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로비치 I-2 (Григорович И-2)
1. 적군에서 유일한 항공기 설계자
러시아제 전투기의 역사는 1923년 1월에 모스크바 제1항공창(КБ ГАЗ No. 1)에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그리고로비치(Дмитрий Павлович Григорович : 1883~1938)가 설계국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몇 년 동안 러시아 남부에 있다가 그 무렵 막 모스크바로 옮겨온 드미트리 그리고로비치의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불확실했고, 심지어 백군에게 협조해 항공기를 개발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지방의 키예프에서 태어난 그리고로비치는 1918년에 내전으로 인해 페트로그라드의 정세가 매우 불안해졌을 때 오데사로 이동한 다음 타간로그로 옮겨왔었다. 적백 내전이 고조되면서 그는 바다 건너 미국으로 이민을 갈 것도 고려했지만, 일가족의 이주에 필요한 엄청난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서 러시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당시 타간로그 항공창은 독자적으로 항공기를 설계해내지 못하고 단지 기체와 엔진의 수리를 겨우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당은 그리고로비치가 백군에서 MK-1 리브카( МК-1 Рыбка)라는 전투기의 개발에 관여했다고 의심하고 있었고, 이러한 의혹은 볼셰비키 정부의 시선에서 보면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기에 충분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능한 항공 기술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공산 정부는 그에게 온정적으로 처우했는데, 훗날 스탈린 치하에서 많은 엔지니어들이 겪었던 일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2. 설계국 설립과 경쟁
그는 우선 소비에트 군사산업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Военной Промышленности при ВСНХ СССР : ГУВП ВСНХ)에서 항공산업 분야를 주관하는 항공부장에 임명되었고, 얼마 안가 자국산 비행정으로 이름을 떨친 그리고로비치 M-5(Григорович M-5)와 M-9을 만들어냈다. 사실 그즈음 드미트리 그리고로비치는 혁명기의 소련 정부가 확보하는데 성공한 거의 유일한 항공기 설계자였다. 따라서 그에게 국영 항공창을 진두지휘할 막중한 직책이 맡겨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리고로비치 설계국장은 아직까지 국산 전투기를 실용화시키지 못하고 있던 그 무렵, 소련제 전투기에 관한 비전을 제시했다. 그가 먼저 손을 댄 것은 엔진이었다. 12개의 실린더를 지녀 400마력의 출력을 가진 미국제 리버티 L-12 수랭식 엔진의 면허생산을 시도해 M-5 엔진의 시제품을 만들었는데, 이 엔진은 나중에 미쿨린 설계국이 설립되어 완전한 국산화에 성공했다. 같은 시기, 그리고로비치의 뒤를 이어 니콜라이 폴리카르포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Поликарпов : 1892~1944) 설계기사도 국산 전투기 개발에 도전하고 있었다.
설계국장 그리고로비치의 프로토타입이 항공창의 공식 작업으로 진행되는 동안, 폴리카르포프의 기체는 낮에 작업이 끝난 후에 만들어졌고 그 작업은 밤에도 계속되었다. 두말할 나위 없는 폴리카르포프 기사의 불법이었으나, 처음에 그리고로비치는 일부러 방치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산업총국으로부터 감시단이 도착하자 작업장은 그리고로비치의 비행기로 채워졌고 폴리카르포프의 접근은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끄는 기술진들이 만들어낸 Il-400(Ил-400) 단엽기는 경쟁 기종보다 먼저 롤아웃되었다. 하지만 이 시제기가 1923년 8월 15일에 시도된 시험비행에서 이륙에 실패하자, 그리고로비치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드미트리 그리고로비치가 고안한 전투기는 복엽 날개에 완만한 후퇴각이 주어진 목제 단엽기였다. 그것은 수랭식 엔진을 얹기 위한 매끈한 카울링 덕분에 경쟁 기종보다 더 날렵해 보였다. 개방형 조종석의 앞에는 200리터 용량의 연료탱크와 PV-1 기관총이 2정 설치되었는데, 각각 500발의 탄창이 제공되었다. 상단 날개 중앙에는 96리터짜리 보조 연료탱크가 설치되었다.
이 기체는 1924년 1월에 I-2(И-2)로 이름붙여졌지만, 나중에는 I-7(И-7)로 불리기도 했다. I-2의 생산은 1924년 2월 1일에 시작되었다.
3. 최초의 국산 전투기
I-2의 완성은 국내외로 대서특필되며 널리 선전되었더라도, 생산은 상당히 차분한 속도로 진행되었다. 시제기는 1924년 9월 6일에 산업총국 위원회가 엔진과 기체를 검사한 다음 비행 시험을 허가했고, 11월 4일에 테스트 비행을 맡게 된 조종사 알렉산드르 주코프(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Жуков : 1895~1980)에 의해 떠올라 하늘로 인도되었다. 시험비행을 마치고 착륙한 주코프는 조종성이 좋고 이륙 활주거리가 짧아서 놀랐고 착륙이 쉽다며 호평을 했다.2차 비행부터 곡예 비행을 시도하면서 최대 속도와 상승률이 측정되는 동안 기술진들은 조종타면에 설치된 베어링이나 케이블 같은 자질구래한 부품을 미세 조정했고, 동력계를 담당한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미쿨린(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кулин : 1895~1985) 기사가 이끄는 스탭들은 엔진의 제어 시스템을 손보았다. 그런데 이처럼 개선이 가해지면서 주코프는 이 전투기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특히 가속을 위해 스로틀을 밀면 기수가 자꾸 숙여지는 버릇을 호소했고, 결국 그는 6번째 비행을 마친 후에는 테스트 속행을 거부했다.
