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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8:18:42

교향곡 제1번(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 f단조 2번 B장조
'10월 혁명에 바침'
3번 E♭장조
'5월 1일'
4번 c단조 5번 d단조
6번 b단조 7번 C장조
'레닌그라드'
8번 c단조 9번 E♭장조 10번 e단조
11번 g단조
'1905년'
12번 d단조
'1917년'
13번 b♭단조
'바비 야르'
14번 15번 A장조

정식 명칭: 교향곡 제1번 F단조 작품 10
(Sinfonie Nr.1 f-moll op.10/Symphony no.1 in F minor, op.10)

1. 개요2. 창작 배경3. 곡의 형태
3.1. 평가
4. 출판

1. 개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첫 번째 교향곡. 레닌그라드 음악원 작곡과 졸업 작품으로 1923년에 착수해 2년 뒤인 1925년 완성했으니 겨우 열아홉 살에 첫 교향곡을 만든 셈이다. 선배였던 음악원장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가 열여섯 살 때 첫 교향곡을 발표했던 것보다는 늦었지만 쇼스타코비치 역시 이 곡을 통해 소년작곡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처녀작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뛰어난 작품성을 갖고 있어서 초연 후 바로 소련 밖에서 수 차례 공연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으며 현재에도 꽤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2. 창작 배경

쇼스타코비치는 13살인 1919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1]에 입학했는데 당시 음악원 원장이었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는 쇼스타코비치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를 아껴서 물심 양면으로 돌봐주었다.

이 1번 교향곡은 1925년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음악원 졸업작품으로 제출되었는데[2], 당시 쇼스타코비치를 전폭적으로 지도한 글라주노프는 문서에 있듯이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작곡가였기 때문에 그의 지도방식도 당연히 보수적이었다.[3] 때문에 쇼스타코비치가 이 곡을 작곡할 때 불협화음이 너무 많다던가 학생이 작곡한 곡 치고는 전개가 너무 파격적이라는 등의 딴지를 걸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직접 곡을 교정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4]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나이가 어린데다 경제적으로도 글라주노프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때문에 11살 선배인 프로코피예프처럼 드러내놓고 반발을 하지는 못했지만 글라주노프의 이야기를 수용하는 척 하면서 결국 자신의 뜻대로 작곡한 악보를 그대로 제출했다.

하지만 당시 졸업작품의 심사위원 중 한명이었던 글라주노프는 의외로 이 곡을 높게 평가하고 자신의 뜻을 거스른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대인배 초연은 악보를 제출한 이듬해인 1926년 5월 12일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로 레닌그라드에서 이루어졌다.

3. 곡의 형태

고전적인 교향곡의 형태인 4악장 형식을 준수하고 있으며 스승 글라주노프가 너무 앞서간다고 불평을 하긴 했지만 당시 기준에서 봤을 때도 그렇게 급진적인 작품은 아니다.

다만 보통 2악장에 배치하는 느린악장과 3악장에 배치하는 스케르초의 순서를 바꾸었으며 3악장과 4악장을 중단없이 연주하거나 타악기에 글로켄슈필이나 피아노를 도입하는 등의 참신한 시도도 많이 나타난다. 특히 이후 쇼스타코비치 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특징이 되는 아이러니와 신랄함이 이 작품에서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연주 빈도가 꽤 높다.

악기 편성은 다음과 같다.
1악장은 약음기 끼운 트럼펫과 바순이라는 약간 의아한 조합의 짤막한 인트로(서주)로 시작되는데, 두 개의 대비되는 주제를 배열하고 발전시키는 고전 소나타 형식을 바탕으로 했지만 반음계 진행을 자주 사용해 조성의 모호함을 끊임없이 가져다주고 있다. 관악기를 솔로로 자주 활용하고 있는 것도 특징.

2악장은 ABA 3부 형식을 바탕으로 한 스케르초인데, 여기서도 후반부에 A의 반복을 그대로 하는 대신 갑작스러운 단절과 정적을 줘서 꽤 충격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피아노가 가장 화려하게 사용되는 대목인데, a단조 코드의 3연타는 피아노의 타악기적인 특성을 살리는 동시에, 협주곡처럼 동등한 위치로 배치되지 않는 이상 관현악에 편입시키기 어색한 악기로 여겨지던 선입견을 단번에 깨는 아이디어로 극찬을 받았다.

