이 공중에 떠다니던 유리 조각을 가져왔다.
아유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그 유리 조각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 혀로 굴리고, 이로 씹었다.

이 사이로 느겨지는 평평하고 단단한 감촉. 딱 원하던 느낌이다.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모서리 때문에 혀가 간지럽다.

씹고 삼키고, 또 씹고 삼키고, 또 씹고 삼키고…

행복한 맛, 든든한 맛… 기억을 삼킬 때 마다 새로운 것을 알아갔다.

뺨을 적시던 눈물이 말랐다.

아유는 웃었다. 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소리높여 웃었다. 그리고 입을 벌려 말했다.
"팬즈야, 드렘아! 이거 마시쪙!"
"아유야…?!" 깜짝 놀라 굳은 채로 드렘이 말했다.

"아유야! 너… 지금, 너…? 말을?!" 팬즈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유는 두 박쥐를 향해 폴짝 뛰어 다가갔다.
두 팔을 크게 벌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인 박쥐와,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인 박쥐를 꼬옥 껴안았다.

그에 보답하듯 박쥐들은 날개로 소녀를 감쌌다.
아유는 그렇게 유리조각으로 이루어진 구름과 파도의 바다를 먹어치웠다.
이 새하얀 세계에 흔들림이 생겨날 때마다 아유와 박쥐들이 달려가 유리 조각을 먹어치웠다.

한 장소에 유리 조각이 너무 많이 모여 '오류'를 만들어내기 전에…
아유가 먹어치웠다.

그리고 만약 결국 '오류'가, 이상현상Anomaly이 어디선가 생겨난다면…
그것도 먹어치울 것이다.

친구 박쥐들의 인도를 따라…
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아르케아에는 의미도, 목적도, 상식도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가 있을까?

슬픔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이 바보같은 세계에서 이 셋은 행복을 찾아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아유, 팬즈, 드렘은 서로를 떠나 각자의 길을 걸으며…

그 질문의 답을, 빛의 종말과 함께 운명의 끝에서 찾아내게 되리라.
====# 11-6 #====
그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지금 아유는…

눈을 감은 채 무채색의 꿈 속으로 빠져들어,

점점 더 낮고,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기억, 가장 처음 마주한 기억.

혼자 있으니 떠오르는 기억들.
눈물이 아유의 눈에 차올랐다.
무(無)를 향해 가라앉으며, 외로움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다시 겪에 된 아유의 어깨 위로 다뜻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유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과 함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조그마한 빛이 아주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따뜻한 감촉도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아유는 더이상 혼자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너는 누구니?" 아유가 물었다. "괜찮아?"

답변이 들려왔다.

자길 걱정해주는 아유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아주 조용하고, 익숙한 목소리.
빛과 삶과 죽음의 목소리.
아이의 목소리이자 어머니의 목소리.
언젠가 분명 들은 적 있는 대지의 목소리.
아르케아에 깊이 다가간 아주 소수의 이들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

아유는 그 목소리에 대답했다.

"응? 왜 아파?"
목소리가 말했다: 꿈을 꾸고 있지 않았니?

"응." 아유가 가볍게 대답했다. "내 꿈이 보여?"

조용한 목소리가 긍정하며 꿈에서 깨운 것을 사과했다.

"있지, 있지. 깨어났더니 친구들이 안보여. 어디 갔는지 알아?"

…목소리는 침묵했다.

"하으어음… 그…" 아유가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 빛 쾅! 하고 터지는거… 봤어?"

터졌지. 봤어.

"쾅! 터지고… 그 다음에 콰카카캉콰오오! 푸슈우우욱~! 파아아앙!!!!
하는거 봤어?!"

무슨 말이니 아유야?
"빛 말이야!" 아유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사라졌잖아!"

목소리가 물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니?

"쓰러졌어…" 아유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냥 발이 헛디뎌서 넘어진 것 뿐이잖아. 그치?"

아니다. 헛디뎌서 쓰러진 것이 아니다.

"엥, 그렇구나. 으음… 그 다음엔… 팬즈랑 드렘이랑 같이 일어서니까…"

아유가 팔짱을 끼고 다시 생각했다.

"머리가 아팠어!"

그 순간
공기가 흔들렸다.

"팬즈랑 드렘이 계속 나보고 유리를 먹으라고 했거든! 못됐지?!"

그 순간
공기가 잠잠해졌다.
"으응, 배가 고팠던 건 맞는데…"

목소리가 나오는 것으로 짐작되는 방향을 보며 아유가 말했다.

"속이 안 좋았거든. 좀 많이… 헤헷…"

그래?

"너무 안 좋아서 눈물이 나오더라니까! 하하핫!"

그렇다 아유는 울었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 기억도 안나!"

아유가 머리 위로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뒤집어져 있으니 물구나무를 선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있지, 있지. 나 여기 얼마나 있었어?"

비록 날짜라는게 여기서는 생소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유는 이 곳에 삼일을 있었다.
아유가 왜 여기서는 날짜가 생소…?한 어쩌고냐 물으니, 목소리는 신경 쓰지 말라 대답했다.

"흐으음…" 아유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곧 목소리가 물었다. 아유야,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뭐니?

"물고기!" 아유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박쥐가 아니라?

"박쥐는 팬즈랑 드렘이잖아! 바보들이잖아!"

팬즈랑 드렘이 싫어?

"아니, 너무 좋아!"

그렇구나. 잘됐네.
아유야, 제일 좋아하는 색은 뭐니?

"초록색!"

왜 초록색이니?

"내가 초록색이잖아! 그리고… 많잖아!"

어디에?

"음식에!" 아유가 말했다. "좋은 음식은 초록색이거나 빨간색이니까!"

무슨 말이니?

"아이고…"

아유의 입꼬리가 내려가며 그 사이로 애석함이 섞인 말이 새어나왔다.

"너도 팬즈랑 드렘만큼 바보구나…"

미안해.
"잘 들어!" 아유가 가르치듯 말했다.

"초록색은 나무랑 꽃이고 걔넨 달달해! 빨간색은 피랑 불이고 걔넨 고소해! 그 둘을 같이 먹으면… 짠!"
아유가 미소를 지으며 제스처를 취했다. "엄청 맛있지요!"

공기가 조금 시원해졌다.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많이 컸구나. 행복한 삶을 살았어.

그리고, 비록 목소리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유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목소리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괜찮아?" 아유가 물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너는 행운이 없었어.