며칠 후인 11월 19일부터 새로운 테스트 파일럿인 미하일 그로모프(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Громов : 1899~1985)와 블라디미르 필리포프(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Филиппов)가 대신 I-2의 조종간을 잡았는데 이들은 주코프가 지적한 증상에는 그리 주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두 조종사 모두 비좁고 불편한 조종석을 지적하며 수정을 요구했다. 사실, 주코프는 단신에 체구가 왜소해서 탑승한 동안 이런 단점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었다. 필리포프는 이렇게 꼬집었다.
"I-2의 조종석은 난장이를 위해 설계된 게 틀림없습니다. 어찌 됐든 평범한 사람을 위한 조종석은 아니죠. 폭이 너무 좁아 보통 사람도 거의 옆으로 몸을 돌려야만 앉을 수 있는데다, 계기판은 코앞에 있습니다. 괜찮은 비행 특성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비행기에 타고 있다는 느낌 보다는 경주용차를 모는 느낌이 들걸요."
I-2는 소련 인민의 자랑이었지만, 실상을 알게 되면 완전히 실용화된 전투기는 아니었다. 문제점들을 밝혀내 개선하기 위해 조종사뿐만이 아니라 정비사들의 의견까지 수렴했지만, 개량을 승인받으려면 층층시하 보고를 거쳐 위원회를 소집해야 했고 관료적인 서류들이 오가는 동안 개발진들은 손을 놓고 있어야만 했다. 1925년 2월 3일에야 겨우 머리를 맞댄 위원회는 이 기체가 여러 결점들을 안고 있다는 점에 동의했는데, 특히 화재에 취약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연료 탱크와 도관에서 가솔린이 조금씩 새는 이 증상은 설계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무렵 낙후된 소련 공업 기술력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정비사를 잘 교육시켜 점검과 정비를 철저히 하라는 조치만 취해졌고, 생산형 개발이라는 숙제에 쫓기던 기술진들은 다음 절차로 넘어갔다.
4. 개발처의 이동
그밖에도 테스트를 통해 방향타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점이 밝혀져 수직 미익의 면적을 늘리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4월에는 새로운 꼬리날개가 붙여졌고 17일부터 테스트가 계속되었다. 이때부터 I-2의 국가 테스트와 추가 작업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레닌그라드로 옮겨져에 진행되었다. 느닷없이 개발 근거지를 바꾼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은 새로운 인력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1925년 초, 설계국장과 함께 항공부장을 겸임하고 있던 그리고로비치는 해군 관할의 해양 실험기 공학부(Отдел морского опытного самолетостроения : ОМОС)까지 책임지게 된다. 이에 따라 I-2 개발진은 상당수가 레닌그라드에 있는 제3호 붉은 비행사 공장(Завод No. 23 Красный летчик)으로 옮겨져 재배치되었다. 이곳은 주로 소련 해군에 필요한 수상기나 비행정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기관인 탓에 여러 핵심 인력들을 해군에 빼앗기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1925년 4월 30일에 분해된 I-2 전투기가 열차에 실려 새로운 둥지로 향하게 된 이유였다.
레닌그라드에서의 시험은 5월 25일부터 6월 25일까지 진행되었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넘치는 의욕적인 엔지니어 A. D. 멜니츠키(А. Д. Мельницкий)와 1차 대전에서 전투조종사였던 L. I. 긱샤(Л. И. Гикса)는 조종면을 키우고 비좁은 조종석을 넓히는가 하면, 심지어 당시로서는 최첨단 장비인 터보 차저까지 설치했다. 그러나 원형기의 개량이 이만큼 진행되는 동안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항공창에서는 마침내 양산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제 설계자를 포함해 모든 스탭들은 더 이상 큰 수정 작업은 엄두도 낼 수 없게 되었고, I-2가 안고 있던 단점들은 기념행사의 화려한 꽃다발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현재 상태로 공군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기까지는 여전히 먼 길이었다. 어쨌든 소련 공군은 이 전투기를 채용했지만, 그리고로비치는 이 전투기의 개량 작업은 계속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이런 모습이 군부에 좋게 비칠리가 없었다.
5. 개량형
이 전투기의 개량형은 I-2bis(И-2 бис)로 지정되었다. 그것은 각 날개 지주의 연결점을 보강하고 생산성을 높여 제작비를 낮추는 간소화도 배려되었다. 말썽 많던 조종석도 확장되었고 조잡했던 계기판의 배치도 다시 손보았다. 일단 형태면에서 차이는 복엽날개의 윙박스와 착륙장치가 바뀌었고, 꼬리날개와 엔진 카울링도 달라졌다.
