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910년[1] 12월 3일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 |
사망 | 몰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이명 | 강백운(姜白雲)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약수는 1910년 12월 3일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성부 서린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에 거주하였다.그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재학하던 1930년 6월 11일 밤 개최된 조선학생회 집행위원회에서 신현중과 함께 선전조직부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이후 조선학생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30년 10월 31일 <조선학생회 1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했고 1931년 6월 기관지 <조선학생> 창간을 주도했지만, 일제 당국은 <조선학생>에 '불허가' 판정을 내리고 모두 차압했다.
한편,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단행하자, 강약수는 9월 21일 신현중, 이치카와 토모히코(市川朝彦) 등과 함께 <반제학생신문(反帝學生新聞)>을 발행하여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성제국대학 등 각 학교에 배포했다. 또한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독서회를 지도하여 오효선(吳孝善), 윤은식(尹恩植) 등을 반제회에 가입시켰다. 9월 27일, 그는 "일본의 만주 출병은 계획적, 침략적인 것으로서 세계전쟁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반전격문을 각 학교에 배포했다가 경성본정경찰서에 검거되었다.#
1931년 10월 28일, 경성본정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
1931년 11월 3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이후 그는 1년간 미결수로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2년 8월 15일 공판에 회부되었고, 그해 11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인 1934년 1월 6일부터 1936년 3월 3일까지 동아일보사 아산지국 인주분국장으로 활동했지만 또다시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1936년 11월 26일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1940년대에도 여러 차례 검속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1931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