"행운이 뭔데?"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은 행운 또는 '안행운', 둘 중 하나인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또다시 따뜻함이 아유를 감쌌다. 하지만 이번엔 아유의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고이게 하는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미간이 구겨졌다.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그 의미를 알았을텐데.
더 즐겁고, 더 많이 먹었을 텐데
더 따뜻함을 느끼고, 더욱 멀리 나아갔을텐데.
영원히 대지를 걸으며 영원히 미소를 머금을 수도 있었을텐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너는 그런 아이니까.
너는 원본 없이 만들어졌으니까.

목소리가 말했다: 아유야, 너는 영원히 바뀌지 않았을 거야.
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착하고 멋진 아이야.

"고마워!"

너는 착하고 멋진 아이야. 목소리가 반복해서 말했다.
정말로, 고마워.

"…?"


목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따뜻한 침묵 속에서, 무채색의 꿈 속에서…
아유는 목소리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렇게…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 11-7 #====
한 번, 아르케아의 세계에 눈이 내렸다.
그리고 지금, 회색빛 대지 위로 또다시 한 번 눈이 내리고 있다.
여기에서는 부드럽게 내리는 함박눈이, 멀리서는 매서운 눈의 폭풍이.

고요한 세계, 아르케아를 눈이 뒤덮은 풍경은 그 어느때보다 조용했다. 이 세계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새하얀 눈밭이 무너져가는 대지 위에 펼쳐져 있었다.

"하아악…"

옅은 숨에 눈꽃이 날렸다.

"하아아윽… 끄흑…"

몸이 덜덜 떨렸다. 추워서가 아니라, 뱃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퍼지는 고통 때문에.
그 위로 한 쌍의 날개가 그 몸을 밀고, 밀고, 흔들었다. 밀고, 또다시 밀고, 껴안았다. 박쥐 팬즈가 속삭였다.

"아, 아유야… 제발 일어나. 제발…"

그 둘을 드렘이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야 할 존재, 아유의 숨이 점점 옅어져가다. 마침내 끊겼다.
"아유야?!" 팬즈가 소리쳤다. "아유야, 안돼. 제발!" 애원하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아유의 미간에 번져있던 주름이 풀렸다. 드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박쥐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미간의 주름이 풀린 것은 편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드렘, 아유가 숨을… 심장이… 설마, 아니지? 아니잖아! 이럴 순 없어!"

"…"

그대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무언가 목적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
드렘은 아유의 곁에 있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태어난 목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드렘은 생기가 빠져나간 아유를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입술이 옅은 미소를 지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걸 용납하기엔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드렘이 날갯짓하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드렘?! 어디 가는… 잠깐만! 드렘아! 가지 마!"

"팬즈!" 드렘이 소리쳐 대답했다. "먹을 걸 찾아오자! '맞는' 음식을!"

"저, 저 눈폭풍 너머로…?! 저길 어떻게 가!"

"난 갈거야!" 드렘이 소리쳤다. 이에 팬즈도 맞받아 소리쳤다.

"…그럼 나도 갈게!"
두 박쥐가 낮과 밤의 경계를 향해 재빨리 날갯짓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유의 기척이 점점 더 옅어졌다.

너무 멀리 떨어지면, 너무 시간을 끌면… 아유를 다시는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절대로 답이 아니었다.

박쥐들은 꼭 붙어서 서로의 몸을 녹이며, 이 세상의 부서진 조각을 찾아 헤맸다…

사랑하는 이에게 먹이기 위해. 이 망가진 세계가 그녀에게 준 사명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

아르케아가 만들어낸 감시자, 아유는 이상현상을 먹어치우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니, 박쥐들은 이상현상을 찾아낼 것이다.
무서운 눈보라를 뚫는 한이 있더라도, 이상현상의 기척을 좇아갈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이 그들의 날개에 내리쳤다.
마치 채찍처럼 격렬하게 두 조그마한 박쥐를 마구 후려치며 날려보냈다.

온 몸에 한기가 돌았다. 그럼에도 나아갔다.

눈가에 차갑게 서리는 눈물을 느끼며…

아유의 배에 들어찬 병을 고치기 위해서 세계의 '뒤틀림'을 향해 지지 않고 나아갔다.

하지만…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 한들…

이룰 힘이 없다면 무의미할 뿐이다.

곧, 팬즈가 땅으로 떨어졌다. 곧, 쓰러진 팬즈를 끌고 가던 드렘도 힘이 다해 추락했다.
곧, 눈이 그들의 몸을 덮었다. 곧,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은 훌쩍이는 소리가 되었다.
곧, 상냥한 소녀가 그들을 발견하고 팔로 껴안아 들어올렸다.

[ruby(그 소녀, ruby=Sunset Radiance)]는 낮을 향해 몸을 돌려,
팬즈와 드렘을 팔과 가슴으로 품고 따뜻한 곳으로 걸어갔다.
====# 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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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심연.
오로지 소중한 이들만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 그 곳에서 아유는 눈물을 닦았다.

아유는 알고 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걸.

이제는 조용해진 목소리.
목소리는 자신처럼 눈물을 흘릴 수조차 없으니 '안행운'이겠지.
하지만, 최소한 이것만큼은…

이것만큼은 묻고 싶었다.

"너는 왜 슬픈거야?"

목소리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있지…" 아유가 물었다. "넌 뭘 할때가 행복해?"
"나는 말이야, 맛있는 거 먹을 때가 행복해!"

알고 있다.

"그리고, 팬즈랑 드렘이랑 놀 때…"

알고 있다.

"난 '친구 만들기'가 좋거든!"

알고 있다…
어둠 속의 목소리는…
사람이 좋았다. 사람들이 미소 지을때가 좋았다.
자신이 싫었다. 자신이 한 일이 싫었다. 서툴게 만든 것들과 실수로 점철된 과거가 싫었다.
비극은 혐오했다.
하지만, 행복한 결말은…
행복한 결말이 있다면, 참 좋겠지.

"아이고, 저런, 저런. 괜찮을 거야." 아유가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로! 왜냐하면…!"
목소리가 아유의 지혜 한 조각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괜히 똑똑한 척 하며 아유가 말했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면, 분명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들도 잔뜩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예를 들면 산책이나, 먹는 거나… 친구! 그런거! 알지? 응? 그게 인생이랑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거야! 계속해서 나아가면 분명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그러…니까…"

아유의 목이 매였다. 애써 차오르는 울음을 눌러담았다.

그리고, 아주 밝게 웃으며 목소리를 향해 말했다.

