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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03:55:19

겐틴 철도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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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겐틴 철도 참사.jpg

Eisenbahnunfall von Genthin

1. 개요2. 사고 당시3. 사고 이후

1. 개요

1939년 12월 22일 나치 독일 프로이센 작센주[1] 겐틴(Genthin)에서 일어난 철도 사고.

2. 사고 당시

12월 21일, 베를린의 포츠담 역에서 쾰른 역으로 향하는 D10 급행 열차가 오후 11시 15분에 출발했다. 당시 주말인데다, 월요일이 크리스마스라 긴 휴일 동안 휴가를 즐기러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많아 역에 내릴때 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거기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라 여객 열차 운행이 적었고, 폭격을 방지하기 위해 역들마다 한밤중에도 불을 꺼놨기에 시간이 더 지체됐다. 브리든버그를 지날 때쯤엔 27분이나 늦었다.

11시 45분, 자를란트노인키르헨으로 향하는 D180 급행 열차가 출발했다. 열차 기관차는 DRG 시리즈 01 158로, 최대 시속 130km로 달릴 수 있었다. 앞서 먼저 손님을 태워가며 출발한 D10과는 달리 태울 손님이 적었기에 D180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문제는 D180의 기관사 베데킨트(Wedekind)가 열차 신호등이 빨간 신호를 보낼 때도 속도를 냈다.

D10 열차가 겐틴 역으로 향하고 있을 때, 앞서 초록불이 켜졌기에 계속해서 속도를 내다가 겐틴역에서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멈췄다. 겐틴 역에 D10 열차가 정차해있으니 원래대로면 앞서 켜진 신호등을 초록에서 빨강으로 바꿔야 한다. 하지만 바꾸지 않았다. 때문에 D180이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겐틴역에는 빨간불이 켜져있었지만, D180은 이를 무시했다. 이미 겐틴 역엔 D10 열차가 서있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밤에는 열차역에 불을 꺼놨었고, 밤에 안개까지 낀지라 D180은 앞에 열차가 서있는 것도 몰랐다. 신호소와 역에서 깃발까지 흔들어가며 경고했으나 소용 없었다.

결국 23일 오전 0시 15분 쯤, D180이 D10을 시속 100km로 들이받았다. 인근 마을에선 충돌음을 듣고 가까운 공장이 폭발했다 착각했을 정도였다. 충돌의 충격으로 두 열차는 탈선했다. D10의 승객칸은 나무로 되어있었는데 D180의 기관차는 금속재질이라 D10측의 피해가 엄청났다.

더 큰 문제는 한창 전쟁중이라 의사는 물론이고 구조대원까지도 부족해 치료는 커녕 구조되기도 힘들었다. 여기에 더해 영하 15도의 추운 날씨 때문에 상당수의 승객들이 구조되지 못한 채 추운 날씨에 동사했다. 인근 마을 주민들을 최대한 동원해 자가용까지 써가며 승객들을 구조하고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사고로 최소 186명이 사망, 106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발표됐으나, 이는 당시 나치 독일이 피해를 축소화해 보고했다는 의혹이 있다. 시체가 아예 조각나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한채 집단으로 매장당한 시신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최소 278명 사망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이 사고는 독일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열차 사고로 기록됐다.

같은 날 독일 뷔르템베르크의 마르크도르프(Markdorf)]에선 101명이 사망하는 마르크도르프 철도 참사가 또 있었다. 이 때문에 독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선 1939년 12월 22일을 독일 철도 역사상 최악의 날이라 말하고 있다.

3. 사고 이후

D180의 기관사는 사고에서 살아남았다. 이후 겐틴역에 빨간불이 안 켜져있어 속도를 냈다 주장했으나 소용 없었고 징역 3.5년형을 선고받았다.

D180기관차는 수리 후 다시 사용되어 80년대까지 사용됐다.

현재 겐틴역에는 추모비가 설치되어있다. 추모비에는 사망자수가 278명이라 기록되어있다.

[1] 현재의 작센안할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