느린 3부 형식 3악장은 오보에 솔로로 시작하는데 다소 감상적으로 흘러가면서 차이콥스키바그너의 느낌이 난다. 특히 오보에 다음으로 나오는 첼로 솔로는 아예 첫머리 음의 진행이 바그너의 연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중 제3부인 지크프리트에서 나오는 동기와 상당히 유사한데 일부러 차용한 것으로도 여겨진다. 첼로 독주 이후 강렬한 총주가 등장한 후 저음악기들이 지속적으로 배경선율을 연주하면서 여러 악기들이 등장하는데 금관이 가열차게 연주하는 부분에서는 말러적인 느낌이 든다.

3악장 후반부에서 음이 점점 잦아듬과 동시에 스네어드럼의 트레몰로가 스멀스멀 기어나오면서 곧바로 4악장으로 넘어가는데, 템포가 곧장 바뀌지는 않지만 다소 내동댕이쳐지는 느낌으로 분위기가 급변한다. 이후 3악장의 분위기로 어느 정도 돌아가지만 템포가 빠르게 바뀌면서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빠른 반음계 악구의 주제로 본론이 시작된다.

분위기는 1악장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변화가 심한 편이고, 3악장에서 나왔던 오보에와 첼로의 솔로 선율이나 트럼펫이 연주하던 신호나팔 풍의 리듬도 중요한 소재로 쓰인다. 종결부 직전에는 갑자기 흐름이 끊기고 팀파니가 강렬한 솔로를 연주하기도 하고, 마지막은 템포를 좀 더 당겨서 굉장히 빠르고 격렬하게 마무리짓고 있다.

3.1. 평가

1926년의 초연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으며 이 곡을 지휘한 니콜라이 말코는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가 탄생했다는 것을 느꼈다'라고 극찬했다. 이 곡은 금세 소련 밖에서도 화제가 돼서 초연 다음해인 1927년에는 베를린(브루노 발터) 1928년에는 필라델피아(스토코프스키)와 뉴욕(로진스키) 등에서 연주가 이루어졌다. 21세기 현재에도 쇼스타코비치의 다른 유명 교향곡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연주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아직 10대인 소년작곡가가 썼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와 개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향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의 지향점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연구 가치도 높은 곡이다.

다만 곡 전반적으로 솔로 악기들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아서 순수한 의미의 교향곡이라기 보다는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와 같이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에 더 가깝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실력있는 관현악단들에서는 개별 주자들의 역량을 발휘시키기 좋다는 이유로 종종 메인 프로그램에 선곡하고 있다.

4. 출판

출판은 이듬해인 1927년에 소련 국립음악출판소에서 이루어졌고, 해외에서는 앵글로소비에트 음악출판사 등이 간행했다. 저작권 사유화가 금지된 소련 체제의 특징 때문에 해외에서는 여러 출판사들이 저마다 판권을 주장하면서 악보를 간행했는데, 그렇다고 이 출판사들이 쇼스타코비치에게 로열티를 지급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언어권별/지역별로 여러 출판사들이 곡의 악보를 내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일본의 젠온 음악출판사가 간행한 미니어처 스코어[6]를 가장 쉽게 입수할 수 있다.[7]


[1] 다만 쇼스타코비치가 입학할 때 음악원의 공식 이름은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이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1914년 도시 이름이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기 때문. 이후 1924년에는 다시 레닌그라드 음악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2] 전술한 것 처럼 이 때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으로 이름이 바뀐 상황이었다.[3] 이로 인해 프로코피예프같이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음악원의 제자들과 충돌을 많이 일으켰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4]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글라주노프의 이런 행동을 무조건 비난하기는 어렵다. 글라주노프는 학생들이 당시 음악계를 휩쓸고 있던 각종 급진적인 음악 사조에 몰입해서 대위법과 화성학 같은 전통적인 음악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직은 배우는 단계이니만큼 일단 작곡의 기초를 착실히 다져야 된다는 것인데, 분명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5] 피콜로는 제3플루트를 겸하고 제2플루트는 피콜로도 같이 연주한다.[6] 또는 포켓 스코어. 라이트노벨 단행본들과 마찬가지로 큼지막한 외투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게 인쇄되어 있다. 공연 무대에서 지휘자가 넘겨보는 대형 총보는 풀 스코어라고 한다.[7] 2016년 현재는 시코르스키 에디션 미니스코어가 쉽게 입수된다.