"아직 친구를 못 찾았으면, 내가 네 첫번째 친구가 될게!"
아유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아유가 모르는 사람이, 그녀를 위해 살을 에는 눈보라를 뚫고 나아갔다. 그 여정의 결과가 아유의 곁으로 다가왔다. 뱃속이 요동쳤다. 꿈속의 공간이 마구 뒤틀리기 시작했다. 비록 약해져 우리 안에 갇힌 신세일지라도, 세계의 '오류'는 여전히 강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모든 법칙에 위배되기에, '결함'의 현현이기에, 이상현상은 결코 이어질 수 없는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었다.
마치 구름과 바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과 같았다.
사실, 비록 기묘하고 강력한 존재이긴 하나, 이상현상은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소원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금처럼 새겨진 창조자의 유약함, 오류였다.

그들은 창조자가 남긴 간절한 소원보다는 창조자의 마음, 그 본질 자체에 더 가까웠다. 그렇기에 특별하진 않지만,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존재였다.

이 결함들은 운명조차 어찌할 수 없다. 희망이나 운명의 실로도 달랠 수가 없는 고통이다. 그렇기에 다른 이상현상들과 같이 한때 압도적인 힘을 뽐냈던 이 이상현상은 누군가 찾고 싶어했기에 발견된 것이 아니다.

대부분 그렇듯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개연성도 없이.

이 낡고 상처받은 고통의 껍질은…
기적 따위가 아니라 진실된 사랑이 있었기에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오류'는 아유의 어금니 사이에서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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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에 들어온 유리 조각을 느낀 아유는 미소를 지었다.
힘껏 깨물어 유리 조각을 깨트리자, 그와 함께 어둠도 깨지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터져나오듯 공간을 물들이며, 그림자를 햇살로 바꾸는 새하얀 빛,
깨진 파편을 통해 검은 공간으로 흘러들어오는 대지의 빛이 반짝이는 유리 가루와 함께 아유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마치… 한숨이 들린 것만 같았다.
불만이나 실망에서 온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행복하고 상냥한 숨소리가.

아유를 감싼 압도적인 빛은 멈추지 않았다.
목구멍을 지나가고 나서야 빛은 사그라들었다.

눈부신 빛이 사라지자 다시 앞이 보였다. 아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건넸다.

네 말이 맞아, 아유야.
고마워.

아르케아의 빛이 아유의 배를 채우자, 새로운 색이 꿈을 물들였다.
아유가 눈을 뜨자 울고 있는 날갯짓하는 팬즈와 드렘이 보였다.

몸이 허약해진 것이 느껴졌다. 두 박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렸다.

아유는 미소를 머금고 눈물을 흘리며 두 박쥐를 껴안았다.

그 어느때보다도 강하게.

햇빛 사이로 내리는 눈.
행복한 세 친구는, 서로의 따뜻함을 느꼈다.
아유가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상현상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기적? 아니면 우정의 힘이었을까?

…모두 정답이다.

꿈 속에서 빛에 감싸였을 때, 아유는 친구들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된 여정을 헤쳐 나갔는지, 그 모든 기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친구들을 지켜줘야지. 아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팬즈와 드렘은 물론, 새로 만든 친구도.

셋은 한 번 더 얼싸아나은 뒤, 힘들었던 여정과 친절한 소녀. 그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유는 웃었다. 웃고 또 웃고, 소리높여 웃었다.
끝없는 허기가 사라졌다.

항상 그랬듯 아유와 박쥐들은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는 저 너머로, 나아갔다.

5. 비타

5.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12-1 Unseeing-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Snow White.jpg Snow White 클리어
12-2 Unseeing-2 파일:Arcaea/Sakura Fubuki.jpg Sakura Fubuki 클리어
12-3 Unseeing-3 파일:Arcaea/NEO WINGS.jpg NEO WINGS 클리어

5.2. Unseeing Eyes

====# 12-1 #====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눈으로 보는 것인가? 피부로 느끼는 것인가? 귀로 듣는 것인가?
오감으로 감지한 것은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맞아.
본인의 오감, 또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감지한 것을 "안다"고 해.
아이에게는 특히나 잘 들어맞는 정의지.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해. 만난 적 없는 사람... 그럼에도 낯이 익은 사람.

그녀의 기억을 모두 모아 시간 순서대로 세워본 적이 있거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해.

머나먼 우주 저 너머에 흔하디 흔한 행성이 존재했어.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행성이었지.
그 행성의 어떤 아이들은 10살이 되는 해부터 타고났을 지도 모르는 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만약 발현된다면, 그 능력은 17세가 되는 해까지 지니고 있을 수 있었지. 생각과 소망대로 현실을 주무를 수 있는 능력.
평범한 세계 속 비범한 능력이었어.
아이들은 신이라기보다는 기묘한 설계자에 가까웠어. 그 굉장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행성을 지킬 수 있었지.

그 특별한 소년 소녀의 무리 사이에, 우리의 주인공이 있어.

그 나라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 그 행성의 이름... 역시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단 하나 기억나는 것,
그녀의 이름은... "비타"였어.

어느 날, 비타는 방에서 깨어난 후 어둑어둑해진 창문 너머로 밤 하늘을 보았어. 비타의 친구들도 하나둘씩 깨어났어.
서로에게 “좋은 아침”이라 인사했지만, 깨어난 시간은 저녁이었지. 지난 2년 동안 매일 저녁이 이와 같았어.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즐겨듣는 라디오 드라마를 이야기하고, 읽고 있는 책과 만화를 이야기하고, 미래의 꿈을 이야기했지.
비타와 친구들은 군복을 챙겨입고 지휘실로 향하며 수다스럽게 대화했어.

이 우주는 전쟁 중이었어.

아이들의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노리고 다른 나라가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곤 했거든. 보통은 자기들끼리 말솜씨를 이용하는 어른들도 있었어. 이폭력과 부패의 시대 속에서 가능한 한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외인 부대와 외교관들도 있었지. 그리고… 신경망-정신 통로-격자 네트워크(Nerve/Mind Pathway/Grid Measure)라는 것도 있었어. 소규모 운용 시 적을 견제하는 데에서 그치지만, 대규모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고, 다른 행성의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는 존재…
상세한 설명은 줄일게.

중앙 정보 통신실에 입장한 비타는 그 장엄함에 익숙하는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어. 이 거대한 공간에서 휘몰아치는 생각과 욕망의 소용돌이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걸어나갔어. 그녀와 친구들에겐 해야 할 역할이 있었거든. 자신들의 지정석에 다가갈수록 자연스레 수다는 줄어들었어. 그런 하찮은 잡담 대신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는 소리만이 서로의 머릿속에 울려퍼졌지.

그들이 사는 이 아름다운 행성을 위하여. 우주의 그 어느 행성보다 풍요로운 번영과 평화를 위하여.
비타는 NMPGM(Nerve-Mind Pathway-Grid Measure)에 접속했어.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를 지우고,
자신 몫의 통로를 가다듬었어.