첫 번째 I-2bis는 처음에는 레닌그라드 공장에서 제작되었다. 1927년 봄, 이 전투기는 140대를 추가 생산하기로 결정됐으나 이후 주문은 50대로 줄어들였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1927년에 7대의 I-2bis가 모스크바 공장에서 생산되었다고는 하나, 당시 관련 엔지니어들이 거의 모두 떠나버린 상황에서 이 주장은 좀 의심스럽다. 아마도 이 7대의 기체는 bis 사양 이전의 과도기적인 파생형일 것이다. 당시 제1호 공장장이었던 이반 코스트킨(И. М. Косткин)의 회고에 따르면, 모스크바 공장에서 첫 I-2bis는 1928년 여름에나 완성되었다고 했다. 레닌그라드에서 완성된 개량형의 도면을 모스크바까지 옮기는 작업은 1928년 중반까지 계속되었고, 개량 포인트인 수정된 날개 연결 브라켓을 반복해서 공작하느라 바빴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량형 전투기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조종사들은 착륙 활주 도중에 부서지는 바퀴, 잔디로 막혀버리는 라디에이터에 대해 불평했고, 그밖에도 롤링에 대한 응답성이 나빴으며 엔진은 출력을 높이면 기수가 떨리는 증상이 있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I-2bis는 만장일치로 I-2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다.
조종간을 고정해도 금세 멈추지 않는데다 기동성이 좋지 않아 고도 1,500m에서 치러진 투폴레프 R-3(Туполев Р-3)과의 모의 공중전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기가 어렵다.
공군연구소(НИИ ВВС)의 블라디미르 고르시코프(В. С. Горшков) 연구소장이 서명한 모의 전투 시험보고서에는 I-2bis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리고 있다.
속도와 상승성능도 처지는데다 기동성까지 부족한 I-2bis는 현대 전투기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구형인 I-2에 비해도 비행 데이터가 열등하지만, 제작 및 운영을 개선하는 조건에서는 I-2bis가 더 바람직합니다. 모든 결함이 해결된다면 I-2bis는 훈련기나 기종전환 교육용으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같은 박한 평가가 정당한 것인지는 떠나, 당시 소련 공군에는 쓸만한 고성능 전투기가 매우 부족했다. 성능이 기대되는 폴리카르포프 I-3는 생산형을 개발 중이었고, 해외에서 신예 전투기를 구입하는 방안도 정치, 군사, 외교 등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1927년 가을에 공군은 I-2bis와 관련하여 당시 공군참모총장이던 표트르 I. 바라노프( Пётр Ионович Баранов : 1892~1933) 중장이 주관해 열린 회의를 통해 국산 전투기가 군의 요구조건을 충족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기술 교육과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를 채용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내렸다.
6. 한심한 운용 실태
첫 2년 동안, I-2는 모스크바 항공창에서 52대가 완성되었다. 이 전투기들은 가치냐(Гатчину), 브랸스크(Брянск)와 비톕스크(Витебск)에 주둔한 부대에 먼저 배치되었다. 1929년부터는 보리소글레프 비행학교(Борисоглебской летной школе)에서도 이용되었다. I-2bis는 2대가 먼저 1928년 여름에 브랸스크의 제15항공여단(15-ю авиабригаду)에 들어갔다. 연말까지 개량형의 수는 12대로 늘었다. 1929년 초, 소련 조종사들의 작전 경험에 따르면 I-2bis가 다소 둔하고 조종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1928년이 저물어 갈 즈음, 레닌그라드 항공창은 23호기 제작에 필요한 부품들을 인수받고 있었다. 이 전투기들은 1929년에 공식적으로 생산이 중단되기 전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공장에서 209대가 생산되었다.
1928년에 소련 정부는 이란에 R-1(P-1) 전투기와 함께 I-2bis를 몇 대 판매했다. 소련이 처음으로 수출한 이 국산 전투기는 I-2bis의 No.2116호기부터 2123호기까지 8대였는데, 영국제 빅커스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고온건조한 중동 지역에서 쓰이기 위해 라디에이터를 확대했다. 이 전투기들은 분해되어 예비 부품이 든 상자와 함께 포장되어 운송되었다.
I-2와 I-2bis의 생산이 공식적으로는 1929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 특유의 비능률적인 관료제도 때문에 I-2는 1930년에, 그리고 I-2bis의 마지막 기체는 1931년 5월에 군부대에 인도되었다. 대략 107대는 1930년 하반기까지 납품되었으며 1931년에 77대가 인도되었고 1932년에도 64대가 보내졌다. 놀라운 것은 1933년 말까지도 45대의 I-2가 인도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때쯤 되면 소련이 만들어낸 첫 번째 전투기로 이름을 남긴 I-2는 완전히 구식이 되어 훈련이나 기술 교육용으로나 쓰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