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암 |
곽암 藿巖 | |
종목 | 울산광역시 기념물 |
번호 | 제38호 |
지정일 | 2001년 12월 20일 |
소재지 | 울산 북구 강동동 판지마을해수면하 |
시대 | 현대 |
별칭 | 박윤웅돌, 미역바위, 양반돌 |
위치 |
1. 개요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 판지마을 앞의 얕은 바다 속에 있는 바위.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8호이다.2. 상세
곽암(藿巖)은 미역바위라는 뜻이다. 이곳 판지마을 바다 속에 있는 자연암이며, ‘양반돌’ 혹은 ‘박윤웅(朴允雄)돌’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1937년에 간행된 『흥려승람(興麗勝覽)』에 의하면 박윤웅은 나말여초 때의 인물로, 당시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지방의 호족세력을 정리할 때 협조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울산은 흥려부로 승격되고, 박윤웅은 그 공훈을 인정받아 정5품 흥려백에 봉해졌다고 한다. ‘흥려’라는 말은 고려(高麗)를 흥성(興盛)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학성지』,『울산박씨세보』등에 의하면 그때 박윤웅이 동진(東津)의 땅을 하사받고, 유포에 있는 미역바위 12구를 하사 받아 미역채취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동진은 현재 울산 강동․농소를 말한다.
그 후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자기들도 곽암에서 미역을 캘 수 있게 해달라는 주민들의 호소를 듣고 박윤웅의 울산박씨 문중 후손이 대대로 소유했던 12구의 바위를 국가에 환수시켰다. 하지만 환수 후 3년 내내 미역 흉작이 들자 그 중 1구를 다시 박씨 문중에게 주어 일제강점기까지 소유권이 이어졌다고 한다.
『흥려승람』 권 1, 인물조에는 어사 박문수가 ‘위대한 공은 영원히 썩지 않는다.’는 뜻으로 바위 면에 “윤웅(允雄)” 두 글자를 새겼다고 전하나 지금은 확인되지 않는다.
3. 여담
미역이 생장하는 바위는 곽전으로 불리기도 한다.곽암 주변의 울산 동해안은 쿠로시오 해류의 지류인 쓰시마난류 중 한반도 동해안의 사면을 따라 북상하는 동한난류가 통과하는 곳으로 수온이 10℃를 상회하여, 미역이 생육하기 위한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다.
해안은 신생대 제3기에 형성된 화산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미역이 바위에 붙어 자생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다. 파도가 세고 조수간만의 차가 적어 미역 자생지로는 최고의 장소로 꼽힌다.
곽암 미역은 예로부터 임금님께 진상되었으며, 3∼4월에 채취된 미역 맛이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울산지방은 조선시대에 제주도 다음으로 미역 생산량이 많았던 곳이며, 지금도 미역이 채취되고 있다.
곽암은 사람들의 노력이나 삶의 지혜로부터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데에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 지금은 울산광역시의 대표적인 향토 경관자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특히 곽암은 조선 후기 미역 생산과 관계가 있는 곳으로 조선 후기의 경제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4. 외부 링크
5.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8호
곽암(藿巖)은 미역바위라는 뜻이다. 이곳 판지마을 바다 속에 있는 자연암이며, ‘양반돌’, ‘박윤웅(朴允雄)돌’ 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1937년에 간행된 『흥려승람(興麗勝覽)』에 의하면 박윤웅은 나말여초 당시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지방의 호족세력을 정비할 때 협조하였다. 그로 인해 울산은 흥려부로 승격되고, 박윤웅은 그 공훈을 인정받아 정5품 흥려백에 봉해졌다고 한다. ‘흥려’라는 말은 고려(高麗)를 흥성(興盛)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학성지』,『울산박씨세보』등에 의하면 그때 박윤웅이 동진(東津)의 땅을 하사받고, 유포에 있는 미역바위 12구를 하사 받아 미역채취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동진은 현재 울산 강동․농소를 말한다.
그 후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주민들의 호소를 듣고 울산박씨 문중 후손이 대대로 소유했던 12구의 바위를 국가에 환수시켰다. 환수 후 3년 내내 미역 흉작이 들자 그 중 1구를 다시 박씨 문중에게 주어 일제 강점기까지 소유권이 이어졌다고 한다.
『흥려승람』 권 1, 인물조에는 어사 박문수가 ‘위대한 공은 영원히 썩지 않는다.’는 뜻으로 바위 면에 “윤웅(允雄)” 두 글자를 새겼다고 하나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조선 후기의 미역 등의 생산과 관계가 있는 곳으로 조선 후기의 경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인간의 지혜와 노력이 가해진 문화재와 구별되는 자연물로서 가치가 있다.
1937년에 간행된 『흥려승람(興麗勝覽)』에 의하면 박윤웅은 나말여초 당시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지방의 호족세력을 정비할 때 협조하였다. 그로 인해 울산은 흥려부로 승격되고, 박윤웅은 그 공훈을 인정받아 정5품 흥려백에 봉해졌다고 한다. ‘흥려’라는 말은 고려(高麗)를 흥성(興盛)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학성지』,『울산박씨세보』등에 의하면 그때 박윤웅이 동진(東津)의 땅을 하사받고, 유포에 있는 미역바위 12구를 하사 받아 미역채취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동진은 현재 울산 강동․농소를 말한다.
그 후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주민들의 호소를 듣고 울산박씨 문중 후손이 대대로 소유했던 12구의 바위를 국가에 환수시켰다. 환수 후 3년 내내 미역 흉작이 들자 그 중 1구를 다시 박씨 문중에게 주어 일제 강점기까지 소유권이 이어졌다고 한다.
『흥려승람』 권 1, 인물조에는 어사 박문수가 ‘위대한 공은 영원히 썩지 않는다.’는 뜻으로 바위 면에 “윤웅(允雄)” 두 글자를 새겼다고 하나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조선 후기의 미역 등의 생산과 관계가 있는 곳으로 조선 후기의 경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인간의 지혜와 노력이 가해진 문화재와 구별되는 자연물로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