그 무엇도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온 집중을 다했어.

알 수 없는 신호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 12-2 #====
전날 밤의 일이야.

비타와 친구들은 이번 주의 브리핑을 받고 있었지.

혼돈에 휘말려가는 다른 행성, 타국의 영공권에서 탈취당한 함선, 그리고 이번 주에 계획된 위문 공연까지.

아이들은 보통 죽음과 관련된 소식은 무시하고 위문 공연이나 자기 공적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어.
비타가 있는 곳으로부터 네 번째로 먼 행성 옆에 자리한 체제는 그나마 우호적이었어. 자급자족하는 사회였지.
비타의 행성은 그 행성과 간단한 합의를 보았어. 그들도 NMPGM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대신, 격동하는 대기에 감싸인 그 위험천만한 행성의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었지.

비타의 나라는 너그러웠어.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그런 관계를 잘 이용했지. 사적인 목적을 위해 네트워크를 뚫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비타는 아는 게 많지 않았어. 하지만 적어도 원하는 게 있다면 그냥 요궇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비타는 브리핑에서 들은 “혼돈에 휘말린 다른 행성”에 대해 묻곤 했어.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혼돈에 빠지게 되었는지 궁금했거든. 쉽게 잊힐 만한 원한 때문에 그런 끔찍한 다툼을 시작하다니, 비타는 바보같다고 생각했어.
비타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이 말을 잘 기억해둬.
비타가 알 수 없는 신호를 발견한 그 날…

자신의 담당 통로를 강화하던 비타에게 목소리가 들려왔어. "서쪽. 도움이 필요하다. 좌표는..."

비타는 움찔한 뒤 주변에 앉아있는 다른 아이들을 바라봤어. 하지만 이 목소리는 다른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는 듯 했어.

비타는 들은 좌표를 컴퓨터에 입력하며 마음을 단단히 한 후 생각을 내보냈어:

"관등성명을 대십시오. 공병부대입니까, 통신부대입니까? 행성 외부에서 뭘 하는 겁니까?"

질문의 답은 없고 침묵만 돌아왔어. 긴장한 채 비타는 계속해 송신의 출처를 생각하며 작업을 진행했어.

곧,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어.
"들립니까? 잠깐. 이거 진짜 되는 건가?"

"잘 들립니다. ‘말하는 법’은 알고 있는 모양인데, 능력자가 아닌가요?"

비타는 잠시 말을 멈추었어. 능력자가 아닌 사람…? 마음에 조그마한 불안감이 드리웠지.

비타는 말을 이어나갔어.

"신호를 지휘관들에게 연결하겠…"

"잠깐! 당신 NMPGM의 설계자지?! 그 중립국의...!"

"당연하지 않습니까." 비타가 대답했어. 조금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어. "지금 지휘관에게 신고하도록 하겠..."
"신고하겠다고? 그럴 줄 알았어! 당신네들 같은 오만한 작자들한테 뭘 기대하면 안된다고 말했는데! 왜 나한테 다 떠넘긴 거냐고…."

비타는 무심코 의자의 팔받침대를 꽉 쥐었어.

"저는 오만하지 않습니다." 비타가 대답했어.

"어떤 방식으로 네트워크에 들어온 건지는 몰라도 곧 들통날 겁니다. 우리 나라의 네트워크와 국민들을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치면 큰 대가를 치를 겁니다. 저희의 중립을 끝내려 하는 즉시 저희가 먼저 당신들을 끝내버릴테니까... 아, 알겠어요?"

"중립을 끝내는 게 당신들이라면?" 목소리가 물었어.

비타의 대답은 날카로운 "뭐라고요?"였지.
"당신들이 중립을 먼저 끝낸다면 어떻게 되는데?"

"벌어진 적 없는 일이고, 벌어질 리 없는 일이죠."

"페토르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모양이군."

대답을 하려던 찰나에 비타는 진정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 없음을 깨달았어.
"일단 통신은 종료할게. 하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올거야. 그 넓디넓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페토르'를 검색해 봐.
거기는 검열 같은 거 안 하잖아? 좋은 나라니까. 또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통신은 종료됐어.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비타는 두근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시 자신의 작업으로 돌아갔어.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은 없으나 해가 다시 뜨는 대로 조사해 볼 예정이었지.

====# 12-3 #====
살아 숨쉬는 모든 존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란...
..."진실"과 "지식"이 항상 같지는 않다는 것이야.

비타가 신호를 받은 건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이 오기 하루 전이었어. 주말 동안 그녀는 기지 도서관에서 암호화 신호로 내부망을 뒤지는 데 모든 여가 시간을 썼어. 그 암호화 신호는 비타와 친구들이 함께 금지된 게임, 이미지와 비디오를 몰래 찾는데 사용하던 것이었지. 진지한 용도로는 이용한 적이 전혀 없었어.

하지만 페토르의 이야기를 찾고 나자, 고작 장난감으로 여겼던 이 암호화 신호를 감사히 여기게 되었어.
이토록 위험하고 심각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
이쯤에서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난 내가 어디 출신인지 몰라. 아르케아와 공허를 떠도는 타인의 경험들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
그럼에도, 나는 아주 쉽게 깨달아버리고 말았어.

어떤 세상이든 절망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비타가 태어나기 20년 전, NMPGM의 확장 중에 페토르라는 아주 작은 행성이 발견된 후 내버려졌어.

그보다 400년 전에, 대기가 사라져버린 모행성에서 도망쳐나온 엑소더스급 함선이 그 작은 행성을 발견했어.
그 함선은 행성에 착륙한 후, 행성의 이름을… “페토르”라고 지었지. 비공식적으로 말이야.

페토르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다른 행성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어. 게다가 페토르는 황량한 우주 속에서 불규칙적인 궤도를 돌았기에, 잊혔다기보다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비타의 행성이 페토르를 발견했을 때엔, 정착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NMPGM의 힘으로 행성의 절반을 날려버렸어.
마치… 광산을 다이너마이트로 개통하는 것과 같았지. 행성의 반이 증발했고 정착민의 3분의 2가 사라졌어.
페토르인들은 비타의 행성과 대화를 시도했어. 하지만 비타의 행성엔 그 간청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었어.
정부의 비밀 조직이 페토르인들의 청원을 모두 묵살시켰다는 음모론이 다른 행성들 사이에 돌았지. 페토르인들은 한 제국 행성과 동맹을 맺었어. 자신들에게 항복하는 행성을 관용적으로 대하기로 유명한 제국이었지.

이 사건은 비타의 기억에 남아있어. 우주 끝자락 머나먼 곳에서 자신의 행성과 제국이 소규모 교전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거든. 비타가 들은 바로는 제국의 선제 공격이었어.

