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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4 18:33:17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마리우스파)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라틴어: Gaius Marcius Censorinus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82년 11월 3일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조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아버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형제)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조카)
직업 로마 제국 레가투스

1. 개요2. 생애

1. 개요

로마 공화국레가투스. 술라의 내전 시기 마리우스파의 일원으로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맞서 싸웠다가 술라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마르키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플레브스 최초로 감찰관을 2번 맡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의 후손이다. 조부는 기원전 149년 집정관을 맡아 제3차 포에니 전쟁 중에 카르타고를 포위 공격할 때 해상에서 봉쇄한 로마 함대를 지휘한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였다. 아버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는 이름만 전해진다.

기원전 91년 외교 활동을 수행한 뒤 동방에서 돌아온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했지만 정작 본인이 법정에 출두하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기원전 88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와 함께 화폐 주조관을 역임했다. 두 사람은 동전에 누마 폼필리우스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초상화, 그리고 아폴로와 질주하는 말로 데나리우스를 주조했다.

기원전 88년 로마의 내부 정치 갈등이 술라와 가이우스 마리우스 사이의 내전으로 확대되었는데, 그는 마리우스파에 가담했다. 일부 기록은 그가 술라가 권력을 장악한 후 반역자로 선언된 12명의 로마인 중 한 명이라고 밝혔지만, 아피아노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포함한 단 9명만 언급했고, 켄소리누스를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1년 후, 켄소리누스는 로마를 점ㄹ여한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군대에 있었고, 도시 방어를 지휘한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처단하고 그의 머리를 킨나에게 바쳤다.

기원전 82년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와 내전을 재개했을 때, 켄소리누스는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의 군대에서 레가투스를 맡아 술라에 대적했다. 카르보는 켄소리누스에게 8개 군단을 맡겨서 프라이네스테에서 술라군에게 포위된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돕게 했지만, 켄소리누스는 진군하던 중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매복 공격으로 패배했다. 그 직후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갔고, 켄소리누스는 불과 7개 코호트만 수습해 카르보와 합류했다.

이후 카르보가 아프리카로 망명하자, 켄소리누스는 가이우스 카리나,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다마시푸스와 함께 마리우스파 군대를 이끌었다.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프라이네스테를 공략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삼니움 장군 폰티우스 텔레시누스와 루카니아족의 마르쿠스 램포니우스에게 가담했다. 그 후 텔레시누스의 계획에 따라 술라가 프라이네스테 포위에 전념하느라 비어있던 로마를 접수하고자 야간에 진군했고, 로마 인근에 도착한 뒤 로마 시에 있던 술라파 인사들이 급히 동원한 적군을 가볍게 물리쳤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술라가 급히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달려오자, 켄소리누스는 텔레시누스의 지휘하에 이들을 요격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콜리네 성문 전투에서, 마리우스파는 술라가 직접 지휘한 좌익 부대를 격파했지만, 그 사이에 우익 부대를 지휘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 의해 다른 측면 부대가 격파당하고 본진이 함락되면서 패배했다. 켄소리누스는 도주했지만 다음 날 카리나와 함께 체포되어 술라에게 끌려갔고, 11월 3일에 술라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켄소리누스의 수급은 마리우스파가 패배했다는 걸 입증하는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프라이네스테 성벽으로 운반되었다.

형제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는 기원전 82년 화폐 주조관을 역임했으며, 조카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는 기원전 3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