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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0:46:44

게르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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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도시
1.1. 게르니카 폭격
2.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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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시

스페인바스크 지방에 있는 도시로, 인구는 15,000명 정도다. 현재는 이웃한 마을인 루모(Lumo)와 통합해 정식 명칭은 게르니카루모(Guernica-Lumo)다.

1.1. 게르니카 폭격

스페인 내전 당시인 1937년 4월 26일 독일 콘도르 군단스페인 제2공화국 세력권이었던 게르니카에 가한 폭격이다.

1937년 4월 국민파는 수도 마드리드에 대한 공세가 실패로 끝난 후 분단, 고립된 스페인 북부 바스크 전선에서의 공세에 주력을 투입하고 있었으며 공화파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게르니카는 보잘 것 없는 시골마을이 아니라 철도와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거기에 당시 바스크 국의 3개 대대 병력도 주둔해있었고 탄약 공장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에서는 독보적인 정치적 정통성을 지닌 도시였다. 우선 게르니카 내의 백색 오크 나무[1] 아래에서는 바스크 지방의 각 도시들의 의회가 열렸으며 이 외에도 바스크 지방의 관료들이 모여 이전 세대에 선서를 하는 전통이 있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바스크 지방의 영주, 이후에는 카스티야나 스페인의 국왕이 영주권을 행사하기 전 이 나무 아래에서 선서를 했다. 특히 카를로스파 국왕 참칭자들이 카를로스파 내전 당시 자기들이 국왕임을 선서할 때 이곳에서 선서를 했다.

당시 게르니카 일대에는 존재했던 공화파 부대의 규모는 23개 대대에 달했으며 이들은 교통의 요충지인 게르니카를 거쳐 빌바오 방면으로 후퇴 중이었다.

이에 4월 26일 독일 콘도르 군단은 공화파 부대의 후퇴를 지연시키기 위해 게르니카에 대한 전술폭격을 실시한다. 이 폭격대는 He-111 3기, Do-17 1기, Ju-52 18기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엉망인 폭격 정밀도[2]로 인해 주요 목표였던 렌타리아 다리는 물론 도로와 철도에도 별 피해를 주지 못했고 이에 더해 프랑코군의 느린 진격 속도로 인해 공화파 군대는 큰 피해 없이 철수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게르니카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150명, 높게 잡으면 250~3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2. 그림

파일:external/www.pablopicasso.org/guernica3.jpg
게르니카
Guernica
화가 파블로 피카소
국가
[[스페인|]][[틀:국기|]][[틀:국기|]]
제작 1937년
사조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종류 전쟁화
기법 캔버스에 유화
크기 349.3cm × 776.6cm
소장
[[스페인|]][[틀:국기|]][[틀:국기|]]
국립 레이나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파블로 피카소의 1937년 작품.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다.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작품의 주제로 다루었다. 초현실주의와 후기 입체주의가 혼합된 독특한 모더니즘 양식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1937년 5월 10일부터 6월 15일까지 제작되었다.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1월에 스페인 공화정부 사절단이 피카소를 직접 방문하여 그 해 열릴 파리 국제박람회 스페인관의 벽화 제작을 의뢰했고 당시 공화파 지지자였던 피카소의 승낙으로 게르니카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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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만으로는 느끼기 어렵지만 가로 7m, 세로 3m가 넘는 상당한 대작이다. 그래서 피카소 역시 게르니카를 그릴 때 붓이 아닌 롤러로 그렸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피카소가 파리에 머물고 있었는데, 피카소를 감시하러 온 게슈타포 장교가 그의 집에 있던 복제품을 보고 "저거 당신이 그린 거요?"고 따지자 피카소가 "아니, 당신한 거지."라고 응수했다는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다.[3]

한편 이 그림에 대해 평론가들이 '황소는 전체주의, 말은 핍박받는 스페인을 상징한다.'는 해석을 내놓자 피카소가 "소는 소고 말은 말이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이후에 이어진 말이 더 있으나 어떤 말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이들은 학살을 당한 짐승들일 뿐이다. 나에게는 그게 전부다."라고도 알려져 있다. 뭐가 됐든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제대로 보여주는 그림이자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한 나치의 만행을 세상에 널리 알린 반전(anti-war) 회화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첫 공개 후 작품은 프랑코 독재 정권 하의 스페인에서 전시할 수 없다며 피카소가 반대해서 뉴욕 현대 미술관에 대여 형태로 전시했다. 피카소는 92세까지 장수했지만 프랑코도 천수를 누리는 바람에 피카소 생전에 이 그림이 스페인으로 되돌아오지는 못했고 스페인이 민주화된 후 피카소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보존 문제로 1992년부터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미술관(Museo de Reina Sofia)에 소장·전시 중이다.

스타워즈 클론전쟁 3D 애니메이션에서 패러디가 나온다. 다스 시디어스다스 몰이 싸울 때 배경으로 등장한 그림은 여지없이 게르니카의 판박이. 오른쪽 총을 든 트루퍼와 칼을 든 보바 펫 구성을 살펴보면 6.25 전쟁을 모티브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도 패러디된 듯.

2024년 스페인의 해변에는 가자 지구 전쟁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게르니카 그림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화제가 됐다. 국내 기사
[1] 이 문제의 백색 오크 나무, 즉, 게르니카 나무는 도시의 절반 이상이 소이탄으로 잿더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거의 아무 피해도 받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다.[2] 당시에는 급강하 폭격을 하지 않으면 정확한 핀포인트 폭격이라는 게 불가능했다.[3] 독일어 das machen은 '이것을 만들다/무엇을 하다'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혹은 나치 콘도르 군단을 필두로 한 공군이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한 것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이었으니, 게르니카라는 그림은 '나치가 그린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