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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9:35

과거 제도/부정행위

파일:external/pds.joins.com/2011112919458223731_4.png
중국의 부정행위 속옷 협대. 부정행위를 막아보겠다고, 청대에는 모든 과거 응시생을 독방에 집어넣고 가둬서 시험을 쳤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속옷을 커닝페이퍼로 활용한 협대이다.[1]
1. 개요2. 수법3. 단체 행동화
3.1. 역할
4. 처벌5.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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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거 제도부정행위를 다룬 문서. 오늘날의 시험과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과거 제도에도 수많은 부정행위들이 존재했다.

2. 수법

수법은 아래와 같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아래 언급된 부정행위들은 모두 실제 저질렀던 것들이며, 숙종시기 언급된 대표적인 과거의 폐단인 과거 팔폐(科擧八弊)를 강조해서 작성했지만 실제로는 더 막장인 경우도 많았다. 참고로 조선시대 구한말 때는 이런 행위를 감인고(堪忍苦)라고 했으며 이런 폐단은 KBS 스펀지 79회 방송분에서도 소개되었다.
세도가들의 경우에는 아예 답이 주어져 있었고, 답안을 제출하는 방식도 집에 가서 답안지를 가져온다든지, 아예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포졸들이 완성된 답안지를 가져다 주든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게다가 어떤 양반은 이걸 노리고 계속 노비 바꿈질을 해서 머리가 좋은 노비를 사와서는 공부를 시킨 뒤 대리시험을 치르게까지 했다.

3. 단체 행동화

파일:external/cfs12.blog.daum.net/488eb2b570fa9&filename=%EA%B3%BC%EA%B1%B0%EC%8B%9C%ED%97%98%EC%9E%A5%EB%AA%A8%EC%8A%B5.jpg
원래는 이렇게 오와 열을 맞춰서 봐야 하지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A1%B0%EC%84%A0%ED%9B%84%EA%B8%B0_%EA%B3%BC%EA%B1%B0_%EC%8B%9C%ED%97%98%EC%9E%A5.jpg
당시 과거장을 그린 그림을 보면 아주 파라솔까지 펴놓고 느긋하게 모여앉아 다과회라도 나누는 듯한 풍경이다. 조선 말기엔 과거제 자체가 막장이 되어 난장판이란 말의 유래가 될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2]

3.1. 역할

조선 후기~말기쯤 되면 이야기에서 흔히 보듯 '혼자 공부해서 한양 올라가 단번에 장원급제해 임금님 밑에서 벼슬 시작'은 말 그대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기본적으로 과거에 1차라도 붙고 싶다면 몇 명이서 서로 역할을 나눠 단체전으로 움직여야 했다. 이렇게 단체전을 위해 모인 조원들을 '접'이라고 하며, 대개 사수, 거벽, 선접군으로 구성되었다.

4. 처벌

법적으로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은 매우 엄하게 규정되어있어서 응시생이 과거시험 보다가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베껴서 쓸 경우에는 곤장 100대에 3년간 막노동을 강제당했고, 미리 책을 들고 올 경우에도 과거응시자격이 3년간 박탈당하도록 규정이 되어있었다. 또한 응시생들뿐만 아니라 시험관이나 중간 브로커들도 영구히 관직에 임용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고종대에도 수십명의 사람들이 과거제도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보냈고, 명청시기에는 부정행위 적발 시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말기나 청나라 말기에 부정행위가 만연해있었던것을 보면 뒤로는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적당히 무마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5. 창작물

나중에 가면 명문가 자손이 낙방을 하면, 그게 덕성이 높은 증거라고 찬양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부정행위를 안 했다는 말이니까.
근래 경외 유생들이 대소 과장에서 대개 구차한 일을 면치 못하여 간혹 의심스럽다는 시비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러나 김수증[3]만은 상국 청음의 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흥과 김수항 두 사람의 형인데 그 글을 읽은 것이나 착실한 공부가 범상한 선비에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과거를 보러 가서는 시험관의 취하고 버리는 데만 맡기고 한 번도 시속(時俗)의 구구한 짓을 아니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붉은 종이 위에 이름 쓰는 것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분수를 편안하게 여기고 한가하게 살면서 오직 문집과 사기를 읽으며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으로 혼자 세월을 보내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인격이 청백하고 지조가 높은 것을 탄복하였다.
정재륜, 『공사견문록』

창작물에서 이런 난장판을 잘 묘사한 것으로 네이버 웹툰 호랭총각 과거편과 조선왕조실톡, 글로는 엽기 조선왕조실록과 웹소설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이 있다.

[1] 오늘날 중국에서도 이런 부정행위가 나타난 적이 있다.[2] 본래 조선 시대 과거를 보던 난장(亂場)에서 여러 사람이 어지러이 뒤섞여 떠들어 대거나 엉망진창인 것을 뜻하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혹은 행상인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서 벌이는 시장인 난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3] 김상헌의 손자로 동생들이 정승 자리에 오른 반면에 그 자신은 과거를 계속 봤는데도 합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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