하지만, 다른 행성들의 자료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
“...그들은 미등록 정착민들이 제국과 동맹을 맺자, 자신들의 ‘실수’를 지우기 위해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남은 페토르인을 모두 몰살하고, 수많은 제국민들을 살해했다.”

수많은 출처의 자료들이 이 이야기를 뒷받침했어. 비타가 이를 진실로 받아들인 건, 자기 행성의 내부망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는 두 페이지짜리 기록을 보았을 때였어.
비타의 행성이 지키는 중립이란 단순한 가면이라는 것. 진실은 그렇게 시작했어.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행성이 페토르와 같은 운명을 맞았어. 심지어 대부분은 ‘실수’가 아니었고, 어떤 이들은 페토르 사건 또한 ‘실수’가 아니라 믿었지.

당연히 비타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당연히 비타는 일이 시작됨과 동시에 직장으로 돌아갔어.
당연히 비타는 알 수 없는 신호와 다시 통신을 연결했어.
"우리는 페토르인의 마지막 후손들이야." 목소리가 말했어.

“우리는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결국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린 동맹으로부터.

이 은하에 휘몰아치는 혼돈으로부터,

그리고, 비타의 행성과 그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정신 통로를 관리하는 건 아이들이라고 들었는데, 나… 아니, 우리는…" 목소리가 말을 더듬었어.

"아이라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생각했어. 높은 곳에 있는 어른들은 생각조차 해주지 않을 것을…"

"원하는 게 뭐죠?" 비타가 물었어.

"탈출구를 원해. NMPGM 안에서도 여기, 이 구역은… 아주 조용하고 먼 곳이라 들었어. 함선은 충분히 있으니 다른 행성에 정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아니면…” 이에 목소리가 대답했어.
제국의 동맹... 아니... 노예가 되어있던 사이에 페토르인들은 제국이 NMPGM을 유지시키는 이들의 정신 속을 염탐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페토르인들은 그 기술을 훔쳐, 절박한 심정으로 비타에게 이를 알렸어. 의무상 비타는 이 정보를 보고해야만 했지.

그러나 페토르인과 제국의 동맹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없었어. 신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고 말하는 피난민들일 뿐이었어.

비타는 이 요청을 쉽게 들어줄 수 있었어.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으니까.

아주 짧은 시간만 길을 만들어 그 사이로 재빨리 페토르인들을 점프시키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그래...

비타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어.
그런데… 알고 있어? 이 하나의 진실을.

비타의 행성은 정말로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마지막 페토르인들을 죽였어.

단. 한 명도. 남김 없이.
정신 통로 바깥으로 뻗은 “시야”로 비타는 우주선이 기다리고 있는 걸 확실히 보았어.
하지만, 비타의 능력으로 그 우주선들이 어떤 배들인지 알 수 있었을까? 그 진정한 형태를? 그 크기를?

아니, 알지 못했어.

무슨 수로 알았겠어?
비타는 “페토르인”들을 위해 길을 열었어.

…길을 통해 제국의 함대가 쏟아져들어왔어.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우주선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야기 했던가?

또 하나의 “진실”을 알려줄게.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어.
NMPGM을 타고 들어온 전함들은 신속하게 행성에 포격을 쏟아부었고, 비타의 행성은 이를 막을 수단이 없었어.

제국은 능력자 기지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어. 그 기지들부터 먼저 파괴되었거든.

행성의 표면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어. 반응할 시간도 없이, 몇 시간 안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어.

물론, 모두가 노력은 했지.

맞서 싸우려고, 다른 행성에 신호를 보내려고, 최대한 많은 전함을 격추하려고…

하지만, 그들에게 내려앉은 것은 절망 뿐이었어.
두려움…

자기 증오…

포격의 업화 속에 공포와 지옥이 현현했어.

첫 수부터 패배가 정해져버린 판이었어.

하늘에서부터 대포가 비타의 기지를 향했고…

비타와, 그녀의 상관들과, 친구들의 목숨을 빼앗아갔어.
그 후 소녀는 백색의 세상에서 눈물을 가득 머금고 깨어났어.

그러나 왜 눈물이 나는지 알지 못하였고, 가슴이 아픈 이유도 알 수 없었지.
비타는 죽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우리처럼.

비타는 자기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비타가 눈물을 닦고 일어났을 때 슬픔 외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책임감일까?

그 어느 쪽도 아닐거야.
그런 감정을 느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타는 이제… 아무것도 “알지” 못해.

그리고… 비타의 이야기를 끝맺으며, 그녀가 일어나 유리의 세계를 마주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질문이 하나 있어.
...
애초에 비타는, 하나라도 아는 게 있었던 걸까?

6. 이리스

6.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13-1 Dark-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Crimson Throne.jpg Crimson Throne 클리어
13-2 Dark-2 파일:Arcaea/Lucifer.jpg Lucifer 클리어
13-3 Dark-3 파일:Arcaea/Anökumene.jpg Anökumene 클리어
13-4 Dark-4 파일:Arcaea/Crimson Throne.jpg Crimson Throne 클리어

6.2. Dark Ambition

====# 13-1 #====
그림자가 스며들어

그 끈적한 추악함으로 모든 존재를 더럽힌다.

잠시 나타난 빛조차, 그림자에 삼켜지고 만다.

이곳은 부서진 마음이 빚어낸 광야.

어두운 적막 한가운데에서 소녀가 눈을 떴다.
암흑 사이로 진한 붉은색이 반짝였다.

그 공허 속에서 이리스는 깨어났다.

자신에게 달라붙는 “무(無)”를 떼어내며,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마치 타르처럼 “무”가 이리스에게 엉겨 붙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끈적한 덩어리들을 떼어냈다. 머리카락,
몸, 옷에서 “무”를 털어낸 후, “땅”에 두 발을 딛고 일어섰다. 방금까지는 없었던 “땅”, 빛의 발판이 발밑에 나타났다.
그녀는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어깨에 두른 코트가 몸을 감쌌다.
이리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몰랐다.
일어서서 미간을 찡그리며 주변에 만연한 공허를 바라보았다.

한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어떤 장소의 이름, “아르케아”...
그리고 이곳은 아르케아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르케아”는 낙원이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은 낙원.
혼돈 속으로 이리스는 발을 내디뎠다.

그 발밑으로 길이 나타났다.
세상이 뒤틀리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걷는 길이 구부러지는 와중에도 이리스의 마음은 평온했다.

