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G. T. 보우리가드 P. G. T. Beauregard | |
본명 | 피에르 구스타브 투탕트 드보우리가드 Pierre Gustave Toutant de Beauregard |
출생 | 1818년 5월 28일 |
미국 루이지애나주 세인트버나드 패리시 | |
사망 | 1893년 2월 20일 (향년 74세) |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아메리카 연합 육군 |
최종 계급 | 아메리카 연합 육군 대장 |
복무 기간 | 1838~1865 |
학력 | 트랜실바니아 대학교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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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루이지애나주 세인트버나드 패리시에 있는 농장에서 크리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농장을 경영하며 성장했다. 1838년 2등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중 섬터 요새에서 맞붙게되는 로버트 앤더슨을 가르쳤다.이후 루이지애나로 배치받아 뉴올리언스의 시설을 증축하는데 힘썼다. 미국-멕시코 전쟁당시 윈필드 스콧휘하에서 복무했으며 콘트레라스, 추루부스코, 차풀테펙 등 핵심적인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차풀테펙 전투 당시 요새를 공략하는 계획을 구상했고 전투 중 총상을 입었으며 멕시코시티에 입성했을때 가장 먼저 입성한 장교였다.
전후 뉴올리언스로 돌아와 정계에 입문했고, 1858년 뉴올리언즈 시장 선거에서 낙선했다. 1858년부터 1861년까지 뉴올리언즈 배수 공사의 수석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 후 육군사관학교로 생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현역으로 복귀했고 1861년 1월에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며칠 뒤 루이지애나주가 연방을 탈퇴하며 사임했고[1] 얼마 안가 남군 준장으로 들어왔으나 임관날짜가 빨라 최초 5명의 대장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찰스턴 주둔군 사령관으로 배치받아 남북전쟁 최초의 전투인 섬터 요새 공격을 지휘했고 제1차 불 런 전투 당시 공을 세웠다. 하지만 동부전선 지휘권을 조셉 E. 존스턴이 가지게 됨에 따라 서부로 이동했다.
샤일로 전투 당시 오사로 인해 전사한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의 권한대행으로 전투를 지휘했고 율리시스 S. 그랜트를 이기기 직전까지 갔지만 지원군을 받은 그랜트에게 패배했다. 이후 미시시피주 북단의 철도 요충지 코린트까지 헨리 할렉의 북군 대군에 의해 뺏기게 되었다. 하지만 할렉이 진군하기 전 주력군을 온전히 후퇴시킨 성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은 코린트 함락과 보우리가드의 성격에 불만을 가졌고, 보우리가드의 건강 문제까지 겹쳐 브랙스턴 브래그를 대신 서부전선 주력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방어를 맡게 된 보우리가드는 보직에 불만을 가졌지만 북군의 육군-해군 합동공격에 맞서 찰스턴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해안 방어를 위해 잠수함, 기뢰 등 선진 기술을 시험하였고, 친분있는 정치인들을 통해 로버트 E. 리의 동부전선에서 군대를 차출하여 서부전선에 힘을 싣는 대전략을 제시하기도 했다.
1864년 노스캐롤라이나 북부-버지니아 남부 방어를 맡게 되었다. 버뮤다 헌드레드 전역 당시 2선급 병력으로 더 수가 많은 벤저민 버틀러의 북군을 저지했고, 그랜트의 기습적인 피터스버그 공격까지 막아내며 리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데 성공했다. 이는 북군의 피터스버그 조기 함락을 막고 남북전쟁을 1년 가까이 연장시킨 승리였다. 이후 리의 휘하에서 피터스버그 포위전을 치렀지만 리에게 점차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보우리가드는 독립적인 지휘권을 받고 싶어했지만 셰넌도어 계곡 방면군은 주발 얼리에게, 서부전선 지휘권은 존 벨 후드에게 돌아가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0월 보우리가드는 신설된 서부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는데 이는 군사 지휘권이 아닌 행정 및 조언 역할의 자리였다. 보우리가드는 후드의 테네시 진군을 감독하면서 후드와 친분을 쌓았고, 이는 전후 후드의 죽음까지 이어져 후드가 남긴 아이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을 막는 것도 그의 임무였지만, 이미 남군 후방에는 셔먼의 대군을 막을 병력이 없었고 보우리가드는 셔먼에 맞서 주변 군대를 적극적으로도 집결시키지도 않았다. 셔먼이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맹렬히 진군하자 황급히 병력을 모으고 남부연합 정부에 경고를 보냈지만, 셔먼의 진군이 당대 상식보다 너무 빨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리의 권고로 1865년 2월 조셉 E. 존스턴이 보우리가드 대신 서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존스턴의 휘하에 있다가 존스턴과 함께 북군에 항복했다.
전후 흑인노예 해방을 지지했고 저서를 작성했다. 그 과정에서 남부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와 책임 논란을 벌였다. 이집트, 루마니아에서 군사고문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하고 엔지니어로 살아가다가 1893년 사망했다.
[1] 최단기 재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