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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9 17:30:39

공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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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8년 12월 24일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평계리
사망 1949년 4월 23일
충청북도 옥천군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서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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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8년 12월 24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평계리(坪溪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7일 옥천군 이원면 장날에 일어난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원면 장터에서 300명의 시위대 선두에 서서연행된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헌병들을 곤봉으로 후려 때리고 유치장을 파괴하여, 갇혀 있던 동지들을 구출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원면의 만세 시위는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한 허상기(許相基)·허상구(許相球) 형제가 귀향하며 시작되었다. 형제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 몇몇과 비밀리에 광목과 종이 등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3월 27일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27일 오후 1시경 이들의 주도로 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 도중 허상기 등이 연행되자 군중은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의 발포로 이일만(李一萬)의 동생이 사망하였다.

당시 구장으로서 시장에서 이일만으로부터 비보를 전해 듣고 크게 분노해 죽은 이의 시신을 짊어진 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다. 헌병에게 “사람을 죽이고도 이대로 끝내려고 하는가? 이후에 어떻게 조치할 것인가?”고 따져 물으며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또한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이날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요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동일한 3년 형을 선고하였다. 다시 ‘한국 민족으로서 정의로운 행동을 하였으므로 유죄 판결은 부당하다’라고 상고하였으나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공재익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