자신의 운명이 이 세계에 있다면…

그렇다면, 이곳은 이리스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13-2 #====
낙원으로 향하는 길은 분명히 있다. 빛으로 밝게 비추어진 길은 아니지만,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리스에겐 낙원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

“아르케아”가 있는 곳으로 이리스는 향했다. 하지만 이는 낙원을 향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여정 도중에 그녀는 그 세계의 과거를 보게 되었다.

“아르케아”는 어리석은 소녀들이 모이는 세계이다. 빛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순진한 소녀, 또 다른 하나는 비상한 용기를 지녔으나 가시밭길을 걷는 소녀… 물론, 이 둘 이외에도, 목적 없이 방랑하며, 텅 빈 미소를 지은 채, 춤추는 유리조각을 바라보는 소녀는 수없이 더 있었다.

미소를 지을거면, 선명하게, 사악하게 지어야 하는 것을.

이리스는 새하얀 세상의 창문을 통해 그 소녀들을 알아가며, 그들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모든 것이 말이 되는 아르케아의 세계에서조차 그들은 방랑하고 있다. 공허에 오면 얼마 못 가 꺾이고 말겠지.
이리스는 아주 긴 시간을 공허에서 보내며, 공허와 “아르케아”에 연결됨을 느꼈다.

자신은 특별했다. 다른 소녀들과는 달랐다.
저들은 각성했을 때 빛이 맞이하러 와주었으니까.

“마치 이 애처럼…”

소녀는 빛나는 창문 옆을 느리게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전에 본 적이 있는 단안경의 소녀였다.

“오늘은 뭘 할 거니? 또 혼잣말?”
창문이 이리스를 따라왔다. 할 일도 없어 따분하던 이리스는 계속해서 창문을 바라보기로 했다. 단안경을 쓴 소녀는 이리스와 비슷한 시간에 각성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혼자서 떠벌대는 것뿐이었다.

“...”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

소녀가 손을 들자, 유리가 조그마한 “생물”로 변했다.

잠시 말없이 멈추어있던 이리스는, 창문이 떠나가고 나서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음… 방금 저거…”

잠시 숨을 고른다.

“왜 저걸 해볼 생각을 안 했지?”
동료를 만들 생각은 없다. 그런건 필요 없으니까.

이리스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공허의 일부가 조금 부서지는 데에 그쳤다.

“그렇지…”

이리스가 작게 속삭이고선 웃음을 뱉었다.

“이 모든게 전부 내 거잖아.”
이 세계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준다.

공허에서라면 무언가 다를거라 생각하다니 어리석었다. 자신의 발 밑에서 길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자신의 의지만으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길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지평선을 보고 잡으려 손을 뻗듯이,

산을 보고 오르려 발을 내딛듯이,

불을 지르면 마음속에서 불길이 솟듯이…

한순간, 악의로 가득 찬 염원이 이리스의 마음에 피어올랐다.

“힘”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오로지 그 의문 하나만을 위하여, 그녀는 다짐했다.

어둠에서 태어난 자신이, 끝없는 태양의 땅에 밤을 가져다주겠노라고.

====# 13-3 #====
물론, 이렇게 규모가 큰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리스는 우선은 현재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갈고닦기로 하고,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이리스는, 유리 조각 무리 옆에 섰다.

“...이얍!”

손을 앞으로 뻗자, 멀리 떨어진 창문이 “닫혔다”.
하얀 관문이 안쪽으로부터 무너져내려 빛을 잃고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좋았어…”

이리스가 중얼거렸다.
이 혼돈스러운 공허에조차, 규칙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 “어둠”으로 이루어져있다.
중력이 없기에 방향이란 개념은 일시적이다.
생각으로부터 구조물이 만들어진다. 무의식에 잠깐 스쳐간 생각일지라도 사람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끝이 있다. 그 모서리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관문, “창문”을 통해 아르케아가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절박한 것처럼.
이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꿈틀댔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보고, 집중했다.

“...”

손을 펴자, 손바닥 위로 유리 조각이 떠올랐다.

“흠…”

저 새하얀 세계에 “닿는” 것과 손에서 유리 조각이 생겨나는 것에 뭔가 관련이 있는 걸까?
이리스는 궁금했다. 매번 이러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저 세계에 닿을 때마다 “느껴졌다”. 마치 축복과 같은 따뜻함이 팔을 타고 흐르는 감각.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그 느낌. 그럴 때면, 손바닥에 기억의 조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 일 없이 그 감각이 사라지는 때도 있었다.

지금 나타난 조각은 어떤 반려동물의 기억이었다. 이리스는 고개를 돌려 그 유리 조각이 떠나가도록 두었다.

그녀에겐 공허를 조종할 힘이 있었지만, 단안경을 쓴 소녀가 아르케아를 다루는 힘만큼 자유자재는 아니었다.
이리스는 이를 깨물었다.
이리스는 이 힘에 대해 생각하던 것이 있었고, 결국 그게 옳았다.
그녀의 힘은 자신의 의지로 공허를 마음껏 다루는 힘이라기보다는, 마치 폭풍을 움직이는 힘과 같았다. 이미 스스로 존재하는 폭풍.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그 폭풍을 살짝 밀거나, 흡수하거나, 다른 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힘.
이리스는 사람을 해칠 정도로 강력한 돌풍이나 거대한 태풍의 기억을 몇 개 본 적이 있었기에, 이 비유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 공허는 태풍의 눈과 같았다. 이 장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장대한 힘이 있음을 그녀는 항상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힘의 촉매였다.

이리스는 창문을 닫는 방법을 깨쳤다. 공기 중에 떨림이 느껴질 때, 공허의 일부를 “부술” 수 있었다. 부수고 나면, 이리스는 “어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스스로 창문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 기회는 놓쳤지만, 그 기회를 잡기만 한다면 가능했다. 그렇게 확신했다.

이리스는 아르케아까지 걸어가기보다 강제로 지름길을 뚫고 싶었다.
공허가 소용돌이쳤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리스는 주변의 어둠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멈추었다가, 갑작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어둠의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걸까?
이리스가 손을 들어 허공을 붙잡자 마치 천 조각처럼 손에 쥐어졌다.

그 공기를 옆으로 확 젖히자, 그 미소 지은 얼굴에 새하얀 빛이 비치자 동공이 수축했다.
창문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공허를 찢으면, 새하얀 세계가 나타난다. 그 세계 전부가.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빛이 밝았다. 갑작스레 공기가 빠져나갔다. 공허가 뒤척이며 신음을 냈다.
여기에 바로 새하얀 세계가 있다. 지나갈 수 없는 창문을 통해 보기만 할 수 있었던 그 세계가.
결코, 지나갈 수 없었던 창문.
그것도 오늘까지다.
“자…!”

이리스가 공허를 불렀다. 어둠이 마치 혈관같은 형상으로 그녀의 팔을 기어가다 뒤틀려, 손 안의 폭풍이 되었다.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소녀는 팔을 들어, 손에 든 어둠을 빛의 세계에 부딪쳤다.

그렇게, 창문이 깨지며 빛과 그림자가 유리 조각처럼 흐트러지고, 이리스는 세계의 경계를 지났다.

====# 13-4 #====
“소원”은 정직하고 아름다운 단어이다. 희망의 빛과, 결국 다가올 승리를 말하는 단어. 그러나…

어둠에서 태어난 소녀의 마음은 무엇이 지배하는가? 정직함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다. 그렇다면 질투인가? 절망인가?

아니다. 그녀의 “소원”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죄는 긍지였다.
낙하하는 이리스를 공허와 빛이 동시에 붙잡아 감쌌다. 수많은 공간의 조각들이 그녀와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지면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창문이 닫힌다. 그림자가 이리스를 감싸며 절박하게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그녀는 어둠이 주변을 맴돌도록, 자신에게 흡수되도록 하였다. 낙하하는 이리스의 모습은 마치 땅으로 떨어지는 폭풍우와 같았다.

그녀는 어둠의 별똥별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밝았으며, 마음도 충만했다. 어둠이 그녀를 떠나기 전에 붙잡아, 자신을 어둠으로 물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소녀는 자신의 옆에서 함께 떨어지며 미소 짓고 있는 붉은 혜성을 보지 못했다. 설령 보았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순간이 황홀했기 때문이다.

그림자로 싸인 이리스는 지면으로 낙하하며 마음껏 웃었다. 실로 황홀했다.

공허의 힘으로 충만해 움찔대는 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 힘이 손으로부터 채찍처럼 솟아나왔지만 구름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힘은 구름을 잡고 싶었다. 이리스는, 구름을 잡고 싶었다.
그녀는 그 기분을 곱씹은 뒤, 다시 어둠을 방출시켰다.
수많은 그림자가 촉수처럼 하늘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렇게, 구름을 잡았다.

곧, 하늘마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리스는 손을 꽉 쥐고, 현란하게 팔을 옆으로 젖혔다. 밑에서는 그림자가 이리스를 안전하게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붉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떨어진 날, 밤도 내려앉았다.
빛이 물러서고 구름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새로운 하늘이 새어 나와 순식간에 세상의 반을 그림자로 뒤덮었다.

흑요석 같은 공허의 방울이 떨어지고, 붉은 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렇게, 밤은 낮을 만났다.

7. 나미

7.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14-1 Astral-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To the Milky Way.jpg To the Milky Way 클리어
14-2 Astral-2 파일:Arcaea/クロートーと星の観測者.jpg Clotho and the stargazer 클리어
14-3 Astral-3 파일:Arcaea/Altair (feat. *spiLa*).jpg Altair (feat. *spiLa*) 클리어
14-4 Astral-4 파일:Arcaea/To the Milky Way.jpg To the Milky Way 클리어

7.2. Astral Sea

====# 14-1 #====
현실처럼 생생한 꿈은 좀처럼 드물다.

하지만 그조차 꿈일 뿐이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드넓은 초원에 흩뿌리듯 펼쳐진 꽃밭, 흐르는 강과 장엄한 동굴과 거대한 계곡, 겨울의 냉기에 얼어붙어 반짝이는 얼음 기둥이 되어버린 폭포. 현실 세계는 기적과 같은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진짜 기적이 아니다. 꿈에서나 나올 법한 장관이지만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홀려버릴 정도로 아름답지만 현실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이 세계의 법칙에 따라 형성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게다가 소녀는 세계의 법칙을 이미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이 떠올랐다. 식물의 생육, 물의 순환, 온도의 변화와 그에 따른 현상…

하지만 이 세계는 기적인 것이 분명했다. 틀림없이 꿈이다. 소녀가 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떤 수업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유리 조각에 대해 알려주지는 않았으니까.

소녀는 절벽 끝에 서서, 이 새하얀 세계의 크기를 실감했다. 고요하고 창백한 땅을 건물들이 수놓고 있었다. 어떤 건물은 똑바로 서 있었고, 어떤 건물은 기울어져 있었다. 저것들은 버려진 걸까, 아니면 보존된 걸까?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소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단어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유리 조각이 하늘을 가르며 사람과 장소를 비추었다. 마치 영화와 같은 광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저 조각들의 이름도 “아르케아”였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소녀는 분명 자기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생생한 꿈은 좀처럼 드물다.

“...”

소녀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곧, 무언가 깨달은 듯 소녀의 몸이 움찔했다. 어떤 단어가 소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거다!” 소녀가 소리쳤다. “자각몽!”

곧 깨달음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소녀는 방방 뛰기 시작했다.

“호, 혹시 나…”

두 손을 입 앞에 가져다대며 소녀는 작게 속삭였다.

“나… 날 수 있나?!”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절벽의 끝으로 발을 한 걸음 내딛었다가…

갑작스레, 멈추었다.
뒷걸음을 치며 소녀는 머리를 마구 흔들고선 끙끙댔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렇게 마음 속으로 되뇌였다.

“아니, 아니아니아니, 되겠냐? 바보야!”

소녀가 소리쳤다. 마음 속에서 공포와 행복한 고양감이 뒤섞였다. 걸음을 내딛었던 순간, 절벽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마음을 움켜잡았다.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으으!” 소녀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신음했다. “한 번도 꾼 적 없는 자각몽을 왜 이제 와서?”

현실처럼 느껴지는 꿈, 자각몽. 꿈을 꾸는 도중 자신이 꿈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꿈 속 세계에 한해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 하늘을 날거나, 새나 나비가 되거나,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사고는 현실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을 부리지도, 새나 나비로 변신하지도 못했다.

소녀의 이름은 나미.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나미는 비교적 완만한 길을 찾아, 절벽에서 내려갔다.

====# 14-2 #====
자각몽다운 일도 못하는데, 내 무의식이 어떤 곳인지 구경이나 해볼까.

절벽에서 내려오며 나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길과 같이, 나미가 걷고 있는 길은 유리로 수놓아져 있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려 하면 수줍은 듯 도망가버리지만, 정작 다가오지 않았으면 할 때엔 가까이 와버리는 유리 조각들.
유리 조각은 각자 풍경을 머금고 있었다. 대부분 평범하고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진기한 구경거리도 적지 않았다.

로브를 쓴 사람들의 손짓에서 뿜어져나오는 색채와 연기의 향연처럼, 마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광경이라든지.
지금 나미가 서있는 장소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색이 정반대인 계곡과 절벽의 풍경이라든지. 마치 악마와 같이 뿔이 나있는 사람들이 에너지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모습이라든지…
“멋있다…”

나미가 숨을 뱉으며 말했다. 유리 조각을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역시나 조각은 순순히 잡혀주지 않았다. 나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고선, 다시 조심스럽게 길을 타고 절벽을 내려갔다. 이 세계는 분명 나미 본인의 무의식일텐데, 그녀의 행동에는 그다지 동조해주는 것 같지 않았다.

비록 이 무채색의 세계엔 처음으로 와보는 것이지만, 절벽은 한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나미가 살던 나라는 산길이 험했다. 푸르른 산등성이와 울창한 나무숲으로 뒤덮인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 나미는 원한다면 그 어느곳이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미는 열심히 여행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방학이 되면 가족, 친구와 함께 숲이나 산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정도가 다였다.

나미는 자신의 옆에 놓인 새하얀 바위에 손을 얹었다. 하얗지만, 이거 석회암은 아니지? 나미는 학교에서 배운 지질학 수업 내용을 떠올리려 했지만, 애초에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었다. 돌 분류가 어떻게 되더라? 다공암, 퇴적암, 변성암…

나미에게 있어 학교의 진정한 가치는 교실 밖에 있었다. 체육 시간은 재밌다. 음악 시간은 재밌다. 돌멩이 공부는 재미없다.
그럼에도, 이 세계의 기묘한 풍경은 나미의 흥미를 사로잡았다.

“이걸 보고 어떻게 돌멩이 수업을 안 떠올려…” 그녀가 중얼거렸다.

절벽을 타고 내려오며, 나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지면 너머로 유리 조각들이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마치 벽을 뚫고 지나가듯이… 아니, 어쩌면?

“동굴인가?!”

나미는 그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재빨리 그 지면 너머로 발을 옮겼다.

세상에 동굴보다 멋진 건 없어. 나미는 그렇게 믿었다.

나미는 신이 나서는 달려나갔다. 유리 조각들이 그녀를 인도하듯이 발걸음에 맞추어 튀어올랐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유리 조각들은 더욱 빠르게 날아올랐다.

동굴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아트리움이 나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리적으로 여기에 존재하는 게 가능한 건지 의심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미는 또다른 기적을 찾았다.

====# 14-3 #====
생각만으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까?

인지와 현실을 동일선상에 놓는 학자들도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인지하고 있다면, 그건 자신이다. 그렇다면,
나비가 된 꿈을 꾸는 사람은 나비가 되는 걸까? 아니면 인간이 되는 꿈을 꾸는 나비에 불과한걸까?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한계는 지식의 한계와 같다. 그렇다면, 개별적인 지식은 현실, 세계를 이루는 조각이다.
인간은 정신에 세계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감정과 기억을 물리적으로 재현하고, 그것들을
이어붙여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도 있는 걸까?

나미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공간, 기록 보관소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산 안에 존재하기엔 너무나 커다란 비밀 도서관… 아니, “도서관”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의 장엄함.

마치 예고없이 열린 천국의 문 너머로 건너온 것만 같았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의 무리가 나미의 앞을 가로질러 산
중심의 공동으로 향하는 길을 이루었다.

이 곳은 영원히 “생각”이 모이고, 분류되는 장소였다.

나미의 등 뒤로 새로운 생각들이 쏟아져들어왔다. 머리 위로는 유리가 발하는 빛이 쏟아져내려와 모든 공간을
비추었다. 나미는 걸음을 내딛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닥은 유리가
아니라 새하얀 자갈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산 속 공간은 인공물과 자연물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모양이었다.

그 순간 나미는 이 곳이 존재할 수 없는 장소이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눈부신 도서관은 나미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자갈돌 길을 따라 나선 계단과 책장과 기둥을 지나칠 때마다
아르케아 조각들이 날아와 그녀의 곁에서 동행하듯 따라왔다.

조각들이 발하는 빛이 나미의 피부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그녀는 벽 앞에서 멈추어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우와.”

숨이 섞인 목소리로, 나미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탄사를 내뱉았다. 그리고…

“나… 여기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
미려하게 일렁이는 유리 조각 무리에서 한 조각이 빠져나와 나미의 두 손 사이로 날아왔다.

물과 파도로 가득찬 세계의 모습이 그 조각 안에 비추었다.

나미는 침을 삼켰다.

저 장소로 가고싶었다.

그리고 이 꿈같지만 꿈이 아닌 세계는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줄 것이다.

소녀의 소원이 유리 조각과 공명했다.

그녀가 이 세계를 받아들이자…

아르케아의 세계도, 그녀를 받아들였다.

====# 14-4 #====
꿈 속의 꿈인가? 아니야, 이건…

나미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오렌지색 물결이 그녀의 주변을 감쌌다. 황혼의 빛, 일몰의 빛이었다. 나미는
뒤로 누워 파도에 몸을 맡겼다. 곧 그녀의 전신이 물에 잠겼다. 놀랍게도, 물 안에서도 나미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나미의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이는 상식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생각들은 나미 본인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경험이자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멋진 삶을 사는 누군가의…
시원한 수면 밑으로 흐르는 따뜻한 바닷물.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 나미는 행복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긴 대체 어딜까?”

나미가 말을 하자 수중임에도 또렷하게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혼자 온 것이 아님을 기억해냈다.

나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수십마리의 알록달록한 물고기가 그녀의 주변을 멤돌며 헤엄치고 있었다. 왼쪽으로부터
“그녀”가 알고 있는 어린아이가 이쪽으로 헤엄쳐오고 있었다. 아이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주저없이 그 손을 잡았다.

마치 집처럼 편안한 기분이었다.

두 소녀는 수면을 향해, 태양을 향해 고개를 올려들었다. 빛줄기가 파도에 부서져 물의 우주를 수놓는 아름다운 빛의
조각이 되었다. 두 소녀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물고기들의 색, 무지개색으로 갈라지는 햇빛, 몸을 감싸는 온기…
이 천국과도 같은 장소는…

기억이었다.
그리우면서도, 어딘가 기묘한… 그런 종류의 깨달음.

하지만 나미에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검은 장막이 드리운 하늘에 박힌 별들이 수면에 일렁일때까지…

하늘에 박힌 별들이 수면에 일렁일때까지…

거부하기 힘든 안락함이었다.

그렇다. 이건 기억이다. 그 세계는 기억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기억이 끝나면,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삶과 기억이 그 장소에서 나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미의 얼굴에 태양보다도 밝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깃털보다도 가벼웠다.

이것이 기쁨이자 천국이다.

나미는, 아르케아의 세계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